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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서문원 기자
  • 이슈뉴스
  • 입력 2018.09.06 15:54

[S인터뷰] 이중헌 작가의 영화 인생 60년

"그때나 지금이나 살려고 맨발로 뛰는건 변함없더라"

[스타데일리뉴스=서문원 기자] 정인엽 감독, 이중헌 작가 각본의 영화 '결혼교실'(1970)은 바람둥이 재벌 2세와 미모의 여성 세명이 서로 혼인을 두고 벌이는 코믹 드라마다. 흔한 스토리는 아니다. 특히 이 영화는 두 가지 면에서 최초다. 

첫째 여자 주연배우가 세 명이다. 당시 최초로 트로이카라는 수식어가 붙은 문희, 윤정희, 남정임이다. 당시 최고의 배우들이다. 정인엽 감독의 '결혼교실' 제작 전까지 그 어떤 작품에서도 세명의 스타들이 함께 작업한 적은 없다. 

둘째 남자주연배우 강신성일이 몰고 다니던 스포츠카가 눈에 띈다. 영화 초반을 보면 주연배우 강신성일이 고속도로에서 무스탕 스포츠카를 몰고 지나간다. 당시 영화는 물론, 사회에서도 보기 힘든 차량이다. 특히 무스탕의 기능을 보면 먼 훗날에야 구현된 첨단 시스템을 선보인다.

일단 당시 몇 십대 밖에 없는 무선 카폰(Car-Phone)이 있다. 국내 최초라고 볼수 있다. 하지만 다음 소개하는 기능은 지금도 완벽한 시스템으로 거듭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른바 A.I 기능이 포함된 자동응답기가 운전석 앞에 내장됐다.

가령, 영화 '결혼교실'에 나오는 차량과 유사한 기능을 선보인 작품은 1982년 데이빗 핫셀호프 주연의 '전격Z작전' 시리즈가 두번째다. 

▲ 1970년작 '결혼교실' 스틸컷. 상단과 하단 왼쪽을 보면 1982년 미 인기시리즈 '전격Z작전'에 나오는 A.I. 기능의 자동응답장치와 카폰이 보인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결혼교실'처럼 정인엽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이중헌 작가가 집필한 작품들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총 11편이다.

이들 중 정인엽 감독의 1965년 데뷔작 '성난 영웅들'은 당시로는 흔치 않은 사회성이 짙은 스토리를 품었다. 

한국동란 이후 잿더미나 다름 없던 전국. 그저 맨 주먹 하나만 믿고 소문만 무성한 경북 포항 모래사장에서 석유를 시추한다는 이야기이다. 아울러 이 작품을 만드는데 산파역을 맡은 사람은 다름아닌 정인엽 감독의 절친 이중헌 작가다.   

화제를 돌려, 작년 실험영화 감독 여성 1호 이공희 감독이 그녀의 대선배 정인엽 감독과 그의 죽마고우 이중헌 작가를 소개시켜준 적이 있다. 그뒤 수차례 만나 두 분의 영화 이야기를 경청하곤 했다. 

먼저 '애마부인' 시리즈로 알려진 정인엽 감독은 국내 영화계 원로다. 외모만 보면 환갑이라고 해도 믿겠으나 이분은 고희를 넘어섰다.

1938년 11월 생인 시나리오 작가 이중헌 선생은 올해로 만 80세. 이분을 만난건 작년 가을, 서울 중구 충무로에 위치한 한 작은 커피숍에서다. 

"그때나 지금이나 살려고 맨발로 뛰는건 변함없더라"

이중헌 작가는 평범한 용모와는 거리가 있다. 멀리서 봐도 뚜렷한 뿔테 안경, 하얀 수염, 그리고 호탕한 웃음이 시선을 끈다. 이 두분은 만날 때마다 서로 영화 이야기로 수다를 떤다고 한다. 촬영 현장에서 반세기가 넘도록 생을 보냈으니, 이제 두 분에게 영화란 애증과도 같은 존재다.

한편 작가 이중헌 선생께 인터뷰를 요청하고 얼마안가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만났다. 무척이나 더운 여름이었다.

Q. 첫 대본은 어떤 작품이었습니까? 

'맨발로 뛰어라'였어요. 1964년에 만들었죠. 당시 국내는 일본영화 시나리오를 많이 번안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지. 그때 한국은 폭력물부터 국적불명의 영화들을 주로 프로덕션했죠. 돌아보면, 우리네 현실(시대상)과 많이 엇나갔다고 생각했었죠.

북한에서는 "남한 젊은이들은 신발도 없이 맨발로 뛰어다닌다"라고 대남선전을 하곤 했지. 그런 배경을 안고 '맨발로 뛰어라'를 썼어요. "우리 청춘은 맨발로 뛰어야만 된다"라는 소망을 그려냈죠.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살려고 맨발로 뛰는건 마찬가지입디다. 

Q. 시나리오 작가가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난 종로구 행천동 태생인데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했지. 한국동란 끝나고 온 세상이 힘들었지. 그때 극장은 외화가 대세였어요. 머빈 르로이 감독이 만든 '애수'(1940)가 크게 흥행하고 그랬었죠. 

그때 1956년인가.. 연합신문사에서 국내 최초로 100만환(현재가치 약 1천만원)을 걸고 시나리오 공모전을 열었어요. 그래 인근 교회를 나가 기도도 하고 그랬어요. 정말 영화를 만들고 싶었거든. 근데 보기 좋게 떨어졌어. 돌이켜 보면 그때 받았던 좌절이 나를 다시금 영화계로 이끌었지. 지금도 감사해요. 당시 공모한 대본을 보면 부끄럽지. 그때 됐으면 어쩔뻔 했어요? 

작가 이중헌 "공모전 탈락이 영화계로 이끈 원동력"

공모전에서 떨어지고 두문불출하다가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에 들어가 영업부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당시 내가 하던 일은 필름 갖고 영업부 직원들과 통일호 타고 지방 극장표 관리를 했어요. 광주, 대전, 부산, 대구 등을 다녔어.

일을 한참 할 때였어요. 전남 여수에서 도금봉, 허장강씨가 주연배우를 했던 '대심청전'을 상영하는데 중고등학교에서 학생 동원이 많았어요. 좌석이 1천명이면, 2천명이 들어가 입석까지 차지하곤 했었지. 그때 입장료로 받은 돈을 미군부대에서 쓰던 보루 박스로 쓸어 담고 그랬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있었어요. 극장에서 조그마한 초등학생 아이가 내게 다가와서 돈도 못내고 밀려 들어갔다고 입장요금을 주는거야. 아이가 내게 감동을 줬어요. 다시 보고 싶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학생들이 썰물 빠지듯이 나가는 바람에 못 만났지요.

Q. 정인엽 감독과의 인연은 오래됐나요? 

내가 젊을때 충무로(극동빌딩 자리)는 영화배우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전국서 모였어. 정인엽 감독도 그중 한명이었어요.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었지. 그때 영화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자주 만나곤 했었죠. 근데 내가 영화제작에 참여하고 있는데 정인엽이 날 찾아왔어요.

그때.. 명동에 학사주점이라고 있었지. 당시 정인엽이 조연출이었는데, 내게 감독을 하고 싶다고 진지하게 고백했지요. 정말 영화를 향한 열정을 담아 절박한 심정으로 내게 말을 건낸거요. 그 진지함에 감동받았지요.

그래 만든 시나리오를 들고 내 첫 각본으로 만든 '맨발로 뛰어라'의 제작사 사장을 찾아갔어요. 명동 신도호텔로 갔죠. 그때 아는 이를 데리고 가서 대본을 독해(제작사 직원 앞에서 변사처럼 각본을 읽어주는 모션)를 했었어. 그리고 사장에게 부탁했지. "정인엽을 감독으로 만들어주세요"라고 말이지.

결국 제작사가 흔쾌히 수락해서 만든 영화가 '성난 영웅들'이요. 그뒤에도 여러 작품을 같이 했었어요.

Q. 오랫동안 한국영화계에 몸담고 계셨군요? 

예. 밥먹고 살게 해준 곳이 영화계였지. 계속해서 일했죠. 사극, 코미디, 만화영화, 가요경연을 다룬 '가수왕'(1975)도 80년대에는 '괴초도사', '팔대취권' 같은 무림영화 각본도 썼었죠. 그뒤에는 국방부 홍보부에서 국군 홍보영상물을 만들었죠. 

영화 각본을 쓰는 동안 제 아내가 저 때문에 많이 고생했어요. 원고 마감만 다가오면 여기 저기에서 전화가 빗발치고 그걸 다 받아줬었지. (이중헌 작가는 오래전 부인과 사별했다) 나한텐 든든한 버팀목이었어요. 너무 미안했고, 사랑했지요.

Q. 마지막으로 영화란 작가님께 어떤 존재인가요? 그리고 새로 쓰시는 작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영화는 내게 삶이었어요. 내 인생의 전부. 60년이 넘도록 영화계에 있었어요. 우여곡절도 많았고, 정인엽 감독 같은 평생 친구도 얻었고.

신작은 어느정도 쓰고 나서 얘기합시다. 이제 난 나이도 들었고, 매 작품마다 같겠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지금도 뭔가 집중하고 있어요. 하하. 

▲ 왼쪽은 이중헌 작가와 정인엽 감독의 올초 모습이다. 오른쪽은 이중헌 작가와 인터뷰 컷이다 ⓒ스타데일리뉴스

이중헌 작가가 안겨준 한국영화 수많은 배우들과 감독이 보인다

올해로 만 80세가 된 이중헌 작가는 당대 최고의 감독, 배우들과 한국영화를 만들었던 원로다. 이용호, 김기, 남상진, 이형표, 이상언, 김수형, 황동주 그리고 작가의 절친 정인엽 감독과 함께 다수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중헌 작가가 집필한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도 화려하다. 당대 최고의 스타 강신성일은 물론, 엄앵란, 신영일, 허장강, 박노식, 박암, 김희갑, 문희, 남정임, 윤정희, 트위스트 김, 김대업, 이대근, 최불암, 김희라, 백일섭, 이영옥, 여운계, 김동현, 이영하, 김보연, 이미숙, 최화정이 있다. 배우 김수미의 데뷔작 '화순이'(1982)도 그의 각본이다. 이중헌 작가의 최근 작품은 1990년에 상영된 '머나먼 사이공'(주연 이동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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