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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2.10 11:23

불후의 명곡2 "설특집 팔도강산 우리노래, 정동하 우승하다."

듣는 것보다 부르는 것이 더 익숙한 일살의 명곡들을 듣다.

▲ 사진='불후의 명곡2' 로고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필자의 할아버지는 경상도 경주 태생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할머니와 함께 함경도로 이주해 사신 탓에 아버지 형제분 고향은 함경도다. 한 마디로 실향민일 것이다. 큰고모는 가족이 모두 월남할 때 북한에 남아 아직도 생사를 알지 못한다. 해방이 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정착한 곳이 강원도이니 그 두메산골이 어느새 번듯한 아파트단지로 바뀌어 버렸다.

어머니의 고향은 경기도 파주다. 워낙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탓에 한 번은 외할머니를 따라 외가쪽 친척들을 찾아뵙는데 조금 과장을 보태서 경기도 북부를 모두 누비다시피 했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아무데나 내리면 거기에도 먼 친척이 살아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이모부가 전라도 분이시라 어려서부터 전라도 쪽과도 인연이 깊었다. 물론 필자는 서울에서 태어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에서 보낸 토박이다.

그런 이유로 이번 <불후의 명곡2:설특집 팔도강산 우리노래>가 필자에게는 매우 새롭게 다가오고 있었다. 충청도를 대표하는 나르샤를 제외하고 참가자 전부가 필자와 나름대로 인연이 있었다. 경상도는 할아버지의 고향이시고, 함경도는 아버지의 고향이며, 서울은 필자의 고향이다. 강원도는 지금도 필자의 본적지로 남아 있다. 전라도가 고향인 이모부와는 어려서 가까운 곳에 살았기에 자주 왕래를 하며 지냈었다.

그래서 정동하의 무대가 더 좋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유랑극단의 느낌을 내보겠다고 했는데 그대로였다. 패티김이 불렀던 '서울의 모정'과 '서울찬가', 그리고 분위기를 바꿔가며 전혀 다른 무대인 듯 다양한 연출을 보여주었던 무대까지. 버라이어티란 바로 이를 위해 존재하는 말일 것이었다. 서울이 갖는 역동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각지에서 올라온 다양한 사람들과 사람들마다 간직한 수많은 사연들이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용광로처럼 하나로 녹아든다. 서울이란 단지 하나의 지명만이 아닌 그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인 것이다.

하기는 서울에 터를 잡고 산다고 해서 실제 서울에서 나고 자라기까지 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서울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라 할지라도 필자의 경우처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다양한 지명들이 나오게 된다. 그렇게 모이고 부대끼고 하나로 녹아든 것이 서울이다. 그 다양성과 역동성이야 말로 서울의 모습이다. 한 나라의 수도로써,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 학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중심으로써, 그 역동성은 곧 대한민국을 대표한다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변화가 서울로부터 비롯된다. 춤이야 여전히 많이 어설플지 몰라도 정동하가 보여준 버라이어티한 무대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박애리와 팝핀현준이 부른 '목포는 항구다'는 너무 앞서간 느낌이 있었다. 고단한 현실을 사는 서민의 애환이 녹아든 노래일 것이다. 고향을 떠난 이의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타향살이의 설움 속에 고향을 그리며 돌아가고픈 감정을 애절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반면 박애리의 노래는 너무나 깔끔하다. 팝핀현준의 퍼포먼스는 지난 무대와는 달리 경박해 보일 정도로 밝게 들떠있다. 물론 그 자체로도 훌륭한 무대이기는 했지만 노래를 들으며, 혹은 부르며 풀어내던 사람들의 구성진 감정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에 비해 인피니트H의 '부산 갈매기'는 그들 스스로가 다짐한 그대로 상남자의 그것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가사는 구슬프지만 이미 설움이라든가 한과 같은 정서와는 한참 거리가 멀 것이다. 부산이 고향인 필자의 지인 가운데서도 노래의 가사를 느껴가며 부르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응원가일 것이다. 야구장만이 아닌 일상의 삶에서 함께 부르는 그들만의 응원가일 것이다. 인피니트H의 '부산 갈매기'가 딱 그랬다. 남자들의 노래다. 삶에 짓눌리지 않은 젊은 남자의 패기가 담긴 노래다. 그들 자신의 노래다. 흥겨웠다. 즐거웠다. 그런 노래였다.

허각이 부른 '눈물젖은 두만강'은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을 것이다. 슬픔을 안으로 삼키며 한으로 삭이던 원곡에 비해 허각의 '눈물젖은 두만강'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호소하려 하고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과 감정을 노래하던 것에 비해서도 보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어떤 감상을 전하고 있었다. 노래에 삽입된 '고향의 봄'과 '아리랑'은 바로 그같은 객관화된 관념을 담고 있을 것이다.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마치 클래식처럼 너무 깔끔하다. 슬픔마저도. 그 애절하면서도 간절한 정서 마저도. 노래를 너무 잘 부른다는 것은 때로 이렇게 아쉬움을 남기고 만다. 너무 잘불렀다. 항상 허각은 노래를 너무 지나치게 잘 부른다.

아이비의 '소양강 처녀'에 대해서는 흘리듯 지나간 박현빈의 촌평으로 그 감상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숙였어야 했다. 더 노래에 자신을 맡겼어야 했다. 아이비인 채였다. 여전히 아이비 자신인 채 노래만 부르고 있었다. 아이비의 노래라는 느낌이 없었다. 노랫속의 자신도 아니었다. 아이비는 아이인 채로 단지 '소양강처녀'라는 노래를 부른다. 프로의 공연이라기보다는 마치 장기자랑 같은, 어디 노래방에라도 가서 멋드러지게 자기의 노래솜씨를 과시하며 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비의 매력적인 음색이 너무 아쉬웠다. 한 발만 더 깊이 빠져들었다면. 가수가 먼저 노래에 빠져들어야 청중 역시 노래로 빠져든다.

나르샤의 '대전블루스' 무대를 보면서는 마치 어딘가 오래된 클럽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노래만큼이나 끈적한 나르샤의 몸짓을 보면서 담배연기 자욱한 어두컴컴한 낡은 클럽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무명가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만큼 필사적이었고, 그래서 서러우면서도 매혹적이었다. 가수란 단지 노래만 잘 불러서 되는 직업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심한 만큼 더 이기적이고 냉정한 - 차라리 잔인하기까지 한 손님들 앞에서도 자신의 노래를 듣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 노래였었다. 트로트란. 특히 그 가운데서도 '블루스'라 불리우던 노래들은. 흑인들의 블루스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유래한 트로트의 블루스 역시 끈적한 멜로디 만큼이나 질척한 고단한 삶을 담아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더 매혹적이다. 인간이란 비극에 이끌리는 동물이기에.

익숙한 노래들이었다. 듣는 것보다 부르는 것이 더 익숙한 친숙한 노래들이었다. 어느새 따라부르고 있었다. 부산출신 친구놈들은 노래방만 가면 '부산갈매기'를 부른다. 목포 출신이라면 당연히 '목포의 눈물'이나 '목포는 항구다'를 부른다. 그래서 출연가수들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관객석에서도 함께 따라부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일상의 노래들이다. 그야말로 '팔도강산 우리노래'라 할 것이다. 이렇게나 노래들이 가까이에 있다. 전설은 다른 어딘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불후의 명곡이란 이렇게 바로 우리의 일상 가까이에 있다.

아무래도 정해진 시간 안에 각 지방을 대표해서 모인 관객들과도 소통하지 않으면 안되다 보니 MC의 멘트 상당부분이 편집되고 만 것은 무척 아쉬운 장면이었다. 한 눈에 보일 정도로 그 편집된 장면들이 어색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출연가수들을 소개하며 모두를 긴장케 하고 당황하게 만드는 MC 신동엽의 진행이 좋았다. 하지만 특집임을 감안한다. 재미있었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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