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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이슈뉴스
  • 입력 2013.01.15 08:51

야왕 "주다해의 원죄와 현실이라는 함정, 그러나 흔하고 진부하다."

80년대 호스티스물을 뒤집은 듯한 뻔한 설정이 아쉬움으로 남다.

▲ 사진제공=베르디미디어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어디선가 한 번은 본 듯한 이야기들일 것이다. 불우한 환경에 놓인 주인공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쫓다가 끝내 파멸하고 마는 이야기는 너무 흔하다. 작년 방영한 <적도의 남자>의 이장일이나 <추적자>의 강동윤도 그런 인물들이었다. 그동안 자신을 위해 뒷바라지해 온 연인을 배반하는 이야기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많다. 자신을 성폭행한 의붓아버지에게 쫓기다 끝내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원죄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핸 가장 강력한 동기인 동시에 최고의 정점에서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심판의 씨앗이다.

도입부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특별검사로 임명된 하류(권상우 분)가 다급히 청와대를 향해 달려간다. 청와대에서는 영부인 주다해(수애 분)가 소년소녀가장들을 초청해서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소년소녀가장들을 격려하는 영부인 주다해와 그런 그녀를 체포하기 위해 달려가는 특별검사 하류, 그리고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어쩌면 아주 먼 과거에 두고왔을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다. 영부인은 총을 들고 그녀와 마주선 사이 총소리가 들린다. 누구를 향한 누구의 총소리인가?

고아원에서 헤어졌던 하류와 주다해가 여러 해만에 다시 만나는 장면 역시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지 하얀 천이 덮여져 있을 뿐 방치되어 있던 주다해 어머니의 시신과 그 시신 앞에 오도카니 넋놓고 앉아 있던 주다해의 모습은 심연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섬뜩함으로 다가왔다. 그곳은 지옥이었다. 죽음과 굶주림, 그리고 절망과 체념. 아마 때에 전 낡은 이불이 아닌 다림질까지 된 깨끗한 천으로 시신이 덮여 있었던 것은 그같은 묵시적 암시가 아니었을까? 차라리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인간을 벗어난 그곳에서 하류와 주다해는 다시 만난다.

하류와 주다해의 만남이 어떤 묵시적 예언을 보여주고 있다면, 가난과 어머니의 죽음이 죄가 되어 쫓겨나듯 뛰쳐나온 주다해의 손에 들린 반지는 주다해라고 하는 자신을 묘사해 보여주고 있었을 것이다. 착하기만 한 주인공이 아니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착하고 성실하게만 살려는 흔한 주인공은 아니었다. 차라리 악역에 어울린다. 아니 악역이다. 그러나 그녀가 악역이 될 수밖에 없는 뒤틀린 운명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가난이 죄가 되고 불행이 죄가 되어 사회의 주변으로 벼랑까지 내몰린 이가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일 것이다. 성냥팔이소녀처럼 꿈을 꾸며 죽음을 맞던가, 아니면 차라리 반역자가 되어 그같은 현실과 맞서 싸우던가. 세상의 질서가 선이라면 그 질서와 맞서려는 자신은 악일 수밖에 없다.

물론 주다해가 처음부터 악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발로 스스로 찾아들어간 단란주점에서 하류에 의해 구해졌을 때, 그리고 하류의 전폭적인 지지와 보살핌 속에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노력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누릴 수 있었을 때, 대학진학을 못하더라도 단지 대학에 합격한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던 주다해의 말은 어쩌면 그녀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녀도 자신의 처지를 안다. 자신의 앞에 놓인 현실을 안다. 그래서 순응하려 한다. 그러나 순응하며 사는 것조차도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 버겁다.

아직 어린 그녀를 성폭행한 의붓아비가 어느새 애써 도망쳐 숨은 그녀를 찾아온다. 그 끔찍할 정도로 혐오스럽고 두렵기만 한 그가 작은 행복에 안주해 있던 그녀를 쫓아온다. 그녀의 손목을 잡는다. 그것은 이대로 그에게 끌려갈 수 없다는 절박함이었을 것이다. 막다른 곳에 다다른 절망이 그녀에게 극단적 선택을 하도록 강요한다. 인간의 양심이란, 그리고 이성이란, 인간의 죄란, 그렇게 하잘것없이 가볍기도 하다. 죄를 지으려 해서가 아닌, 양심을 저버리려 해서가 아닌, 단지 이성을 지킬 힘이 없기에 그렇게 인간은 원죄에 빠져들기도 한다.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해 반지를 훔치고 그것을 음식물쓰레기속에 던져버리던 모습처럼. 사람을 죽인다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행위마저 그렇게 한순간에 우발적으로 일어나고 만다.

가난이 두려운 이유다. 소외가 끔찍할 정도로 두려운 이유다. 하기는 가난하기에 소외된다. 소외되기에 가난하다. 복지가 필요한 이유다. 이성을 지키고 양심을 지키려 해도 그럴 힘이 없다. 굶주림과 절망에 지쳐 쓰려지던 주다해처럼, 정신을 차리고 차라리 자기를 사라 하류에게 말하던 그녀의 넋두리처럼. 하류에게 자신의 몸을 팔려 했던 주다해는 결국 자신의 이성과 양심마저 팔아버리고 만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죄가 드러나고 그 죄를 하류가 단죄하려 할 때 그녀는 마지막으로 발버둥칠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죄를 지으려 한 적이 없다. 단지 그녀의 선택이 죄가 되었을 뿐.

주다해를 위해 호스트바에서 일할 것을 고민하는 하류의 모습은 오래전 고시공부를 하는 애인을 위해 웃음을 팔던 가련한 여인들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눈물을 감춘 웃음을 팔면서도 사랑하는 이와의 희망을 꿈꾸던 이들의 처절한 배신과 좌절의 이야기다. 성공한 남자는 떠나가고 남자를 위해 노력한 여인들은 버려진다. 흔한 호스티스물의 전형적인 이야기구조다. 아마 이 부분에서 실망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과연 고아에 배운 것도 돌보아 줄 이도 없는 하류가 어떻게 대통령 영부인까지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특수검사까지 될 수 있었을까?

차라리 주다해의 성공보다 이쪽이 더 흥미를 잡아끌 것이다. 주다해는 그렇게 자신의 양심까지 팔아 대통령 영부인이 되었는데 하류는 무엇을 팔아 그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아무것도 없이 단지 노력만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면 실망은 더 큰 것이다. 주다해를 죄로 내몬 현실이 하류에게만 유독 관용을 베푼다. 이미 하류가 놓인 현실조차 하류를 자유롭게 희망하도록 놓아두지 않고 있다. 그는 또 어떤 절망을 품고 살아갈까?

수애의 연기에는 기품같은 것이 있다. 도도하면서 깊다. 하기는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다해는 죄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권상우는 수수하면서도 강인하다. 그다지 아름다운 결말이 아닐 것임을 두 사람의 모습만으로도 예감할 수 있게 한다. 그들은 결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상당히 유치하고 진부하다. 캐릭터가 살린다. 연기가 살린다. 전형적인 이야기를 살짝 풀고 적당히 섞어서 그것을 배우들이 연기한다. 얼마나 배우들의 연기가 드라마를 견인할 수 있을까. 배우들이 있어 완전히 같은 이야기라도 전혀 다른 느낌과 재미로 살아날 수 있다.

불안요인이 많다. 무엇보다 드라마가 너무 우울하다. 드라마란 판타지다. 시청자는 드라마로부터 꿈을 보려 한다. 주다해의 성공에 짜릿해하면서도 그녀가 죄의 댓가를 받기를 바라는 이율배반을 어떻게 소화하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누구나 성공을 바란다. 누구나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이 상승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만 바랄 수 없는 현실적 한계가 있다. 그것을 깨부수는 쾌감이며 그럼에도 그에 순응하고자 하는 위로이다. 지켜본다.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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