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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3.26 09:03

설경구 논란, 인터넷이 권력화된 대중의 정의를 보다

정의 과잉시대의 맹목과 무지가 논란을 만들다

▲ 사진출처='힐링캠프' 방송캡처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요며칠 배우 설경구의 SBS 예능프로그램 <힐링캠프> 출연 여부를 두고 인터넷이 온통 뜨거웠다. 설경구 자신의 개인사와 관련해 미리 <힐링캠프>에 출연해서 하게 될 이야기들을 예단하여 그를 판단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과연 설경구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으며, 그가 하는 이야기들에 얼마나 진실이 담겨 있겠는가. 그러니 싫다.

하지만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이고, 현행범으로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어 변명의 여지란 없어 보이는 경우라 할지라도 재판정에서 판사가 판결을 내릴 때는 피고인인 당사자의 주장 또한 충분히 수렴하여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모든 증거와 증언이 피고가 범인이라 가리키고 있다 하더라도 피고 입장에서 듣고 판단하지 않는다면 자칫 억울한 경우를 만들 수 있다. 최소한 설사 범죄를 저지른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정상참작의 여지는 없는가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하물며 판결의 권한따위 주어진 적 없는 대중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하기는 그래서 대중일 것이다. 아무나 판사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되고 싶다고 사법부에 속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다고 재판정에서 죄를 판결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심판이 아니다. 판결이다. 주어진 법조문에 따라 제시된 증거와 증인들을 취합하여 최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물론 판사도 인간이기에 개인의 주관이 판결에서 아주 배제될 수는 없다. 그러나 판사가 되기 위한 많은 노력들과 거쳐야 했던 훈련들이 그 근사치에 이를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대중은 그런 것이 없다.

어딜가나 얼치기들이 문제인 것이다. 자동차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 엔진이 고장났다니까 고쳐보겠다 나선다. 기판이 뭔지 회로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전자제품이 고장났다니 일단 본체부터 뜯고 본다. 교통사고가 났으면 알지도 못하면서 무모하게 나서기보다 차라리 119에 신고하고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구급대원들이 사고자를 구조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 괜히 사람을 구해보겠다 끌어당기고 들어 옮기고 하는 사이 자칫 상태가 더 위독해질 수 있다. 법적인 판단은 물론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판단을 내릴 아무런 교육도 훈련도 받지 못한 아마추어들의 판결이란 그래서 위험하다.

무지와 정의가 만나면 맹목이 된다. 맹목이란 외곬이다. 그리고 여기에 권위가 더해지면 독선이 된다. 다수는 권력이 된다. 텍스트로 이루어지는 인터넷의 세계란 개개인의 인격이나 역량보다는 수로 계량되어지는 세계다. 각각의 개성보다는 수라고 하는 폭력적일 정도로 획일화된 기준에 의해 지배되어지는 세계다. 모두가 그렇다고 하니 옳은 것이 된다. 이를테면 시험이 끝나고 답을 맞춰보는데 10명 가운데 9명이 '1+1=3'이라 쓰고 있었다. 모두의 합의 아래 '1+1=2'라 쓴 사람이 틀린 것이 된다. 물론 더 과거에는 한 개인이 내린 답이 나머지 9명의 답을 결정하기도 했었다. 권력이다.

권력이란 무오류다. 틀리는 법이 없다. 정의 역시 무오류다. 틀려서는 정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일단 결론이 내려졌으면 그것은 다시 번복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권력이 갖는 권위를 해치고, 정의를 훼손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독단이라 부르고 독선이라 부른다. 권력이 그리 하는 것을 달리 독재라 말한다. 무지와 정의가 만났다. 그것이 권력을 등에 업었다. 일단 판단을 내렸다. 틀릴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른바 '타진요'일 것이다. 사법부에 의해 법적인 판단이 내려진 뒤임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틀렸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타블로의 학력에 대해서는 인정하더라도 다른 이유를 찾아 타블로를 공격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한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한창 타진요로 인해 인터넷이 뜨거웠던 당시에도 타블로의 학력을 뒷받침해주는 많은 관련자들의 증언이 있었음에도 그런 증언이나 증거들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자신들은 옳다. 그를 부정하는 어떤 증언이나 증거도 무의미하며 단지 타블로를 옹호하기 위한 삿되고 거짓된 부정한 의도의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흔히 쓰이곤 하는 것이 '실드'라는 단어일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은 명명백백하다. 한 점 오류도 없이 명확하게 결론내려졌다. 그를 거스르는 것은 단지 당사자를 옹호하기 위한 거짓이며 기만일 뿐. 하물며 자기 자신이 자기를 변호하고자 하는 말은 감히 들어줄 수조차 없는 것이다. 반론은 없다. 자신을 위한 혹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변호나 증언도 있을 수 없다. 역시 과거 권력자들이 흔히 하던 짓거리 가운데 하나다. 관심법을 사용한 것이 비단 궁예만은 아니며, 이미 죄인이라 결론내려졌다면 그를 변호하는 행위 역시 죄인과 같은 것이다. 그 자체가 혐오스럽고 역겹기 이를데없는 또다른 죄가 되고 만다.

고작 배우 설경구가 <힐링캠프>에 출연하는 것을 두고 이토록 인터넷이 뜨거워질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사실 설경구의 개인사에 어떤 세세한 사정들이 있었는가 아는 사람은 그 가운데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몰라도 상관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더더욱 당사자인 설경구의 입을 통해서는 듣고 싶지 않다. 그를 보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론은 내려졌고 판결까지 내려졌다. 영원한 비호감형. 대중들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

정의과잉의 시대일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란 정의밖에 없다. 정의보다 쉬운 것은 없다. 정의롭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선을 추앙하고 악을 응징한다. 그것이 왜 선이고 어째서 악인가는 별 상관이 없다. 그것은 정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정의다. 그래서 악을 응징하는 것이 정의다. 고민도 갈등도 회의도 어떤 노력도 없다. 쉬운 정의가 단지 자신의 정의를 만족시킬 희생양을 찾아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설경구 역시 당사자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경구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을 것이다. 오해가 있을 수 있고 오류가 뒤따를 수 있다. 그래서 일단 듣고 취합해서 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노력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힐링캠프>는 그를 위한 기회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태도일 것이다. 논란의 이유다. 지나치게 정의로운 네티즌과 대한민국 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사실 논란부터가 매우 성급한 것이었다. 최소한 아직까지 부담 때문인지 그와 관련한 내용은 방송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가 굳이 그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려는 이유일 것이다. 섣부른 언급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잘못된 결론을 유도할 수 있다.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는 굳이 판단하지 않는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정의롭지 못하다. 다행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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