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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1.13 09:15

불후의 명곡2 "가수 유미의 눈물과 탄식, 가수는 무대에 서야 한다."

무명의 가수에게도 열린 무대, 예능이기에 갖는 또다른 가능성을 주목하다.

▲ 사진='불후의 명곡2' 로고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80년대 록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밴드 '시나위'의 기타리스트 신대철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기타를 놓으면 죽을 것이라고,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사실이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고 더욱 열심히 기타를 튕겼다. 그럴수록 고통은 더 컸다. 매일 기타를 만지면서도 그 소리를 세상에 들려줄 수 없는 기타리스트의 고뇌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프고 암울하다."

아마 많은 이들이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죽을 것처럼 연습하고 노력하는데도 그것을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고 하는 절망감. 이토록 죽을 것 같이 사랑하고 그래서 모든 것을 다하고 있음에도 누구도 알아주는 이 없다고 하는 좌절감. 그것은 때로 체념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어떤 이는 포기하고, 어떤 이는 체념속에 모든 것은 포기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데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감히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무대였다. 쟁쟁한 다른 동료가수들과 수많은 관객과 심지어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초대된 위대한 선배의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오래도록 홀로 간직해 온 사랑을 드디어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오랜 시간을 오로지 혼자서 가슴앓이만 하던 이야기를 끝끝내 들려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고백이야 하더라도 그 감격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쌓인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도 그 감정을 주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불안했다. 아슬아슬했다. 다행이었다. 애절한 도입부는 가수의 울먹임을 숨겨주기에 충분했다. 폭발하는 록사운드는 분노하는 듯 들렸고 이내 가수의 울음과 섞여 절규가 되어 버렸다. 그랬다. 그런 노래였다. 슬픔이 분노가 되고 분노가 절규가 되고 그것이 다시 저주가 되는. 그리고 어느새 그것은 자신을 향한 넋두리가 되어 버린다. 어쩌면 노랫속 원망의 대상이 되는 '너'는 그토록 사랑했음에도 지금껏 고작 두 번의 기회만을 허락했던 무대 자신이 아니었을까? 지금 자신이 선 무대와 그리고 자신이 부르고 있는 노래였을 것이다.

끝내 끓어오르는 감정을 그녀는 억누르지 못하고 토해내고 만다.

"하!"

자신을 농락한 대상에 대해 분노하고 절규하고 원망하며 한탄하듯 넋두리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렇게 짧은 숨을 내쉬게 된다. 그조차도 의미없다. 그조차도 이제와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을 안다. 이제는 끝낼 때라는 것을. 밤새 헤어진 연인을 저주하며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다가도 어느 순간 술에서 깨고 나면 그렇게 탄식같은 한 마디를 토해내고 만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한바탕 꿈처럼 그렇게 감정은 흘러간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무대도 노래도 여전히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 단지 신대철의 말처럼 곁에 있었음에도 사랑하지도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못했을 뿐.

모르지 않은가. 어제까지 그렇게 관심조차 주지 않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내게 사랑을 고백해 올 수도 있다. 그렇게 원망하고 떠나려 했더니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고백을 들려주며 자신을 붙잡을 수도 있다. 이제 겨우 세 번 째 무대였다. 그 가운데 유미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모두의 앞에서 관심을 받으며 노래를 부른 것은 어쩌면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나무도 열 번은 찍어봐야 베어질 것을 안다. 사랑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고백을 하고서야 이루어질 것을 안다.

노래보다 가수가 더 슬펐다. 어쩌면 그것은 실패한 무대였을 것이다. 노래를 들었어야 했는데 가수를 들어버렸다. 하지만 노래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사랑노래였지만 그래서 그것은 사랑노래가 되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이 아닌 자신의 꿈과 열정에 대한, 그에 대한 지금까지의 좌절과 절망에 대한 노래였다.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무대와 노래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게 그녀의 울음처럼 사람들을 울리고 있었다. 부디 이것이 끝은 아니기를. 그러기에는 그녀의 재능이, 그녀가 보여준 실력들이, 그녀의 눈물 뒤에 숨은 열정과 노력들이 너무 아쉽다. 성공적인 무대는 아니었지만 이것이 또다른 시작이 되었기를. 꿈과 열정을 알기에 어느새 눈물도 흘리고 있었다.

유미였다. 이름을 아는 이조차 드물었다. 무려 2002년에 벌써 데뷔했다는 사실에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스탠드에 마이크를 끼우는 손놀림조차 어색했다. 무대위에서 노래를 부르면서도 손짓이며 표정들이 데뷔 10년차의 프로의 그것이라 보기에는 한없이 서툴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노래는 진짜였다. 그녀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들이 그녀를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다시 볼 수 있기를. 빨간 정열의 드레스처럼 그녀의 꿈이 끝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불후의 명곡2>는 그녀에게도 또다른 기회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원한다. 그녀의 꿈을, 그녀의 열정을.

정동하의 '포이즌' 무대는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록 특유의 사이케델릭한 몽환은 어느새 지옥의 심연까지 닿아 있는 듯 싶었다. 들끓는 분노와 저주, 원망과 증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정작 가수 자신은 술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감정 그 이면의 감정이다. 드러난 감정 이면의 마치 지옥의 그것을 보는 듯 끓어오르는 혼돈이 그대로 무대 위로 옮겨진다. 다만 그로 인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감정은 분명 대중성이라는 면에서 마이너스다. 이해할 수 없는 혼돈과 혼란이 자칫 관객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분노와 원망, 증오, 저주, 그리고 한탄과 체념이 교차하는 무대는 정동하의 숨겨진 매력을 극대화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포이즌'이란 원래 이런 노래였을 것이다. 그의 무대는 항상 기대하게 하고 설레게 만든다.

스윗소로우의 마지막 무대는 그야말로 마지막에 어울리는 버라이어티 그 자체였다. 전투적이고 도전적이다. '다 가라'는 노랫말 그대로 싸우듯 모든 것을 물리치려는 의지가 보여준다. 남자의 노래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스위소로우 특유의 거창하지 않은 소소한 일상의 감성들은 어느새 듣고 있는 이의 힘조차 북돋워준다. 역시 혼자보다는 넷이 낫다. 노래란 어쩌면 아주 오래전 말로써 다하지 못하는 말을 말로 전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었음을. 어색한 춤사위가 이제까지의 반가운 만남에 대한 선물인 듯하다. 그들의 무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슬프고 아쉽다. 언제고 다시 돌아오기를. 그들의 무대는 항상 최고였다.

엄정화와 닮았다. 그러면서도 엄정화와는 다르다. 엄정화의 원곡 '초대'를 그대로 따라부르는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그것은 엄정화가 아닌 아이비의 '초대'였다. 그때의 그 불운이 아니엇다면 어쩌면 그녀는 엄정화의 뒤를 잇는 2000년대의 섹시디바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젊고 아름답다. 그리고 원숙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가수에게 몇 년의 슬럼프야 당연한 일상이기도 할 것이다. 한결 노련해진 몸짓이 도저히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남성 댄서들의 한가운데 그들을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조종하며 그들에게 떠받들려지는 디바 아이비가 있다. 넘치지 않으면서도 그래서 더욱 보는 이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우승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엄정화를 위한 <불후의 명곡2>에 가장 어울리는 참가자가 아니었을까. 차라리 그녀의 출연은 사기라고 말하고 싶었다. 최고였다.

손호영의 '숨은그림찾기'는 신났다.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 관객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은 좋지만 그로 인해 도리어 자신의 무대에 소홀하지는 않았는가. 관객들과 함께 어울리는 가운데 정작 자신의 무대가 흐트러지는 듯 보였다. 하기는 그가 의도한 바일 것이다. 혼자서 즐기는 무대가 아닌 관객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무대. 하지만 그것이 순간의 흥겨움과는 별개로 그의 무대에 대한 냉정한 판단을 불렀을 것이다. 아무래도 관객이 듣고자 하는 것은 노래일 것이고 즐기고자 한 것도 가수 자신의 무대였을 것이다. 유세윤이 지적한 것도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2BIC은 노래를 잘 부른다. 유일한 감상이다. 음악프로그램이 아니다. 무대에 선 가수의 노래를 단순히 듣고 즐기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경쟁을 펼쳐야 한다. 과연 2BIC이 내세울 수 있는 강점이란 무엇일까? 편곡에서도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고, 노래 역시 스탠다드하게 잘한다는 느낌이다. 썩 훌륭하지만 그것이 그날 무대에 선 다른 가수들과의 차별점을 이룬다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첫출연에 마지막 무대라 떤 탓도 있었을 것이다. 실력있는 신인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은 좋았다. 새삼 <불후의 명곡2>가 음악프로그램이 아닌 예능프로그램임을 깨닫고 만다.

그러고 보면 유미와 같은 실력은 있지만 인지도가 떨어지는 가수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공중파 음악프로그램들은 하나같이 대형기획사 중심으로 꾸려지고 있고, 심야음악프로그램들은 음악적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룬 인지도 있는 음악인들로 채워지고 있다. TV를 비롯한 대형미디어에 크게 의존하는 대중의 성향 또한 알려지지 않은 가수나 음악들이 더 이상 대중에게 다가가기 힘들어지는 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과거처럼 입소문으로 전혀 홍보조차 하지 않은 음악과 가수가 대중에 알려지는 경로는 제한되어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데뷔한지도 한참 된, 음반까지 낸 프로가수들이 얼굴을 내밀곤 하는 이유다.

<불후의 명곡2>가 갖는 가치다. 때로 팬이 아니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수들도 어떻게 섭외되어 무대에 서곤 한다. 낯설고 어색하지만 새로운 무대가 끊임없이 보여진다. 대기실에서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동료가수들의 모습이 그들에 대한 대중의 거리감을 지워준다. 어쩌면 음악프로그램이 아닌 예능프로그램이기에 가능한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인기가수와 히트곡이 아니더라도 시청자가 바라는 재미만 있다면 얼마든지 출연 가능하다. 정동하와 스윗소로우, 아이비와 같은 주류에 속한 가수들은 그들을 위한 든든한 방패막이며 견인의 역할을 한다. 주류와 비주류가 어울릴 수 있다.

유미의 무대가 주는 의미였다. 무대 자체는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흘린 눈물과 노래 가운데 내뱉은 탄식이 이 무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가를 새삼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더 많은 유미가 무대에 설 수 있기를. 그녀의 노래에서처럼 더 많은 더 다양한 감동을 대중은 바라고 있을 것이다. 대중은 언제나 탐욕스럽다.

마이크를 스탠드에 고정시키는 것조차 서툴러 당황해하는 유미를 위해 말없이 다가와 도와주는 신동엽의 모습이 멋있었다. 이런 맛일 터다. 아직은 신년 주말의 저녁이 훈훈한 감동으로 채워진다. 제아와 엄정화의 눈물처럼. 이 프로그램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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