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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4.05 09:23

내 연애의 모든 것 "아직은 사랑하기 전, 배경의 정치를 우려하다"

민주주의의 반댓말, 정의와 효율, 그리고 증오와 냉소, 말하다

▲ 사진제공=S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민주주의의 반댓말은 독재일까? 하지만 독재란 드러난 현상에 불과하다. 독재를 하게 되는 이유, 그리고 독재를 용납하게 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정의와 효율이다. 하나의 가장 올바른 정의를 추구하며, 불필요한 비효율을 배제하려 든다. 아마 그 궁극의 형태가 바로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정치일 것이다. 가장 위대한 지성에 의해 어긋남없이 다스려지는 형태.

그에 비하면 민주주의란 비효율의 극치다. 서울에서 부산만 가면 된다. 좋은 KTX가 있다. 혹은 비행기를 타고 가도 된다. 그런데 굳이 버스를 타고 가려 한다. 괜히 차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는 걸어가겠다 한다.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부산에 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혼자서 광주로 대전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을 모두 설득해서 어찌되었거나 부산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번거롭고 성가시다. 시간과 비용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든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오답은 필요없다. 정답이 아니라면 불필요하다. 불필요한 것을 배제하고 오로지 필요한 것만을 남긴다. 그것을 누가 판단하는가? 누가 결정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누가 강제하는가? 굳이 특정한 개인에 의한 독재라는 형식을 빌 필요도 없다. 히틀러를 선택한 것은 다름아닌 독일국민들이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방식에 적극 찬성하여 그에 대해 다수의 독일인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독일인들만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있었다. 그 또한 매우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독재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특정한 개인, 혹은 소수에 의한 강제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 대한 다수의 열광적, 혹은 최소한 암묵적 지지와 동의를 전제한다. 그래서 근대 이후 나타난 이와 같은 형태의 독재를 두고 전체주의라 이름하기도 한다. 동의받지 못한 독재란 단지 전근대적인 전제적 지배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부정하며 붕괴되어가는 과정이다. 가장 올바른, 작은 오류조차 용납하지 않는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형태의 정치를 추구하려 할 때 나머지는 배제되고 한 가지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종류의 드라마가 위험한 이유일 것이다. 이놈도 저놈도 똑같다. 이놈이나 저놈이다 다 문제가 있다. 그러면서 어떤 이상화된 정치와 정치인을 보여주려 한다. 물론 그런 정치나 정치인은 현실에 없다. 좌절하게 된다. 그리고 선택한다. 둘 중 하나다. 아예 현실에 절망하며 정치를 외면하거나, 아니면 허구의 드라마처럼 이상화된 정치를 현실에서 구하려 하거나. 그래서 바람이 분다. 항상 새로운 인물이 있고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어떠한 구체적 정책이나 치밀한 검증 없이 새로운 정치라는 구호가 사람들을 현혹하게 된다. 히틀러도 그렇게 권력을 잡았다. 현실과 유리된 대중의 정치는 결국 민주주의를 안에서부터 갉아먹게 된다.

정치를 비난하고 정치인을 조롱한다. 대중을 힐난하며 가르치려 한다. 정치는 잘못되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옳은 정치를 가르쳐주겠다. 누구의 기준인가? 누구의 올바른 정치인가? 오만이다. 틀린 답도 답이다. 틀린 답을 내놓은 개인개인 역시 하나의 독립된 단위다. 그 결과에 승복한다. 설사 그것이 잘못된 결론이고 그로 인해 모두가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그 또한 모두가 약속한 선택의 결과일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반성하고 바로잡으며 조금씩 함께 앞으로 나간다. 누군가 강제로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께 넘어지고 비틀거리며 상처투성이로 부둥켜안고 앞으로 나간다. 정치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대단하고 이상적인 무엇이 아닌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현실을 부정해서는 결코 현실을 볼 수 없다.

형식도 유치하기 이를 데 없다. 불과 얼마전 필자는 미국드라마 '뉴스룸'을 보고 있었다. 구도와 장치가 유사하다. 대사조차 그 마이너카피에 불과하다. 다만 차이는 있다. 그럼에도 '뉴스룸'은 현실정치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대안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은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 안에 있었다. 그들은 투쟁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내 연애의 모든 것>에서 김수영(신하균 분)은 그런 현실을 냉소할 뿐이다. 노민영(이민정 분)은 단지 그러한 현실에 휩쓸리고 있을 뿐이다.

하기는 어째서 현실정치에서도 드라마에서와 같은 극단적인 대립과 묻지마식 동원이 일상이 되어 있는가. 효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정의만을 추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비효율은 필요없다. 불필요한 것들은 배제한다. 오로지 한 가지 답을 정하고 그것만을 위해 모든 것을 수단으로 삼는다. 김수영이 만일 당대표가 된다면, 그에게 그같은 권력이 주어진다면, 그는 비효율적이고 어쩌면 한심하기까지 한 당내의 여러 논란과 갈등에 대해 그대로 보고만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뛰어나다. 한 마디로 엘리트다. 좌니 우니,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들로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옳다. 독재자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분노가 나쁜 것은 아니다. 나쁜 것은 증오와 냉소다. 증오는 끝이 없고 냉소는 시작이 없다. 사람이 분노하는 이유는 분노하지 않기 위해서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사람은 더 이상 분노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증오는 설사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어도 또다른 문제를 찾아내게 된다. 문제는 존재 그 자체다. 그리고 그같은 깨달음은 아예 문제에 접근하기를 꺼려하게 된다. 김수영은 아예 정치를 그만두려 하고 있었다. 그나마 나아질까? 지금보다 더 나아진 모습을 김수영과 노민영이라는 젊은 정치인들을 보여줄 수 있을까?

물론 로맨스물이다. 그것도 코미디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미디어에 알게모르게 영향을 받는다. 하물며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극에 달해 갈수록 정치가 대중과 유리되어가는 요즘일 것이다. 차라리 더럽더라도 치열한 현실을 보여주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다. 어떤 이상화된 판타지로서의 정치가 아닌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의 정치를 본다. 조금은 정치에 대해 희망을 가져볼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없을까? 하지만 몇 해 전 KBS의 미니시리즈 <프레지던트>는 그렇게 사실적으로 정치에 접근했다가 시청률에서 참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드라마는 판타지일 수밖에 없다. 로맨스란 자체가 판타지다. 꿈을 꾼다. 현실에 없는 꿈을 꾼다. 꿈을 꾸고 난 현실은 다시 지옥이다. 꿈을 증오하거나 현실을 혐오하게 된다. 정치에 대해 차라리 가볍게 스치고 지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다. 정치는 이상이 아니다. 결국은 사람은 현실에 살아간다.

아직 이렇다 할 만한 관계가 진전되고 있지 않다 보니 배경이 되는 정치라는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많았다. 냉소와 혐오를 배경에 깔고 이상화된 판타지로써 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드라마들을. 영화나 소설도 많았다. 그 끝은 항상 현실에 없는 구세주 - 선지자이거나 순교자였다. 이번에는 그나마 코미디이기를 기대한다. 사랑만 해도 충분히 넘친다.

이민정은 확실히 이런 밝은 분위기의 로맨틱 코미디에 어울린다. 그녀는 이미지 자체가 밝다. 가녀리고 선량한 이미지의 신하균을 기억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어느새 나이를 먹고 오만과 독선이 어울리게 된 그의 모습이 낯설기도 하다. 드라마를 이끌고갈 주연 두 사람의 존재감과 무게감은 이만하면 넘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기우는 여기까지. 기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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