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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3.01 09:25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것, 오수 울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용서가 아닌 위로야.

▲ 사진제공=바람이분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사람이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용서가 아니라 위로야."

순간 보고 있던 필자마저 울컥하고 말았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용서와 위로는 다른가? 오영(송혜교 분)의 저 말에 바로 답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용서가 아닌 위로다. 다시 말해 사람은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용서란 서로 대등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쪽이 보다 우위에 있을 때 그 우위를 바탕으로 베풀 수 있는 것이 바로 용서인 것이다. 나의 지위와 권력과 영향력으로 너의 죄를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다.

하지만 위로는 다르다. 위로받는다고 이미 지은 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해서 자기만을 바라보고 가족과 다니던 학교마저 뒤로 하고 따라온 여자를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버리려 했다. 그리고 여자는 자기를 버리고 떠나려는 남자를 뒤쫓다 그만 사고를 당해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아무리 오영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해해주고 위로해준다고 하더라도 과연 오수(조인성 분)의 안에서 그의 죄는 사라지는가. 그럼에도 다만 한 사람이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 든든한 힘이 되어준다. 죄를 마주하고, 죄를 끌어안고, 죄를 짊어지고, 죄와 함께 그럼에도 현실을 살아간다.

사실 용서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너를 용서한다."

하지만 죄를 지은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죄를 지은 것이다. 죄를 지은 것은 나인데 누가 나를 용서하는가? 누가 나에게 죄가 없다 말하는가? 그래서 도망치려 하고 합리화하려 한다. 자기가 자신을 속인다.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못하며, 자신의 죄도 자기 자신마저도 긍정하지 못한다. 단지 자기가 죄를 짓지 않았다며 자신에 대해 속이려 할 뿐 그렇게 거짓과 기만 속에 자기를 가두려 할 뿐이다.

아마 왕혜지(배종옥 분)의 지금이 그런 상태일 것이다. 그녀도 안다. 자기가 오영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를. 그럼에도 속여왔다. 오영을 위해서였다. 자기는 오영의 엄마이고 따라서 오영을 위해 자신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안다.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거짓이고 기만인가를. 그러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 자신마저 자신에 대해 용서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오영의 인생을 망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런데 만일 그런 왕혜지에게 누군가 당신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그녀를 긍정하고 인정해주는 말을 해준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마음이란 어떠할까?

그래서 도망쳤던 것이었다. 오수 역시 황폐하도록 방탕한 삶 속에 자신을 내던지며 어차피 자기는 쓰레기라고 그렇게 합리화하고 만족하려 했던 것이었다. 어차피 자기는 쓰레기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치가 없는 존재니까. 그러니 그런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자기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가 죽을 수 없었던 이유 - 그가 그렇게까지 살아야만 했던 이유였다.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와 그녀를 사랑했던 자신의 진심을 아무렇게나 시궁창속에 버려둔채 혼자서만 도망칠 수는 없었다. 살아야 한다. 그 한 마디를 듣기 위해서,

"네 탓이 아니야."
"너로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러니 괜찮아."

죄를 지은 것은 자신이다. 그 죄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고 싶다. 그럼에도 살아가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다. 자신의 죄까지 포함해서. 그렇게 사람은 살아간다.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받으면서. 어쩌면 이 또한 합리화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인 것이다.

바로 오영이 오수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오영이 그토록 어려서 헤어진 오빠 오수를 그리며 기다려 온 이유이기도 했다. 오영도 듣고 싶었다. 괜찮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을. 어떤 순간에도 오빠는 자기의 편이라고. 오로지 자기의 말만을 듣고 믿어줄 것만을. 아니 무엇보다 펑펑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마음놓고 소리내어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고 싶었다. 그때도 오빠는 괜찮다며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 줄 것이다. 괜찮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다. 오영은 말한다. 무서웠다고. 겁났다고. 아팠다고. 그래서 울고 싶었다고. 그러나 사람들은 다시 말한다. 괜찮다고. 무섭지도 아프지도 않을 것이라고. 울 필요 없다고. 강하지 못해서. 영리하지 못해서. 용감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해서. 몰랐고 알지 못했고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정해준 이상적인 삶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다. 책임을 묻거나 애써 책임을 묻지 않는다. 어느새 자신은 죄인이 되어 버린다. 오수가 처음 문희주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두려움에 그녀를 거부하고 만 이유였다. 과연 지금의 자기에게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는가. 그런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 사람따위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지만 세상 속에서 그는 그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현실에서도 흔히 그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는 한다. 어째서? 왜? 하필? 탓을 돌리지 않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결국 자신이 정한 이상적인 이미지를 상대에게 덧씌우며 강요한다. 어째서 더 현명하게 처신하지 못했는가? 어째서 더 의연하게 용기있게 대처하지 못했는가? 알았어야 했다. 미리 대비했어야 했다. 위해서 해주는 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도 현명하지도 용기있지도 못하다. 선량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하다. 이기와 욕망과 충동에 때로 자신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그래서 죄인이 되어 버린다. 죄인인 자신을 항상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것을 견디지 못해 자포자기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세상이 이토록 고통으로 가득한 이유일 것이다.

괜찮아. 울어도 돼. 화내도 돼. 조금 더 욕심을 부리고, 조금 더 이기적이 되고, 조금은 덜 선량해도 좋고, 조금은 덜 정의로워도 상관없고, 그럼에도 그것이 바로 자신이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니까. 용서와 같은 무모한 만용은 부리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자신이 짊어지고 갈 몫일 것이다. 신이 아닌 이상 어떤 인간도 인간을 용서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자신마저도 인정하고 살아갈 자격이 있음을 받아들여준다. 자기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래서 사람들이 아프다. 사람들이 혼란스럽다. 조무철(김태우 분)이 그토록 오수에게 집착하는 이유일 것이다. 단지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오수로 인해 죽었다고 하는 원망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까지 이타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미 죽은 여자를 위해 언제까지고 다른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진정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터다. 문희주가 오수에게 버림받고 끝내 사고로 죽어가던 순간 조무철도 함께 있었다. 그녀를 구하지 못했고 그녀가 죽어가도록 방치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기에 조무철은 그 모든 책임을 오수에게 돌리려 한다. 오수를 끝까지 증오하고 그를 응징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대신하고자 한다. 오영의 엄마이기를 자처하면서도 오히려 오영을 구속하고 궁지로 내몰고 있는 왕혜지의 모순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가장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그것을 인정할수도 받아들일수도 없기에 그들은 비틀리고 만다.

그에 반해 돌아갈 가족이 있는 박진성(김범 분)은 얼마나 올곧은가. 그러면서 또한 문희선(정은지 분)은 친언니가 그렇게 죽었음에도 오수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 자기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오영의 존재로 인해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고 말았을 때 그녀는 그렇게 오열하고 말았다. 솔직하게 질투하고, 당당하게 미워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눈물의 힘일 것이다. 아직 오영은 그렇게까지는 울어 보지 못한 것 같다.

오영으로부터 그렇게 위로받으리라고는 오수 자신도 미처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오영이 자기가 받고 싶은 위로를 오수에게 베풀었듯 오수 역시 자기가 받고 싶었던 배려를 오영에게 베푼다. 하기는 오수가 오영에게 들려준 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더 이기적이 되라. 더 제멋대로여도 좋다. 술도 마시고, 친구들과 놀러도 가고, 외박도 하고, 그렇게 즐기라. 그것은 죄가 아니다. 왕혜지가 보기에는 타락인 그것들이 오영에게는 구원이 되어준다.

그 한 마디를 해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었기에. 탓을 하고 원망의 말을 하면서도 끝내 오수를 아들이라 부르며 그에 대한 기대를 놓지 못하던 박진성의 부모들이 있었다. 그것이 가족이다. 그것이 바로 오롯한 자기의 편이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믿고 싶고 믿어야 하는 오빠의 존재. 그를 위해 그토록 시험도 했었다.

위기가 찾아온다. 또다른 일그러진 자아를 가진 진소라(서효림 분)의 오수에 대한 집착이 다시 오수를 궁지로 내몰려 한다. 그것은 오영에게도 위기다. 겨우 믿고 의지할 수 있게 된 오빠 오수가 사실은 가짜였고 거짓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또다시 하나의 세계가 무너진다. 이제까지의 자신을 지키려는 왕혜지의 고집과 이명호(김영훈 분)의 이기가 다시 그들을 내몰려 한다. 그래도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지킬 수 있을까.

다른 이야기지만 현재 함께 방송중인 같은 방송사의 다른 드라마 <야왕>에서도 누군가 주다해를 그런 식으로 위로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하류의 딸만 죽은 것이 아니었다. 주다해의 딸도 죽었다. 그러나 모두는 단지 주다해에게 그 죽음의 책임을 묻기에 급급해 있었다. 주다해의 상처와 그녀가 갖는 열등감, 그리고 그로 인한 뒤틀린 욕망에 대해 하류가 진지하게 이해하고 알아가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류는 단지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행복에 주다해를 일방적으로 끼워맞추려 했을 뿐이었다. 하류의 이상에 맞춰줄 수 없는 주다해는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녀를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가운데 유일하게 그녀의 곁을 지켜준 것이 백도훈이었다. 오수는 오히려 자기가 사기를 치려한 상대인 오영의 앞에서 진심어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하고 있었다. 물론 누구에게나 그런 구원과도 같은 누군가가 한 번 쯤은, 한 명 쯤은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간다. 바로 그 누군가에 의해. 그 손의 따뜻한 온기가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 어쩌면 그 순간에서야 비로소 오수는 살아야 할 이유도, 죽어도 되는 이유 역시도 찾은 것이 아니었을까.

누군가를 미워하기는 쉽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도 어쩌면 무척 쉬운 일일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하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로는 내가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구보다 진심이어야 하고 진실되어야 한다. 위로 아닌 위로와 비로소 듣게 되는 위로의 말들이 시리게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살아가야 하는 이유, 죽어도 좋은 이유, 산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야 말로 살아간다는 자각이다. 누구나 죄를 짓는다. 죄를 부정할 수는 없다. 어떤 용서도 죄를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사람은 죄와 함께 살아간다. 살아가도 좋다. 의미가 간절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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