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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사회
  • 입력 2013.03.20 10:41

자기계발서와 인문학 '김미경 강사의 발언과 변명을 들으며'

인문학이 자기계발서의 하위에 놓여야 하는 슬픈 현실을 깨닫다

▲ 사진출처=tvN '김미경쇼' 방송캡처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亦有仁義而已矣"

기껏 뜻을 펼쳐보겠다고 천하를 떠도는 자신을 예우하여 맞아주고 있던 위나라 혜왕 앞에서 맹자가 일갈한 말이다.

"과연 선생께서 천 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셨으니 아무래도 우리나라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생각이 있지 않겠습니까?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왕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맹자는 단호하게 왕의 말을 자르고 이리 대답한다.

"어찌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마 이번에 논란이 되고 있는 자기계발서와 인문학과의 관계를 간명하게 정리해주는 한 마디가 아닐까 한다. 자기계발서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 그 방법을 설명한 책이다. 어떤 삶이 성공한 삶이고, 그를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어떤 삶의 방식이 궁극적으로 자기에게 이익으로 돌아오는가? 맹자라면 이에 대해서도 한 마디 했을 것이다.

"어찌 성공만을 이야기하는가. 오로지 인의만이 있을 뿐이다."

플라톤이 고민하고, 공자와 맹자가 고민하고, 칸트와 헤겔과 맑스가 간절히 그 답을 구하고자 했던 공통된 질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이며 과연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인간이 사는 세상이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물론 관리가 되기 위해 공자와 맹자를 읽어야 했고 맑스의 <자본론>이 처음 미국에 출판될 때도 돈을 버는 방법이 쓰여진 책으로 선전되고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외워 과거에 급제하고 높은 관직에 올라 권력을 누리는 것이 공자와 맹자가 의도했던 것이었을까?

맹자와 비슷한 시기에 종횡가라 불리우던 소진과 장의로 대표되는 세객들이 존재했다. 그들의 방안은 현실적이었다. 연, 제, 초, 위, 조, 한의 6나라가 종으로 연합하여 진의 팽창을 저지해야 한다. 진이 강성하니 이들 6나라들은 진을 중심으로 그를 섬김함으로써 평화와 안정을 꾀한다. 확실히 소진의 주장에 따라 6나라가 연합했을 때는 진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었고, 장의의 계획대로 진을 중심으로 6나라가 연결되었을 때는 진의 천하통일이 앞당겨질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지금에 그들의 주장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물론 역사는 그들의 주장에서 현실의 국제환경에서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에 대한 단서를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소진과 장의가 주장하던 바는 아니었다.

그 차이다. 소진과 장의의 제안은 당시로서는 매우 유용했고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면 그들의 주장은 힘을 잃게 된다. 과연 성공이란 무엇인가? 돈을 많이 버는 것? 높은 지위에 이르는 것?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것이 있을 것이다. 차라리 자기계발서를 취합하여 그 가운데 일관되고 보편적인 어떤 객관적 논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에서 자기계발서가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계발서 자체가 인문학이 추구하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일관된 어떤 논리의 근거로서 연구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한 나라를 책임지는 입장이라면 맹자만이 아닌 소진과 장의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지금에 있어 성공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 어떤 삶을 성공한 삶이라 부르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성공한 삶을 손에 넣고 하는가? 다른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면 한 번 쯤 관심을 가져 볼 법하다. 오히려 자기가 사는 세상을 보다 폭넓게 깊이 이해하는 단서가 되어 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목적을 추구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나 그것을 절대시하기에는 결국 그런 자기계발서라는 자체가 특정한 개인을 모델로 한 특별한 경험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을 자기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역시 보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가치와 논리가 필요하다.

가치가 없지는 않다. 읽으면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을 읽는 자신이라는 것이다. 책을 쓴 사람도, 그 책에 소개된 여러 경우들도, 결국 자신의 경우와는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계발서를 읽는 사람이 수천수만에 이르고, 그 가운데 그 내용을 쫓으려는 이들이 또한 적지 않다면 자신 또한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연 그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해서 자신은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 결국은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기만의 방식으로 성공한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성공이란 가치가 없지 않다. 다만 어떤 성공인가가 문제이기는 하다. 돈을 벌고 싶은가? 높은 지위를 손에 넣고 싶은가? 명성을 누리고 싶은가? 아니면 단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인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라고는 없이 누더기를 걸치고 노숙을 하면서도 그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돈벌이가 안되는데도 그저 무언가 만드는 것이 좋아 창작하는 일에 전념할 수도 있다.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서 일부러 더 수입이 적은 일자리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그것은 다른 누군가가 결정해주지 않는다. 아무리 자기계발서를 읽어도 결국 그것은 자기계발서를 쓴 저자 자신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 고민을 대신해주는 것이 - 아니 스스로 그같은 고민을 하게 되는 그 자체가 인문학의 역할이다.

말하자면 자기계발서란 살아가는 기술이라면 인문학이란 살아가는 목적이다. 자기계발서란 성공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삶의 기술을 다루고 있다면, 인문학이란 인간과 삶 자체를 목적으로 탐구한다. 하지만 성공이 절대적인 가치가 되는 사회라면 자기계발서야 말로 인문학이 도달해야 할 궁극일 것이다. 인문학을 배우는 것은 보다 잘사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다. <자본론>을 읽고 돈 버는 방법을 배우고, 공맹을 배워 벼슬을 얻고, 칸트와 헤겔을 앞세워 자신의 권위로 삼으려는 것처럼. 무위자연을 갈파한 노자도 응용하기에 따라서는 훌륭한 처세술이 되어준다. 자신을 낮추고 주위에 맞춰간다. 조금만 비굴해지면 세상이 편해진다.

오히려 김미경 강사의 해명에 더 불편해지고 마는 이유였다. 성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누구나 성공한 삶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성공한 삶이란 무엇일까?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누구나 성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이 자기계발서다. 인문학이란 그를 위해 존재한다. 인문학의 결과가 바로 자기계발서다. 한국사회의 어느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필자는 아직 무엇이 성공한 삶인가 답을 내리지 못한다. 단지 집에서 고양이들이 다가와 야옹하고 울 때면 그냥 하던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녀석들과만 어울린다.

자기계발서를 일부러 배제하는 태도는 분명 옳지 못하다. 그것을 지적한 것은 옳다. 하지만 해명이 오히려 그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 것 같다. 자기계발서란 무엇이고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의 위치란 어찌되는가? 살아가는 데 있어 실제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될 때 그것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자기계발서가 애써 폄훼당하는 이유도 결국은 그것이 삶에 이익이 되는가의 문제와 닿아 있을 것이다. 여러 다른 삶의 방식을 접하는 통로로서 인문학적으로 이해한다면 굳이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다.

상당히 흥미로운 현상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논란을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의 한 마디가 무척 와닿고 있었다. 언제부터 한국사회가 인문학에 이처럼 관심이 많았는가? 단지 김미경이라는 스타강사를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역시 인문학이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도 김미경 강사의 인문학에 대한 이해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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