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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2.05 09:39

야왕 "예고된 은별의 죽음, 주다해를 잡아주던 마지막 끈이 사라지다."

주다해와 하류의 마지막 순간을 향한 엇갈림이 시작되다.

▲ 사진제공=베르디미디어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궁금했었다. 차라리 저주와도 같았던 그녀의 삶에서 은별은 유일하게 허락된 행복이고 기쁨이었다.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한 그녀의 삶에서 오로지 은별만이 진짜였고 은별의 엄마일 때 그녀 자신도 진짜가 될 수 있었다. 모성은 그녀가 절대 포기해서는 안되는 - 반드시 다시 돌아가야만하는 어떤 것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다시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주다해(수애 분)는 습관처럼 변명하듯 말하고 있었다. 은별을 위해서다. 모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은별을 위해 그리하는 것이다. 하류(권상우 분)를 배신한 것도, 거짓과 기만으로 백도훈(유노윤호 분)을 유혹하여 자신의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도, 무엇보다 엄마로써 가장 사랑하는 은별을 방치하고 외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조차. 언제고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은별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줄 것이다. 지금의 모든 일들은 그때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며 아픔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백도경(김성령 분)이 강하게 자신을 압박해오자 다시 은별의 엄마로써 돌아갈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자신의 죄가 드러날 것이 두려워서이기도 할 것이다. 자칫 자신의 밝히고 싶지 않은 비참하고 추악한 과거가 모두에게 알려질 것이 두려워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곳에야 말로 그녀가 돌아갈 곳이었고 그녀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곳이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이제는 딸 은별을 위해 많은 것들을 해줄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있기도 했다. 이대로 은별의 엄마로써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겠다.

문제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죄의 드라마다. 인간과 악에 대한 드라마다. 더 큰 죄와 더 깊은 악의 수렁으로 빠져들지 않으면 안된다. 은별은 그녀를 인간이게 하는 마지막 끈이다. 굳이 은별의 존재를 설정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더 극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단절하도록 한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버리고 죄와 악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보다 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은별은 사라져야 한다.

우려했던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방법으로 은별의 존재를 지울 것인가? 보다 극단적인 방법도 존재한다. 보다 과격한 수단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은별의 존재는 또한 주다해와 하류 사이에 갈등을 증폭시키는 매개이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 하류로 하여금 주다해와 마주하데 만드는 동기이며 동력일 것이다. 자칫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릴 수도 있다. 아무리 드라마라도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 있다. 그것을 드라마는 아주 절묘하게 무난하면서도 매우 정교한 장치로써 해결하려 하고 있다.

하류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엄마로써 은별을 책임지고 잘 보살피겠노라고. 주다해의 약속을 믿고 하류는 기꺼이 그녀를 대신해 죄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만 하류가 감옥에 있는 사이 은별이 죽고 말았다. 누구의 죄도 아니었다. 주다해는 하류와의 약속을 지키려 - 그보다 은별의 엄마로써 다시 돌아가려 은별과 함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가 그런 그녀에게서 은별을 앗아간다.

하필 그때 고모 백지미(차화연 분)으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백도훈이 주다해를 찾아와 만나고 있었다. 그것을 다시 공교롭게도 홍안심(이일화 분)과 양택배(권현상 분)가 지켜보고 있었다. 어째서 그녀는 그 순간 백도훈을 만나고 있었을까? 아이를 길에 혼자 남겨두고 백도훈을 만나고 있었던 것일까? 주다해 자신도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전혀 타인으로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홍안심과 양택배라면 더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류는 홍안심과 양택배로부터 그 모든 이야기들을 그들의 주관적 판단과 감정까지 곁들여 듣게 될 것이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주다해는 죄를 지었다. 약속을 어겼고 딸을 죽였다. 다른 남자를 만나기 위해 딸을 방치했고 지키지 못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너무나 큰 죄였고, 어쩌면 주다해 자신도 그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자신의 죄에 짓눌려 모든 것을 포기하며 살기에는 그녀의 삶은 너무나 처절하고 각박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죄를 딛고. 자신마저 용서하지 못할 그 모든 죄를 짊어지고서. 차라리 더 큰 죄로써 자신의 죄를 감추려 한다. 그녀는 살아야 한다.

악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악한 것이 아니라 죄가 악한 것이다. 그러나 그 죄가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자신의 존엄과 양심을 포기하고 죄에 순응하려 할 때. 그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된다. 그녀에게는 이제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다. 이제 자신이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할 것이 없다. 그저 살아갈 뿐. 그리고 그런 그녀를 하류는 만나려 한다. 서로를 등진 채 서로를 향해 그들은 묵묵히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 순간을 기약하며.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죄와 마주하게 된다. 그녀의 죄를 심판하게 된다.

조심스러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필요했던 장면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만큼 흔히 쓰이는 진부한 방식이기도 했다. 은별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은별이 죽는 그 순간 드라마는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 주다해의 죄와 절망, 그리고 하류의 분노와 원망이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비극일 것이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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