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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이슈뉴스
  • 입력 2013.02.20 09:24

야왕 "하류의 복수의 의도, 주다해는 더 고통받아야 해!"

보편의 선과 정의에 기대지 않는 본능과 감정의 배설이 주는 위화감

▲ 사진제공=베르디미디어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그리고 그렇게 되면 고통의 시간이 너무 짧아. 주다해는 서서히 피가 마르는 고통을 느끼게 해야 돼!"

문득 작년 2012년 장안에 화제를 불러모았던 드라마 <추적자>를 떠올리고 말았다. 분명 <추적자>에서도 주인공 백홍석은 자신의 딸을 죽이고 아내마저 자살하게 만든 원흉인 강동윤에게 복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진실을 밝히려. 진실을 밝히고 손이 닿지 않는 저 높은 곳에 있는 강동윤을 응징하려. 그러나 차이는 있었다. 백홍석의 곁에는 보편의 가치와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검사 최정우가 있었다.

단지 개인의 복수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원수인 강동윤에게 고통을 주어 개인적인 분풀이를 하려고만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처절했다. 진실은 강동윤이 가진 권력에 가려져 있었고, 그 권력을 들어내기에는 백홍석이나 검사인 최정우나 무력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믿었다. 최정우가 말한 법과 이 사회의 정의의 힘을. 당당하게 강동윤을 법정에 세워 법에 의한 심판을 받도록 하고자 했었다. 개인의 복수가 아닌 강동윤이 저지른 죄와 악에 대한 보편의 상식과 규범에 의한 응징을 내리고자 했던 것이다. 개인의 복수가 아닌 보편의 선과 정의의 승리다. 그래서 더 절박했고 그 승리는 더 통쾌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듯한 막막함에 더 간절해하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드라마 <야왕>은 아니었다. 이미 하류(권상우 분)에게는 주다해(수애 분)를 파멸시킬 수 있는 모든 수단이 주어져 있었다. 당장 하류는 10년전 있었던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었다. 당시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주다해의 의붓아버지이면서 그녀와 공범관계에 있는 의붓오빠 주양헌(이재윤 분)의 친아버지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주다해와 주양헌 사이를 분열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일 수 있다. 주다해와 주양헌을 갈라놓는다면 다시 주양헌을 통해 주다해가 저지른 죄에 대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기는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하류의 쌍동이형 차재웅을 죽인 것은 의도한 살인이라기보다는 실수에 의한 사고였다고 하는 사실이 밝혀지고 말 것이다. 그것도 주다해가 처음부터 죽이려 사주한 것이 아니라 주양헌이 청부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하류가 주다해에게 복수하려 한다면 주다해에게 원한을 가지게 된 주양헌을 부추겨 모든 것을 주다해의 사주로 몰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는 이번에는 다시 너무 나가게 되는 것이다. 복수를 하는 것은 좋은데 그 수단이 또다른 악이 된다. 처음부터 차재웅의 죽음을 주다해의 악의에 의한 것이 아니게 설정한 데 따른 모순일 것이다.

백도훈(유노윤호 분)과 결혼하여 백학이라고 하는 대기업의 오너일가에 속하고자 하는 주다해의 야심을 무너뜨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백도훈과의 결혼식날 양택배(권현상 분)를 시켜 주다해의 신부대기실에 가져다 놓은 노트북의 사진들 또한 백도훈과의 결혼을 결정적으로 좌절시킬 수 있는 훌륭한 무기였을 것이다. 그 사진들로 인해 바라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주다해는 그대로 혼절해 쓰러지고 만다. 아무리 주다해가 유명인이고 백도훈의 사랑과 백학의 백창학(이덕화 분)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사실혼관계에서 딸까지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의 입지란 결코 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언론에라도 알려진다면 주다해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하고 만다. 다시 일어날 수도 없고, 심지어 주다해의 죄를 밝히려 한다면 무력하게 발가벗겨질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잃은 주다해란 더 이상 두려운 상대가 아닐 것이므로.

하지만 하류는 이 가운데 어느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주다해를 파멸시킬 수 있는 수단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공개해 주다해의 가식과 기만을 밝히고 그녀의 죄와 악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방치함으로써 그녀에게 더 긴 고통을 주고자 한다. 그녀를 심판대에 세우려 하기보다 오로지 그녀가 고통받는 모습을 봄으로써 자신의 일그러진 복수심만을 충족하려 한다. 설사 자신이 그런 방법들을 동원하여 주다해 그녀를 심판하려 하더라고 그녀는 빠져나가고 말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을 그 근거로 삼을 뿐이다. 백도경(김성령 분)의 주다해에 대한 증오를 부추길 때도 그는 막연한 추측에 기대어 그 당위를 역설하고 있었다. 주다해란 원래 그런 존재이기에 이런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믿음이다. 믿음이란 바람에서 비롯된다. 그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주다해란 그런 여자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의 가치와 규범에 의해 심판받기보다는 단지 개인적으로 고통받으며 그 모습을 자신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만이 그녀를 심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과연 주다해가 고통받는 모습을 즐기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주다해가 저지른 죄와 악을 심판하고 싶은 것인가? 고작 주다해의 결혼식을 망치고자 계략을 꾸미고 그 결과에 만족하는 모습에서 차라리 치졸함마저 느끼게 된다. 그의 복수는 그렇게 개인적이고 말초적이고 본능적이다. 하류 자신의 입장이 되지 않는 이상 공감하기 힘들다.

차라리 주다해가 더 높은 곳에 있고 하류가 더 낮은 곳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기어올라가는 과정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무력한 상태에서 하나하나 힘을 얻고 진실의 단서를 밝혀내어 주다해를 궁지로 내몬다. 차재웅의 죽음에 대해서도 주양헌과 주다해의 사이를 분열시킨 다음 주양헌을 궁지로 내몰아 진실을 털어놓도록 하는 방법을 써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류가 차재웅이 되어 주다해의 앞에 나타나기까지 완벽하게 차재웅이 되기 위한 준비과정 또한 필요했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주다해는 더 높이 날아오르고 그의 편에 있어야 할 홍안심과 양택배마저 그녀의 수중에 들어간다. 그 쯤 되어야 더 절박하게 주다해를 상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너무 어설프다. 주다해의 악도, 그런 주다해의 죄를 응징하려는 하류의 의도 역시. 보편의 가치나 규범이 기대지 않는다. 보편의 선과 정의에 기대려 하지도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 뿐이다. 그런 감정 만큼이나 주다해의 죄 역시 어설프기만 할 뿐이다. 하류가 그렇게 절박하게 복수를 꿈꿔야 할 정도로 주다해는 높이 있지 못하다. 그녀가 쌓아올린 성 역시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허술한 것이다.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이 복수를 빙자한 하류의 주다해 괴롭히기다. 시청자 역시 하류의 입장에서 단지 복수를 빙자한 괴롭힘에 동참할 뿐이다. 복수가 아니다. 절망하고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한 여자의 모습을 보고 즐기는 악의만이 있을 뿐.

필자가 어떻게 해도 하류의 복수에 - 나아가 드라마 자체에 깊이 빠져들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필자는 하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류 자신일 수 없기 때문이다. 철저히 타자의 입장에서 하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지켜보고 판단한다. 하류와 필자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앞서 말한 보편의 상식이고 가치이고 규범일 것이다. 하류는 주다해를 그러한 보편의 심판대 위에 세우려 하지 않는다. 주다해의 죄를 심판하여 응징하려 할 뿐이지 주다해 자신의 고통을 즐기는 악취미따위는 필자에게는 없다. 아무리 악인이고 제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그에 따른 심판을 받아야지 그 자신에게 고통주는 것을 즐기는 것은 또다른 죄일 뿐이다.

결국 핑계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주다해가 저지른 죄와 악들이란 불운에서 비롯된 것들이 적지 않다. 하필. 어째서. 그 많은 우연들이 주다해에게만 그렇게 안좋은 방향으로 일어나고 마는가. 그리고 그런 우연들로 인해 하류는 그녀를 원망하고 증오하여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고자 한다. 모든 우연들은 그같은 주다해의 좌절과 절망이라고 하는 필연으로 수렴하게 된다. 보편적이지도 일반적이지도 않는 주관적인 개인의 감정에 의해 그렇게 된다.

모든 것을 결국 하나로 수렴하게 될 것이다. 주다해가 악하지 않다. 악녀라기에는 너무 어설프다. 어설픈 악과 죄가 그에 대한 하류의 복수마저 어설프게 만든다. 복수라기에는 차라리 괴롭힘이다. 주다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응징과 복수조차 그런 어설픔으로 인해 설득력을 잃게 된다. 주다해를 악이라 규정한 드라마의 전제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몰아가는 내용만 아니었다면 하류의 복수는 그 정당성마저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주다해가 더 커져야 한다. 주다해의 악과 죄가 하류의 좌절과 절망 만큼이나 더 커지지 않으면 안된다. 하류와 함께 주다해의 파멸을 안달하며 안타까워하도록.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하는 의문과,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불신,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은 더 큰 쾌감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기적이다. 지금처럼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춘 채 찔끔거리며 조금씩 고통을 주려는 것은 악취미 중에도 악취미라 할 것이다. 이미 모든 수단을 갖추고서도 단지 개인의 감정만을 위해 그것들을 감추려 하고 있다.

도무지 몰입을 못하고 있다. 겉돌며 웃음만 머금고 있다. 그렇게 드라마와 필자가 보는 것이 다르다. 어쩌면 작가와 필자가 추구하는 것이 다를 것이다. 보는 세상이 다르다. 복수란 단지 개인의 감정적인 배설이다. 복수란 보편의 선과 정의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추적자>는 과연 명작이었다. <야왕>은 어떠할 것인가. 확실한 것은 필자에게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아쉬운 부분들일 것이다.

기대가 컸었다. 주다해가 운명에 의해, 혹은 현실로 인해 필연적으로 죄에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주다해와 맞서게 될 하류와의 악연에 대해서도. 하지만 어설프다. 더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실망만 커진다. 재미는 있다. 시청률도 높게 나온다. 기대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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