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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2.06 09:11

야왕 "하류의 증오와 주다해를 몰아세우는 것들..."

너무나 불운한 나약한 그녀가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 사진제공=베르디미디어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어째서 세상은 자신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일까?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남들처럼 그렇게 행복이라는 것을 한 번 누려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누구도 손가락질하거나 비웃지 않을 그런 당당한 삶을 한 번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세상은 - 아니 하늘은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 것인가?

차라리 저주와도 같을 것이다. 친아버지에 의해 하마트면 죽임을 당할 뻔했었다. 의붓아버지에게는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한 끔찍한 일들을 당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그녀를 비참한 가난속에 남겨두고 혼자서 세상을 떠났다. 겨우 하류(권상우 분)를 만나 숨을 돌리려 하니 의붓아버지가 찾아와 그녀는 죄인이 되고 만다. 하류의 도움으로 다시 도망쳐 숨은 그곳은 그러나 거짓과 기만이 만들어낸 신기루에 불과했다. 호스트가 되어 웃음을 팔고 있는 하류의 모습에 그나마 부여잡고 있던 허상들이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만다. 아예 처음부터 몰랐다면 거짓과 기만에 불과할지언정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왜 하필 백도훈(유노윤호 분)은 그런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을까? 왜 다시 그녀에게 결코 허락되지 않을 꿈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백도경(김성령 분)이 그런 그녀의 의도를 오해한다. 꿈은 좌절되고 현실은 꺾이고 만다. 그리고 그런 현실 앞에 좌절하지 않으려 한 오기의 댓가는 그동안 자신을 위해 헌신해 온 하류에 대한 배신이었다. 하류를 저버리고 딸 은별이마저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래야 겨우 백도훈의 옆자리가, 아니 백도경의 앞에 그녀가 마주 서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조차도 결국 발견되고만 죄의 증거로 인해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더이상 버텨보기에는 백도경 또한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궁지에 몰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하류에게 모든 죄를 미루고 단지 은별의 엄마로 돌아가 만족하며 살아가려 했었다. 하류를 대신해서 은별의 엄마로써 그나마 미뤄두었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백지미(차화연 분)의 작은 심술이 백도훈을 하필 그곳으로 불러오고, 백도훈과의 마지막이라 생각한 만남은 은별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만다. 하류와의 계약은 깨졌고, 그녀가 돌아가려 했던 일상 또한 부서졌다. 하류의 증오와 그보다 더 깊은 자기에 대한 혐오, 백도훈에게서 겨우 위로를 얻으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다시 더욱 첨예한 탐욕과 이기와 오해를 뿐이다. 그녀는 그렇게라도 머물려 하지만 누구도 그런 그녀를 내버려두려 하지 않는다. 살아야 하기에 그녀는 선택할 수밖에 없다.

사실 주다해(수애 분)에 대한 하류의 원망은 무리하다 싶은 부분이 없잖아 있다. 물론 주다해가 자신의 죄까지 모두 하류에게 씌우려 한 것은 잘못이었을 것이다. 주다해 자신의 죄이고, 그런 주다해의 죄를 덮기 위해 도왔을 뿐이었는데, 그러나 주다해는 안전한 곳에 숨고 하류만 모든 죄를 대신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댓가로써 딸을 잘 보살피겠다는 주다해의 약속은 딸 은별의 죽음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책임을 주다해에게 물으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다해가 은별을 죽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때마침 백도훈이 그녀를 찾아왔고 그래서 무심코 은별을 잠시 길가에 내버려두고 백도훈을 만나러 갔다. 그리 오랜 시간도 아니었다. 마지막 작별을 하고 돌아오는데 그만 우연한 사고가 그같은 끔찍한 비극을 불러오고 만 것이었다. 끝까지 은별을 보살피지 못한 것은 주다해의 잘못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주다해에게 있어도 불가항력의 말 그대로 사고였다. 도의적인 책임은 있겠지만 그렇다고 은별의 죽음에 대해 주다해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운전기사의 책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은별의 책임이었을까? 일상에서도 많은 엄마들은 잠시 아이를 혼자 내버려두고 한눈을 팔고는 한다. 그것이 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책임을 돌릴 곳이 필요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기에 누군가는 잘못을 하고 책임도 져야 했다. 그래야 마음이 놓인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누군가를 증오하면서 사랑하는 딸을 잃은 슬픔과 절망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 그렇게라도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 누구의 탓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탓하면서 그렇게 어떻게든 현실을 버티고 살아간다.

그나마 하류는 주다해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면 된다. 이 모든 것이 주다해 때문이다. 주다해 그녀의 잘못으로 딸 은별을 잃고 말았다.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댓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면 주다해는 어쩌려는가? 그녀는 누구에 책임을 묻고 누구를 원망하며 현실의 무게를 이겨내는가? 그래서 그녀는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으니까. 누구에게도 탓을 돌릴 수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혐오하고 증오할 뿐. 차라리 살 가치조차 없다. 그런 그녀의 곁을 지켜준 것이 다름아닌 백도훈이었다. 언제까지고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주겠다 말해준 이가 바로 백도훈이었다. 백도훈을 위해 살겠다던 주다해의 말은 그 순간 만큼은 한 점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류에게 주다해가 은별의 대신이라면, 주다해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은별에 대한 애정을 대신하고 있다면, 주다해에게는 백도훈이 그같은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딸 은별과 함께 있는 것처럼. 은별의 엄마로써 함께했던 바로 그 시간들처럼. 그곳은 도피처이기도 하다. 자신의 죄와 자기에 대한 혐오로부터 도망쳐 숨어들어간 피난처였을 것이다. 그곳을 지키고 싶다. 차라리 하류를 어떻게 해서라도. 죄책감조차 없다. 그런 것은 이미 은별이 죽는 순간 딸아이와 함께 한 줌 재로 고이 흘려보내고 말았다. 어미로써 딸아이를 죽도록 만든 죄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을까? 하류의 증오와 주다해의 악은 그래서 서로 닮아있다.

아마 수애라고 하는 국내 톱클래스의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공중파드라마인 것도 한 몫 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주다해라는 캐릭터는 악하지 않다. 혐오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죄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현실의 절망으로부터 발버둥친 결과 긁히고 찢기며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어간다. 그녀의 상처로 배어나온 죄가 점차 그녀를 물들여간다. 악해서가 아니다. 단지 약해서다. 그렇게밖에는 살아갈 수 없는 약한 존재인 때문이다. 그래서 드라마가 더 의미가 있다. 어째서 인간은 악하지 않은데도 악해질 수밖에 없는가. 주다해의 어린시절을 그토록 비참하게 유린해버린 의붓아버지를 죽인 것을 죄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 순간에도 쫓기고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쫓기며 점차 죄를 쌓아간다. 죄의식조차 없다.

하류도 살아가려 한다. 주다해만큼이나 그 또한 살아가려 필사적이다. 슬픔을 이기려. 절망을 이기려. 그래서 원망한다. 그래서 증오한다. 그를 위해 자신을 내몰고 다그친다. 그렇게 믿는다. 하류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 또한 다르게 사는 방법을 알지 못하니. 현실은 그렇게 그들에게 가혹하다. 너무나 가련한 그들이 그렇게 마주보며 달려간다.

주다해에 대한 백도훈의 감정은 진짜다. 잠시의 혼란은 있었다. 잠깐의 방황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학 끝에 쓰러져버린 주다해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오로지 주다해만을 바라본다. 주다해만을 생각한다.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설사 사람을 죽였어도. 이미 한 아이의 엄마라 할지라도. 그것이 더 슬프다. 그녀는 어쩌면 죄를 짓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겨우 쉴 곳을 얻을 수 있었다. 과연 어찌되려는가.

차라리 정면으로 증오를 드러내며 부딪혀 오는 백도경이 인간답다. 백창학(이덕화 분)은 주다해가 사는 저 너머 저 높은 곳에 있다. 존엄한 인격이 아니다. 단지 필요에 의한 수단이다. 그래서 그녀는 주다해를 용인한다. 백도훈을 위해서. 백지미의 질시어린 악의가 얽힌다. 오해와 쌓인 감정들이 뒤섞인다. 주다해는 살아가려 한다. 기대되는 이유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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