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4.07 08:46

불후의 명곡2 "그냥 들렸고 그저 불려지는, 해바라기와 만나다"

명곡이라는 말조차 아쉬운 익숙함과 친숙함. 반가움조차 새삼스럽다

▲ 사진='불후의 명곡2' 로고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포크는 미국의 민요로부터 시작되었다. 민요란 질박함이다. 꾸미지 않은 계산되지 않은 솔직함일 것이다. 문득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간결하면서도 친숙한 멜로디에 실어 읊조려 부른다. 악기는 기타 하나면 좋다. 아니면 작은 북 하나, 그조차도 없으면 그저 지나가는 바람소리로도 좋다. 무릎을 쳐서 장단을 맞추고 어깨를 들썩여 흥을 돋운다. 누군가 흥에 겨워 넣어주는 추임새야 말로 최고의 악기일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해바라기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치 동요를 듣고 있는 것 같다. 거르고 거르고 또 걸러 남은 투명함이 그러할까? 물론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순수와는 다를 것이다. 말 그대로 어느새 세상을 알고 그 세상에 휩쓸리면서도 끝내 붙잡고 놓지 않는 본연의 순수 그 자체일 것이다. 그만큼 강하고 그만큼 올곧고 그래서 듣고 있으면 치유가 되는 것 같다. 여름의 소나기처럼 그렇게 세상을 투명하게 시원하게 씻어준다.

60년대 시작된 포크문화가 비로소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다고나 할까? 포크라는 구분조차 모호하다. 그냥 노래다. 가요라는 구분조차 무의미하다. 그래서 '대중'이라는 말이 앞에 붙는 모양이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굳이 꺼리거나 가리는 것 없이 누구나 즐겨 듣고 부른다. 그것이 누구의 노래라서가 아니라, 아니 누구의 노래라는 인식조차 없이 입에서 입으로 마치 민요처럼 전해지고 또 불려진다. 거칠고 격정적인 본능의 감정이 아닌 정제된 순수의 감정을 담아. 아마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해바라기라는 이름조차 잊혀졌어도 해바라기의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지 않을까.

사연이 슬프다. 가난에 치여 어린 네 자매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장 어린 세 살 짜리 막내가 끝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그들의 사정을 살펴주는 이가 있었더라면. 그 아이들이 느껴야 했을 절망을 다독여줄 수 있는 단 한 사람만 있어주었더라면. 하지만 아직 모두가 어렵던 시절이었고 사회의 그늘진 곳까지 살피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불렀다 한다. 사랑으로. 사랑으로. 그래서 어쩌면 해바라기의 원곡은 영가와도 같이 경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쏘냐는 다르다. 사랑이란 슬픈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아픈 것이 아니다. 설사 슬프고 아프더라도 결국은 기쁘고 행복한 것이다. 그것을 믿는다. 긍정의 미래를 믿고 낙천의 사람을 믿는다. 그래서 어린이들을 무대에 세운 것일 게다. 어린이란 미래다. 촛불이란 희망이다. 사랑한다. 사랑해야 한다. 그럼으로 모두는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모두는 행복해질 수 있다. 모두는 기쁘게 웃을 수 있다. 환희를 닮았다. 그야말로 희망이 모든 것을 밝혀주고 있었다. 차라리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꿈보다 더 아름다운 순수이고 격정이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꿈이 어디 있을까. 그 시리도록 아픈 꿈을 믿고 나간다.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다.

B1A4의 멤버 산들에 대해 항상 감탄하는 부분일 것이다. 사실 그 나이면 아무래도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강한 때일 것이다. 억지로라도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고 싶다. 노래를 잘하는 만큼 더욱 자신의 노래를 주위에 자랑하고 널리 인정받고 싶다. 하지만 산들은 그런 욕심으로부터 한 발 물어날 줄 안다. 노래가 갖는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어쩌면 아직 어린 나이일 테지만, 그러나 대신 노래가 전하고자 하는 그것에 충실할 줄 안다. 인위적인 기교 없이 최대한 힘을 빼고 노래가 갖는 느낌 자체에 집중할 줄 안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무서운 재능일 것이다. 어느새 산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그의 노래에 집중하는 필자 자신이 있다. 가사를 듣고 멜로디를 듣고 그것을 들려주는 가수의 목소리를 듣는다. 비록 쏘냐의 어린이 합창단 30명에 밀려 1승에는 실패했지만 가수로서 산들의 미래에 거는 기대가 더욱 커지는 까닭이다. 노래를 잘하는 것보다 노래를 더 잘 이해한다. 대단하다거나 특별한 무엇은 없었지만 '나는 그대 품안에'가 그 안에 있었다. 비로소 오랜만에 온전히 노래를 듣고 따라부를 수 있었다.

틴탑의 '내 마음의 보석상자'는 그야말로 틴탑이 '내 마음의 보석상자' 그 자체였을 것이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신있는 것을 한다. 확실히 '해바라기' 특히 이주호의 노래는 무언가 손을 대기에 매우 애매한 것이 있다. 워낙 통기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간결한 멜로디가 조금이라도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어색해질 것만 같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원곡은 최대한 살리되 그 위에 자신들의 개성을 싣는다. 틴탑다웠다. 틴탑이라는 보이그룹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도 무대를 보는 순간 틴탑을 떠올리게 되었을 것이다.

문명진의 '슬픔만은 아니겠죠'는 노래란 이렇게 부르는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것은 지나고 나서의 필자의 주관적 인상이다. 전혀 과시하거나 주장하는 것이 없어서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알앤비 특유의 오버하는 감정도, 그렇다고 포크만의 절제된 담담함도 아닌 그 경계의 절묘한 선을 따라 노래가 갖는 의미와 느낌을 그 이상으로 살려 표현해낸다. 원숙한 베테랑의 기교와 절제된 힘이 이 노래가 과연 이런 노래였구나 새삼 감탄하게 만든다. 작곡가라면 한 번 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노래를 맡겨 불러보도록 해보고 싶어질 그런 가수일 것이다. 그가 아직까지 무명이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사람이 우는 것은 반드시 슬퍼서만은 아닐 것이다. 기뻐서도 사람은 운다. 환희에 들떠서도 사람은 울부짖는다. 달리 포효한다고도 말한다. 싸움에서 승리한 늑대처럼 차마 다 담아내지 못할 환희의 감정을 그대로 허공에 뿜어내게 된다. 그것은 과시이기도 하다. 사랑에 들뜨고 사랑에 행복한 누군가의 거센 포효일 것이다. 이들은 사랑하고 있구나. 이들은 진정 사랑에 행복하고 있구나. 듣고 있는 자신마저 마치 첫사랑에 취한 소년마냥 볼을 발그레하게 행복해지게 만드는 힘이 있다. 포맨이다. '사랑의 시'는 그들의 노래였다. 남자의 노래였다. 이렇게까지 노래가 관능적일 수 있다. 남자지만 섹시하다.

오랜만에 보는 이주호의 모습이 반가웠다. 팬조차 아니었다. 왁스의 말처럼 그냥 들리고 있었다.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냥 들리니까 자연스럽게 따라부르고 있었다. 해바라기라서가 아니라 그저 익숙하게 듣고 따라부르고 있었다. 어쩌면 팬이라는 말조차 실례까 아니었을까. 그들의 노래는 그렇게 바람처럼 내리는 비처럼 그렇게 일상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얼굴마저 생소하다. 그러나 노래만은 언제나 익숙하다. 아저씨가 되었다. 그때도 아저씨였다.

세월이 흐르면 음악도 따라서 바뀐다. 요즘은 그 변화의 주기가 더 짧아졌다. 어제 유행하던 음악이 오늘 시대에 뒤쳐진 구닥다리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음악이 갖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멜로디가 갖는 아름다움과 가사가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그 원점을 돌아본다. 어느새 숨결처럼 우리의 가까이에서 과시하지 않고서도 함께 숨쉬고 있는 음악들이. 신동엽처럼 크게 허리를 숙여본다. 감사하다. 행복하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