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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박홍준 기자
  • 영화
  • 입력 2013.01.30 22:06

[리뷰]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연인과의 관람도 좋지만 가족끼리, 혹은 친구끼리"

[스타데일리뉴스=박홍준 기자]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원제: Silver Linings Playbook)

감독: 데이빗 O. 러셀
출연: 브래들리 쿠퍼, 제니퍼 로렌스, 로버트 드 니로
각본: 데이빗 O. 러셀

 

▲ 사진제공=누리픽쳐스

실버라이닝: 구름의 흰 가장자리, 한 줄기 빛나는 희망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의 저 밝고 가벼운 포스터로 인해 이 영화를 발렌타인 데이에 어울리는 말랑말랑한 로맨틱 코메디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개봉일도 2월 14일이고, 수입사도 아마 그 점을 노린 듯하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절대로 로맨틱 코메디는 아니다. 오히려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물론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랑’임에 분명하지만 이는 분명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닌 가족애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러브 멘탈’이 붕괴된 커플의 좌충우돌 사랑 찾기가 아니라 소외되고 결핍된 사람들의 자아 찾기와 화해와 용서가 이 영화의 주제다.

 

정신병자들의 이야기.

팻 솔라티노(브래들리 쿠퍼 분)는 아내가 동료 교사와 바람피우는 것을 목격한 후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아내에게는 접근금지명령을 당하고 학교에서도 해고된 이후, 아내의 부정 현장에서 흐르던 자신의 결혼식 노래가 트라우마로 남아, 그 곡을 들을 때마다 미쳐버리는 팻은, 매일 쓰레기 봉투를 뒤집어쓰고 조깅을 하며,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의 결말이 슬프다는 이유로 새벽에 난동을 부리기도 한다. 한 마디로 이 남자, 정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팻의 주변 인물들은 어떤가? 아버지(로버트 드 니로 분)는 스포츠 도박 사업에 미쳐있는 강박증 환자고, 친한 친구 로니(존 오티스 분)는 심한 공처가이며, 그의 아내 베로니카(줄리아 스타일스)는 온 집안에 아이팟을 연결해 놓는 것을 자랑으로 알며, 정신병자를 인터뷰한다며 밤마다 카메라를 들고 팻의 집을 노크하는 옆집 대학생과 팻을 예의주시하는 경찰까지 영화의 모든 인물들이 미쳐있다. 심지어 그의 주치의 패텔 박사도 정상은 아니다.

팻의 퇴원 후 로니는 팻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팻은 드숀 잭슨(필라델피아 이글스의 와이드 리시버, 재작년 뉴욕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전설적인 터치 다운을 성공시키며 팀의 대역전을 이끌어 낸 바 있다.)의 져지를 입고 그의 집에 방문한다. 그리고 거기서 베로니카의 동생인 티파니(제니퍼 로렌스 분)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여자는 또 어떠한가? 남편의 사망 이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이 남자, 저 남자와 몸을 섞는, 자신을 창녀라고 부르며 자학하는 정신병자 아닌가? 팻은 티파니가 자신의 아내에게 편지를 전해주리라 믿고 그녀와 친구가 되기로 한다. 티파니는 대신 팻에게 자신의 댄스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조건을 달고 둘은 그렇게 우정을 쌓아간다.

 

 

찌질이들(Losers)...

팻의 캐릭터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찌질이(루저)들의 그것을 그대로 따른다. 가진 것 없고, 사랑받지 못하며, 게다가 지나치게 착하다. 자신의 전처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며 현실을 회피하고, 자기도 모르게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첫 데이트 때(물론 본인은 그것이 데이트가 아니라고 하지만) 시리얼을 주문하는 사람이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라면 소개팅 자리에서 참치김밥이나 단팥빵을 주문한다면 분명 그 남자는 루저라고 불리울 것이다.) 또한 티파니는 그 매력적인 외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소진한다. 그 일련의 행동들이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한 과정인지, 괴로움에 의한 자학인지는 몰라도 분명 정상적인 행동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자신에게 루저라고 소리치는 아버지에게 팻은 자신은 루저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팻의 아버지는 새벽에 헤밍웨이의 소설이나 결혼식 비디오 때문에 난리를 치는 것이 루저가 아니고 뭐냐며 나무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나쁜 것일까? 자신이 읽은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혹은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을 못 찾았을 때 화를 내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 (물론 새벽 3시에 식구들을 깨우는 것이 잘한 일은 아니다.) 사실 이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루저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루저는 아니다. 이들이 과연 누구에게 졌단 말인가? 팻의 아버지도 리모콘을 몇 개씩 들고 다니며 항상 원하는 위치에 있어야 하고 징크스에 목을 매는 도박중독 강박증 환자지만, 이러면 또 어떤가?

이 영화의 미덕은 이러한 루저 아닌 루저들이 자신의 상황과 주변인물, 혹은 사회와의 갈등을 극복해 나아가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리고 너무나도 당당히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루저가 등장하는 성장영화에서 주인공들은 결국 자신의 문제점을 깨닫고 그것을 고치거나 이겨내거나 타협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공식들을 답습하지 않는다. 팻은 피파니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풋볼 경기장에 가고, 또 화를 참지 못해 싸움을 일으킨다. 티파니는 끝까지 이기적이고 자기 감정에 솔직하며 질투로 인해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댄스 대회마저도 망칠 뻔 했다. 이들에게 성장이란 없으며 저마다 끝까지 자기 스타일을 고집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마지막에 가서 성격의, 아니 태도의 변화를 갖게 되는 입체적 인물은 팻이다. 그는 결국 그토록 집착하던 아내가 아니라 티파니를 선택하고 그녀에게 달려가 입맞춤을 한다.

또한 아마도 다른 영화 같았으면 영화 말미에 팻의 아버지는 도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도박을 끊거나 도박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가족과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거나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어떤가? 더 큰 도박을 하고 결국 그 도박에서 이겨 돈까지 따지 않는가? 그리고 그게 뭐 나쁘냐는 식으로 온 가족이 응원을 한다.

*영화 마지막에 팻의 아버지는 친구와 내기를 한다. 이때 상대방에게 10점의 핸디를 주겠다고 하는데 자막에는 10배로 돈을 준다고 나온다. 아마도 번역의 실수거나 역자가 스포츠도박을 잘 모르는 듯?

 

 

Excelsior? Que Sers Sers!

팻은 늘상 엑셀시오르(더 높이라는 뜻의 라틴어)를 외치고 다닌다. 루저들을 다룬 여타 헐리우드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그리고 그들은 늘상 "Show me the money"나 ‘Get the chance!"를 외치고 다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그것들을 갖지 못하거나 갖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도 팻은 자신을 높이려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가 영화 속에서 하는 일은 친환경 쓰레기봉투를 입고 조깅을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 데이빗 O. 러셀은 이들의 문제점을 결핍으로 그려내진 않는다. 굳이 1등이 될 필요가 뭐가 있나? 더 높이 올라가면 무엇이 있는가? 엑셀시오르?(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엑셀시오르는 필라델피아의 상대팀 뉴욕주의 구호다. 이런 젠장할...) 그냥 될 대로 돼라! 그러다 보면 나아지겠지. 영화는 우리에게 한 마디로 케세라 세라를 외친다. 애초 티파니와 팻의 목적은 댄스 대회 1등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댄스 영화가 아니니깐!) 이들은 5점만 맞으면 된다. 10점 만점에 5점. 5점이라는 점수는 1등은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모자라지도 않은 딱 중간인 점수다. 5점만 맞으면 이 들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고, 세상으로부터 정상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게다가 큰 돈까지 따지 않는가?

사실 팻과 티파니가 그토록 연습했던 동작(팻이 티파니를 안아 올리는, 엑셀시오르!)이 결국 실전에서도 성공하진 못한다. 물론 성공했다면 이 영화는 더티 댄싱이 됐을 것이고, 브래들리 쿠퍼는 패트릭 스웨이지가 아니니깐. 게다가 춤의 내용은 어떤가? 다른 참가자들은 댄싱 위드 스타즈를 방불케하는 의상과 안무로 무장하고 멋들어지게 춤을 추는데 이들은 거의 막춤 수준은 아니더라도 분명 좋은 점수를 받기는 어려운 안무와 춤실력을 신나게 뽐내고 무대에서 내려온다. (이 장면에서 감독의 펄프 픽션과 리틀 미스 선샤인에 대한 오마주가 느껴졌다면 필자의 지나친 비약일까?) 재밌는 것은 이들이 대회에서 선보인 안무는 실제로 연습과정에서는 보여지지 않는다. 관객들 또한 마지막에 가서야 그 약간은 우스꽝스럽고 신나는 춤을 볼 수가 있다. 마치 리틀 미스 선샤인의 그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 박수를 치고 만족한다. 5점을 받고 기뻐하는 이들을 보며 다른 참가자들과 심사위원은 의아해한다. “쟤들 미쳤나? 왜 고작 5점 갖고 저렇게 좋아 죽지?” 하지만 5점이면 어떤가? 스스로 만족하면 그만인 것을?

결국 이 영화는 ‘적은 내 안에 있다’라며 자인하며 문제점을 극복해 나아가는 게 아니라 ‘그러면 또 어때서?’라며 갈등 그 자체를 끌어안으려고 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 방식은 결국엔 팻이 원하는 대로 혹은 영화의 제목처럼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된다.

 

 
 

억지 감동이 아닌, 따뜻한 감동을 주는 영화.

이 영화는 분명 가슴 절절한 로맨스도 아니고, 정신병자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어두운 영화도 아닌다.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감질맛 나는 조연들과 재치있는 상황과 대사로 분명 크게 웃을 수 있는 장면들이 있다. 팻이 한창 친구 로니와 싸우다가 로니가 자신이 쓰던 구형 아이팟을 준다고 하니깐 화색이 밝아지는 장면을 보라. 영화는 갈등의 와중에서 웃음을 주는 해학을 확실하게 성취했으며, 로니가 자신이 정신병 변호사라며 떠들어 대다가 경찰과 병원 관계자들에 의해 병원으로 연행되는 장면에서는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엿들을 수 있다.

감독의 전작에서도 보여지듯이 이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가족이다. 재밌는 것은 팻이 티파니와 사랑을 이루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장소가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춤 연습실이 아닌 팻의 집이라는 것이다. 온 가족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티파니는 팻의 무릎에 안겨 입맞춤을 한다. 결국 이들의 사랑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인정받고 보호받으며 결실을 이룬 셈이다.

러셀 감독은 그의 전작 쓰리 킹즈나 파이터에서와 같이 핸드 핼드 방식과 홈 비디오 장면 등을 인서트로 자주 사용한다. 인위적인 모습이 아니라 현실 그 대로를 보여주기 위한 영화적 장치인데, 그런 그의 스타일들이 거칠거나 산만하지 않고 세련되고 짜임새 있게 영화 속에 드러난다. 스티비 원더나 밥 딜런 등의 노래가 사운드 트랙에 실려 있으며(팻의 결혼식 기념곡은 스티비 원더의 (My Cherie Amour) 스포츠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스포츠 코드를 찾아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실제로 작년 12월 31일 벌어진 마지막 경기에서 필라델피아는 뉴욕 자이언츠에게 대패하며 플레이 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강하고 조금은 떠 있는 캐릭터들 속에서 영화의 톤을 조율하는 팻의 엄마 돌로레스 역을 맡은 재키 위버의 연기도 훌륭하며, 평소 자신의 주특기인 입심을 조금 줄이고 영화 속에서 감초 역할을 맡은 크리스 터커도 칭찬할 만하다. 줄리아 스타일스나 팻의 형으로 등장하는 쉬어 윙햄도 반갑기 그지 없다.

 

 

한국에서 2월 14일에 맞춰 개봉하는데, 연인과의 관람도 좋지만 가족끼리, 혹은 친구끼리의 관람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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