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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4.03 08:39

직장의 신 "식구처럼이랬지 누가 진짜 식구랬나?"

미스김의 선택, 나는 오직 두 가지 수당과 점심시간만을 위해 일한다!

▲ 사진제공=KBS미디어, MI Inc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식구처럼 지내쟀지 누가 진짜 우리집 식구랬나?"

당연한 것이다. 가족은 헤어져도 가족이다. 아주 오랜 시간을 헤어져 있어도, 설사 서로 지구의 반대편에 있더라도, 아예 연락조차 한 번 주고받지 못한 사이라도 가족이라면 이미 그 순간에도 서로 가족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느날 여러해를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친한 동료가 어떤 이유에서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그때도 그 동료는 여전히 동료로 남아있는가?

실제 사례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느 기업에서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다수의 직원들을 해고하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노조는 그에 반발하여 해고를 철회할 것을 주장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그러자 사용자의 편에서 그러한 해고노동자들과 맞서싸운 것이 누구였겠는가? 어차피 회사에 의해 해고되었다면 그들은 더 이상 회사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동료가 아니다. 동료란 자신들과 같이 회사에 남아 회사와 운명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단지 예전에 같은 직장해서 일했던 동료라고 하는 희미한 유대 정도는 남아있을 것이다.

가족과 회사가 다른 이유다. 학교와도 회사는 다르다. 오히려 군대 쪽이 회사와 닮아 있다. 가족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모인 집단이 아니다. 학교는 학생을 가르친다고 하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학생을 동원하지는 않는다. 물론 교사의 입장이라면 또 다를 것이다. 교사에게 학교란 자신의 직장일 테니까. 반면 군대는 적과 싸우기 위해 존재하며 그를 위해 구성원을 동원한다. 그를 위해 병사를 징집하고 훈련시키며 집단을 유지한다. 기업이 존재하는 목적이란 무엇일까? 이익이다. 그런 점에서 기업은 군대보다 더 첨예하고 치열하다. 최소한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군대는 병사 개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기업은 이익을 얻기 위해 존재한다. 주주는 그 이익을 기대하고 기업에 투자를 한다. 직원들은 그 이익으로부터 급여를 받고자 기업의 구성원이 되서 일을 한다. 그것이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기업에 소속되어 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은 기업 안에 보다 강제적인 위계를 만들어낸다. 보다 효율적으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구조가 조직이 되고 조직은 곧 강제력을 사용해 구성원들을 관리한다. 이때 쓰이는 수단이 바로 개인이 기업에 소속되고자 하는 이유 - 이익이다. 채용과 해고, 승진, 궁극적으로 급여와 처우에 대한 모든 권리를 기업이 갖는다. 그같은 일방적인 구조 속에 개인이란 기업 안에서 철저히 을의 위치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노동자의 권리가 강화되고 보장되더라도 그같은 기본은 바뀌지 않는다.

기업이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 채용도 하고 해고도 한다. 가장 이익이 되는 구성원에게 권한을 위임하며 그에게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도록 대우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같은 효율을 위한 불평등은 위계로써 개인을 억압한다. 어쩔 수 없다. 말했듯 기업은 이익을 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가장 최적의 구조로써 기업을 관리하고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에 맞춰 노동자 역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 최선을 다하게 된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기업이 이익을 낼 수 있어야 하는 것도 그래야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프로페셔널이 아닌 계약직을 자처하는 이유일 것이다. 프리랜서가 아닌 단지 기간제로 일하는 비정규직인 이유인 것이다. 그같은 기업이라고 하는 위계 안에서 기업에 정식으로 소속되지 못한 비정규직은 특히 그 가운데서도 된장도 되지 못하는 '똥'에 불과하다. 아무때고 부담없이 해고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어떤 부담도 지지 않는다. 그런 만큼 그들에게는 어떤 의무도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다. 당연히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닌 굳이 없어도 되는 정도의 일만을 맡기고 시킨다. 평등사회라지만 기업이라는 구조 안에서 그들은 명백한 신분의 차이를 갖는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가운데서도 열등한 비정규 계약직에 속해 있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그는 계약직이다. 아무리 남다른 탁월한 역량을 가지고 있어도 그는 단지 정규직이 되지 못한 비정규직에 불과하다. 그렇게 여긴다. 그렇게 대하게 된다. 그런데 누구보다 뛰어나다. 역설이 만들어진다. 장규직(오지호 분)의 특권적이고 우월적인 태도가 어쩌면 그보다 더 나은 실력을 지닌 미스 김(김혜수 분)과 충돌하게 된다. 묻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장규직으로 하여금 미스 김을 낮춰보고 모멸적이기까지 한 태도를 취하도록 만드는가. 어째서 장규직은 미스 김에 대해 그녀의 뛰어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경쟁심을 불태우도록 만드는가. 비정규직인 미스 김이 자신보다 더 뛰어날 리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능력이 있으니 정규직이고 능력이 부족하니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이란 단지 정규직이 되지 못한 낙오자이고 도태자일 뿐이다.

자기를 위해 일하라 말한다. 자기의 급여와 점심시간을 위해. 자기가 일한 만큼의 돈을 받고 일하는 시간 이외의 자신의 시간을 지킨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정주리(정유미 분) 역시 그같은 냉혹한 현실에 대해 비로소 눈뜨게 된다. 자신마저도 도구이고 수단이다. 기업에 있어 직원이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며, 직원 자신은 그러한 기업이라는 구조 속에서 자신을 수단으로 삼아 이익을 추구한다. 동료란 그를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서의 타인일 것이다. 하물며 비정규직인 정주리는 동료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한 번의 실수만으로 해고될 위기에 놓인다. 그런데 과연 누구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녀는 아직 어리다.

드라마의 제목이 <직장의 신>인 이유일 것이다. 원작의 제목은 <파견의 품격>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정주리와 미스 김이 속해 있는 용역업체의 상호가 '파견의 품격'이다. 비정규직이란 그같은 기업의 구조가 가장 극단적으로 가장 노골화되어 드러난 형태일 것이다. 그같은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 속에 자신을 맞추고 지켜간다. 자신은 똥이다. 자괴감인 동시에 미스 김 자신의 자존심이다. 굳이 인정을 가장한 기업의 냉혹한 계산 앞에 자신을 수단으로 내주지는 않겠다. 독립선언이다. 고작 비정규직이지만 그들도 얼마든지 프로가 될 수 있고 전문화될 수 있다. 자신이 하나의 단위다.

장르가 코미디이니 우습기는 한데 도저히 웃을 수만은 없다. 과장된 설정과 행동들이 웃음을 자아내기는 하는데 도저히 웃고 있을 수만은 없다. 역시 한국드라마만의 장점일 것이다. 일본의 원작이 철저히 주인공 오오마에 하루코의 캐릭터에 입중하고 있다면, 한국의 리메이크는 주인공 미스 김이 속한 비정규직이라는 현실에 천착한다. 인정에 이끌린다는 단점을 제외하더라도 비참할 정도로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주리의 모습이야 말로 이 드라마가 갖는 가장 큰 가치이며 미덕일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긴다. 극복할 수 없다면 받아들인다. 바꿀 수 없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들 살아간다.

미스 김을 부러워한다. 그녀를 동경한다. 그러면서도 절망한다. 그녀를 질투한다. 차라리 정주리를 동정한다. 그러면서도 장규직의 오만함을 이해한다. 그의 말이 옳다. 정규직 사원증이야 말로 직업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있어 모든 것일 터다. 그것만이 자신의 지금을, 그리고 미래를 결정해준다. 가을비처럼 스산하게 젖어든다. 어쩌면 사람들은 늦가을에 사는지 모르겠다.

착각한다. 오해하고 환상을 갖는다. 그것을 믿고 자신을 내던진다. 아직 어리다. 어른이 되어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정주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오로지 그녀 자신의 몫일 것이다. 비로소 그녀는 그같은 자신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이 또한 드라마가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일 것이다. 미스 김은 스스로 선택했다. 장규직도 자신만의 결론을 내렸다. 정주리도 어른이 되어 간다. 어른이란 참 슬픈 존재일 것이다. 장규직이 건넨 스카프가 쓰레기통에 쳐박힌다. 우울하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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