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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2.15 09:33

그 겨울, 바람이 분다 "그들이 죽으려 하는 이유, 죽지 못하는 이유"

산다는 것의 잔인함과 처절한 이유를 보여주다.

▲ 사진제공=바람이분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스스로 죽고자 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더 간절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죽음이 단지 비겁한 도피에 불과하다면 극단의 절망과 좌절 속에 삶을 연명해야 하는 노숙자 가운데 자살자가 더 많아야 할 것이다.

치열하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에 지금에 만족하지 못하고 좌절 속에 한심한 자신을 더욱 혐오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그 채찍질에 상처입고, 다시 그 상처로 인해 더욱 자신을 다그치며 내몰게 된다. 그러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지금의 자신이나마 지키기 위해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다. 더 이상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며 실천인 셈이다.

차라리 아무 기대도 없다면 실망도 없다. 실망할 것도 없는 주제라면 절망 또한 없을 것이다. 목표가 없는데 좌절이 있을 리 없다. 알몸의 자신에게 익숙하다면 굳이 옷을 입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수치심이란 존엄한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다. 처음부터 고작 그런 주제였는데 새삼스럽게 그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혐오가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산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그런 자신이 혐오스럽더라도 타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이란 원래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죽고자 하는 여자와 살고자 하는 남자, 그러나 역설이었을 것이다. 여자는 누구보다 간절히 살려 하기에 죽으려 하고, 남자는 살고자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단지 죽지도 못하고 있을 뿐이다. 죽음에서조차 의미를 찾고, 죽음으로나마 무언가를 남기려 한다. 그러나 죽으면 끝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그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이다. 살고 싶다. 그래서 죽으려 한다. 죽을 수 없기에 누군가는 단지 살려 한다. 그들이 만난다. 죽고자 하는 여자와 살고자 하는 남자가 삶 가운데 서로 만나게 된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 이혼이야 아버지와 어머니 부부사이의 일이다. 그러나 그 결과 자신은 어머니로부터 선택받지 못하고 남겨지고 말았다. 혹시 자신의 잘못인가?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 그리된 것인가. 실제 많은 이혼가정의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버려졌다는 좌절과 상실감, 그리고 자기가 잘못해서 부모가 이혼했다는 죄악감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것은 결국 자신에 대한 자존감의 상실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혼가정의 아이들은 행복을 느끼는 정도도 다른 아들에 비해 매우 낮다. 아마 그래서 오영(송혜교 분)도 한때 왕비서 왕혜지(배종옥 분)에게서 어머니의 흔적을 찾고 그녀에게 의지하려 했을지 모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린 그녀로서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왕혜지에게 그녀는 단지 아버지의 대신에 불과했다. 아버지를 갖지 못한 대신에 왕혜지는 그녀를 갖고자 했던 것이었다. 한 남자의 여자이고자 했으나 남자에게 그녀는 목적이 아닌 그저 수단에 불과했었다. 남자를 쫓아 그의 집으로 들어온 뒤에도 그녀는 단지 남자의 아이를 위한 도구로서 취급되어지고 있었다. 한 남자의 여자이고자 했고, 그 남자의 여자로서 남자의 아이의 엄마가 되고자 했으나 끝내 남자는 그것을 그녀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할 것을 찾았다. 남자의 대신이며 자신이 가지지 못한 아이의 대신이었다. 남자를 갖지 못했기에 이것마저 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독립된 인격을 가진 주체적 존재가 아니었다. 왕혜지가 그녀의 모든 것을 대신해 결정해주고 있었다. 왕혜지에 의해 그녀의 삶이 결정되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왕혜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타율적이고 피동적인 객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존엄따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인형에 불과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가 마침내 오빠를 찾아나서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오빠라면 자신을 똑바로 보아줄 것이다. 오빠에게 기대서라도 왕혜지로부터 벗어나 오빠와 헤어지기 전의 자신을 되찾고 싶다. 어린 시절의 상실감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오수(조인성 분)에게 냉정하다. 끊임없이 그를 의심하고 시험하려 한다. 오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빠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 오빠가 진짜 자기의 오빠라는, 무엇보다 자기가 진짜 오빠의 동생인가 하는, 그래서 과연 오빠와 자신은 예전처럼 오빠와 동생 사이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상처를 입힌다. 죽여달라. 정확히는 살려달라는 소리다. 오빠라면 자기를 살려줄 것이다. 진짜 오빠라면 자기를 지금의 절망으로부터 구해줄 것이다. 만일 오수가 진짜 자기의 오빠라면. 하지만 그럼에도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그같은 오빠에 대한 믿음도 없다.

이명호(김영훈 분)가 그토록 오수를 의심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왕혜지도 오수를 믿지 못한다. 그들이 진짜 믿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반면 변호사 장성(김규철 분)은 오수에 대해 한 점의 의심도 없다. 자기를 믿는 사람과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그래서 박진성(김범 분)도 오수를 믿는다. 박진성의 믿음에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다. 어쩌면 그래서 드라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는 캐릭터로 등장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을 속이는 일에 대해서조차 오히려 전혀 아무런 거리낌없이 단지 성공만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참 곤란한 캐릭터일 것이다.

아무튼 그런 그들이 만난다.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 죽지도 못하던 남자와 살아가고자 하기에 차라리 죽고자 하는 여자가. 남자는 여자를 죽여야 하지만 살려야 하고,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죽이기를 바라지만 살려주기를 바란다. 역설은 그렇게 퍼즐의 조각처럼 서로의 조각을 찾아 맞물려간다. 자신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여자와 자기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남자. 친남매가 아니기에 그들의 만남은 자못 운명적이기까지 하다.

어쩌면 오영은 오수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모른 체 한다.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친오빠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오빠의 존재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오빠의 역할을 할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왕혜지도 아닌, 이명호도 아닌, 그렇다고 죽어버린 아빠도 아닌, 그녀의 간절한 바람 속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오수는 자신을 속인다. 속일 수 없음에도 속이려 애쓴다. 살아갈 이유를 찾아간다. 죽어도 좋은 이유를 찾아간다. 그는 살려 한다.

왕혜지와 이명호 사이의 잠시 스쳐지나간 비밀에 대해 궁금해진다. 이명호는 오수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될까? 오영은 오수의 정체를 알고 있을까? 과거의 오수에게는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잠깐잠깐 보이는 파편 속에 오수가 잃어버린 - 아니 잊고 있는 그의 삶의 의미들이 엿보인다. 그가 죽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살지도 못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조인성이 연기하는 오수를 보고 있으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다. 애써 버티고서 이를 악물고 웃는 모습이 처절하도록 서럽다. 그럼에도 그는 살려 한다. 죽지 못해서도 그는 살려 한다. 그는 살 수 있게 될까? 송혜교의 입가에, 눈가에 번지는 오영이 작은 눈물과 웃음들이 그보다도 더 치열하게 사람을 울린다. 그녀는 죽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은 살아갈 수 있게 될까? 죽지 않아도 살아가도 괜찮은 것일까?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가 어느새 시청자를 드라마 한가운데 있게 한다. 그들을 느끼고 그들을 호흡하고 어느새 드라마속 자신이 되어간다. 작가의 노회한 필력과 정교하게 연출된 화면득이 족쇄처럼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중독일 것이다. 중독과도 같은 드라마다.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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