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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2.16 11:55

위대한 탄생3 "평가가 사라진 오디션, 좌절도 환호도 저렴해지다."

비판없는 칭찬의 향연, 오디션의 재미가 사라지다.

▲ 사진제공=MBC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처음 마트에서 세일을 시작했을 때는 전혀 필요없는 물건들조차 어쩌면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일단 사들이고 했었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세일을 반복하게 되니 이제는 정상적인 가격으로 물건을 사는 것이 어쩐지 손해보는 것만 같다. 세일이 반갑고 고마운 것이 아니라 세일을 끝나고 정상가로 물건을 사는 것이 억울하고 화가 난다.

최고라고 말한다. 완벽한 무대라 극찬을 한다. 그런데 시들하다. 과연 그러한가? 물론 수많은 참가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TOP4가 마지막까지 남아 경연을 펼치는 것이다. 이쯤 되면 거의 프로의 무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 이상 비판이나 지적보다는 장차 프로로써 대중의 앞에 설 그들을 위해 음악적 자존감을 지켜주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워낙 그동안에도 칭찬 일색이었으니 이제 와서 다시 칭찬해봐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사실 오디션 프로그램에 있어 참가자의 무대가 끝나고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야 말로 참가자나 시청자 모두에게 있어 가장 긴장되는 때일 것이다. 과연 심사위원들은 지금의 무대를 어떻게 보았을까? 지금의 무대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아직 아마추어이기에 모든 것이 부족하고 아쉽기만 하다. 칭찬보다는 눈물이 찔끔 나오도록 혹독한 비판과 마주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마치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는 수험생과 같을 것이다. 두렵고 불안하기만 한 가운데 누군가 작은 칭찬이라도 들려주게 된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울 것인가? 심사위원의 입에서 '훌륭했다'는 한 마디 칭찬의 말이 들려온다면 그것은 진짜 무대가 훌륭했다는 뜻이 된다. 시청자 또한 참가자의 입장이 되어 그 한 마디에 환호하고 감격하게 된다. 쉽게 들을 수 없는 그 한 마디의 칭찬이야 말로 오디션에 참가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의 무대는, 그리고 지금의 참가자는 분명 충분히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

하기는 이번 <위대한 탄생3>에서는 심사위원 점수라는 것이 없다. 무대를 마치고 자신의 무대에 대한 냉정하고 엄격한 심사를 들을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한 것이다. 시청자들로부터 받는 문자투표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숫자로만 계량될 뿐 자신들의 무대에 대해 어떠한 평가도 들려주지 않는다. 점수로 계량되는 어쩌면 잔인하기까지 한 냉혹한 평가야 말로 그들의 무대에 대한 어떤 기준이고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그리고 자신의 무대는 지금 어느 수준에 와 있는가? <위대한 탄생3>가 끝나고서도 어떤 참가자는 여전히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살려 할 것이다.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없었다. 숫자로써 계량되어지는 점수도, 점수 만큼이나 날카롭고 냉정한 심사위원들의 전문적인 평가도. 점수가 사라졌을 때 심사위원들 자신도 무대를 평가할 기준을 잃게 된다. 10점 만점에 9점을 준다. 혹은 8점을 준다. 1점 만큼의,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1점을 빼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굳이 점수로써 계량하지 않으려 한다면 굳이 듣는 이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일부러 꺼낼 이유란 사라진다. 좋은 이야기만 남는다. 굳이 불안해하거나 긴잘할 필요 없이 칭찬을 들었어도 기쁨 역시 시들해진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TOP4에서 탈락한 이형은의 무대는 어떤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었기에 끝내 탈락하고 말았던 것이었을까? 오병길의 무대에는 과연 다른 문제가 없었는가? 원곡의 담담하도록 절제된 감정에 비해 오병길의 무대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감정을 과장하고 있었다. 그것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 가수로서 오병길이 갖는 장점이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절제할 때는 절제할 줄도 아는 것이 또한 프로가수일 것이다. 하기는 한동근이나 박수진의 무대에서는 필자 역시 이렇다 할 문제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가 무색하게 그들은 이미 프로나 다름없는 무대를 선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변별할 수 있는 차별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의 무대는 냉혹한 전문가의 잣대로도 결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

하다못해 시청자 문자투표에 모든 결과를 맡기려 했다면 실시간으로 참가자의 무대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좋았다', 혹은 '아쉬웠다',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참가자의 무대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는가를 숫자로서 다시 계량화하여 기준으로 삼도록 한다. 그것을 멘토들의 심사평과 함께 참가자와 무대에 대해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시청자 역시 참가자와 함께 긴장하며 본다. 참가자와 함께 좌절하고, 참가자와 함께 기뻐하며, 그 환호의 순간을 함께 나눈다. 그것이 재미 아니던가. 오디션을 보는 재미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없었다.

심심하다. 민숭민숭하다. 술이 몸에 안 좋다고 술냄새가 안 날 정도로 물에 타 마신다. 짠음식이 몸에 좋지 않다고 김치를 양념내가 가시도록 물에 담궈 씻어 먹는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다. 굳이 김치를 반찬으로 먹으려 하는 것은 그 자극적인 맛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만일 그것이 몸에 좋지 않다면 다른 방법으로 건강을 관리하면 될 것이다. 멘토와 멘토 사이의, 그리고 각 멘토의 멘티들 사이의, 그로 인한 과열된 시청자의 반응이 우려되었다면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건강하게 승화시키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오디션이 갖는 치열함조차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분명 <위대한 탄생1>은 과열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위대한 탄생2>에서도 논란은 있어왔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재미인 것이다. 그만큼 프로그램에 깊이 빠져 멘토와 참가자에 이입하여 함께 울고 웃고 좌절하고 환호한다. 그러나 <위대한 탄생3>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 마치 프로가수의 경연을 보는 듯 그저 무대만을 보고 즐길 뿐이다. 그들은 아마추어다. 그들을 프로이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오디션 프로그램의 출연자라는 정체성일 것이다. 그것이 이번에는 없었다. 그냥 지켜만 본다. 어느때보다 뛰어난 참가자들의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프로그램에 깊이 빠져들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오디션이어야 하는 이유를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 TV오락프로그램으로써 사람들이 오디션이라고 하는 형식에 기대하는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를 통해 참가자들은 대중에 자신을 알리고 프로로써 세상에 나가게 된다. 오락프로그램으로써 오디션 그 자체가 재미있을 때 참가자들은 비로소 대중들에 자신을 내보일 수 있게 된다. 아쉽다. 실망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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