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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6.02 09:32

'불후의 명곡' 바다 '소녀시대', "15년 차 중견의 당당함에 압도"

십인십색의 가수들의 성찬, 축제를 즐기다

▲ 사진출처='불후의 명곡' 방송캡처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필자가 좋아하는 말 가운데 평범하게 잘한다는 것이 있다. 세상에 없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만이 가능한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어떤 특별함보다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보통과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보편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탁월함은 곧 자신의 개성이며 남다른 특별함이 될 것이다.

이승철의 노래는 반드시 이승철이어야 한다는 강박이나 고집이 없다. 누가 불러도 곧 자신의 노래인 것 같다. 대중가요로서 히트곡이란 곧 대중의 보편적 정서에 부합하는 노래라는 뜻이기도 하다.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곧 그 당시의 히트곡이 되는 것이다. 그런 노래는 또한 누가 불러도 좋은 노래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도 이승철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만이 갖는 바로 그 특별함 때문일 것이다.

탁월한 곡해석과 그것을 소화해내는 천변만화의 그러나 바위처럼 단단한 기초의 발성은 같은 노래를 같은 방식으로 불러도 전혀 다른 특별함으로 들리게 만든다. 이승철이 부르면 다르다. 하지만 굳이 대중의 위에 군림하거나 그들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윽박지르지도 그것을 거스르려 하지도 않는다. 팔색조라 부른다. 변덕스런 대중의 요구에 맞춰서, 그리고 노래에 가장 어울리는 목소리와 창법을 찾아서, 그렇게 이승철은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왔고 또한 단련시켜왔다. 그가 여전히 현역으로서 무대에 설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과연 훌륭한 가수들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어떤 이유에서든 혹은 많거나 적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이미 기성가수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가수들에 비해 뛰어난 점이 있기에 팬들로부터도 인정받을 수 있다. 더구나 그 가운데 다시 다수는 대중적으로도 상당한 인지도를 얻고 있는 이른바 인기가수들일 터였다. 자기만의 색깔로 이승철이 불렀던 시대의 명곡들을 다시 소화해 부른다. 다만 그럼에도 결국 느끼게 되는 것은 이승철이란 정말 얼마나 대단한 가수였는가 하는 것일 게다. 그럼에도 역시 이승철만은 특별하다.

평범하게 잘한다는 말이 어울리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 또한 케이윌일 것이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재주는 없지만 노래에 빠져들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다. 케이윌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데는 서툴러도 노래만큼은 충실하게 더함도 덜함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능력이 있다. 물론 노래에는 케이윌만의 감성이 듬뿍 담겨 있다. 화려함은 없지만 단단하고 올곧다. 케이윌이라는 가수 대신 '오직 하나 뿐인 너를'이라는 노래를 듣는다. 원래 이 노래는 이런 노래였을 것이다.

참으로 난감하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를 어쩌란 말인가? 솔직하게 털어놓고 고백을 해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처지와 고민을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해볼까? 그렇다고 친구를 위해 쿨하게 포기하기에는 지금 자신의 감정이 너무나 간절하고 절실하다.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 도입부에 쓰인 이펙터는 그같은 화자 자신의 혼란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전혀 신경따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전혀 진지해질 것도 심각해질 것도 없다. 그렇게 허세처럼 자기에게 이야기한다. 당당하지도 오만하지도 그렇다고 자신을 감추려 하지도 않는 그런 솔직함을 사람들은 아마 사랑스럽다 말하는 것일 게다. 정인이 부른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는 진짜였다. 그녀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고 무대였다.

마치 어느 재즈바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중성의 나른한 저음과 경쾌한 브라스의 연주가 어우러지며 원곡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를 들려준다. 노니는 듯, 단지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노래를 들려주기보다 가수 자신을 보여주는데 더 집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어느새 노래마저 잊혀지고 무대에는 나인이라는 이름의 가수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워낙 매력적인 목소리와 무대매너를 보여주고 있었기에 어색함은 없었다. 새로운 재능있는 보컬리스트를 만난다는 것은 항상 큰 기쁨일 것이다.

바다의 '소녀시대' 무대를 보면서는 순간 말을 잊고 있었다. 아, 그녀가 바다였구나.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항상 당당해지고 싶고 멋있어 보이고 싶다. 잡히고 싶지 않다. 우습게 보이는 것은 절대사절이다. 나는 결코 어리지 않다. 나는 결코 작지도 나약하지도 어리석지도 않다. 그러니 나를 보아달라. 서른을 넘긴 나이에도 그것은 다르지 않다. 그녀 역시 아이돌이었으며 현역 가수이자 뮤지컬배우일 것이다. 화려한 퍼포먼스와 그럼에도 전혀 흔들림없는 단단한 자아와도 같은 노래는 그녀가 어느새 데뷔 15년차의 중견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위치에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차라리 '불후의 명곡2'의 무대가 그녀에게 불경인 것 같다. 우승은 이미 그녀가 무대에 선 순간 결정된 기정사실이었다.

아마도 처음 노래를 부른 가수 자신의 나이대가 이와 같은 해석의 차이를 만들지 않았을까. 젊다는 것은 에너지가 넘친다는 뜻이다. 그만큼 좌절도 쉽게 하고 일어나기도 다시 쉽게 일어난다. 순간순간이 격정이다. 아직 서툰 구석이 있어서도 더 그렇다.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대로 모두 발산해버리는 신용재의 노래가 그렇다. 반면 30대 중반에 처음 '네버엔딩스토리'를 불렀을 당시 이승철은 그리고 곡을 쓴 김태원 역시 당장의 이별의 아픔보다는 그럼에도 꾹꾹 누르고 눌러 노랫말처럼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갖고자 했었다. 만날 수 없을 것을 지레 알기에 만날 수 있기를 애타게 부르짖는 신용재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믿고 있기에 지금의 고독을 이길 수 있었던 이승철의 원곡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였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모든 슬픔을 쏟아내고 나서는 어느새 망각이라는 축복 속에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잊을 수 있다는 것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승철이 아닌 이정이 이 노래를 처음으로 불렀다면 이 노래는 다름아닌 이정의 '인연'이라 불리게 됐을 것이다. 물론 불필요하고 불가능한 가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노래는 훌륭한 이정의 '인연'이었다. 뛰어난 곡해석과 그것을 섬세하게 전달하는 표현의 기술과 역량에서 이정이란 이미 이 순간 '인연'이라고 하는 노래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하필 비교대상이 다름아닌 이승철이라는 것이 이정으로서는 불운이었을 것이다. 최소한의 악기만으로도 자기 목소리를 악기삼아 무대를 채워낸다. 과연 이정이라 할 것이다. 감탄을 넘어섰다.

이승철의 라이브를 듣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이었을 것이다. 들국화처럼 이승철에게도 한 곡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정이 부른 '인연'의 한 조각을 방청객과 시청자를 위한 선물로 내놓았다. 케이윌의 말처럼 그것은 이정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독 즉석에서 요청받고 노래를 부르려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노래가 다름아닌 이정의 '인연'이었기 때문이다. 이승철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정도로 그의 노래른 훌륭했다. 과연 명불허전, 단 하나 목소리만 있으면 세상을 모두 노래로 채워 넣을 수 있다.

훌륭한 가수들이었다. 이승철이야 당연히 전설일 테지만, 바다는 차라리 '불후의 명곡2'에 출연한 자체가 반칙이라 할 수 있었다. 탁월한 곡해석과 전달력을 보여준 이정이나 올곧고 단단한 목소리의 케이윌, 매력적인 목소리의 나인, 이승철이 탐냈던 가수 정인, 그리고 젊은 가수 신용재. 축제다. 솔직하게 웃고 울며 즐기는 한 바탕의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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