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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1.04 09:14

전우치 "일상에 지친 어른들을 위한 동화, 그러나 현실처럼 무겁고 우울하다."

갑작스런 절망과 좌절, 그리고 시련, 희망을 기대해 보다.

▲ 사진제공=K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그야말로 동화일 것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고귀한 신분의 누군가를 돕는다. 때로 망국의 왕자이기도 하고, 때로 몰락한 집안의 공녀이기도 하며, 혹은 측근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모든 것을 잃은 재벌의 후계자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왕과 왕비다.

조선은 누구의 나라인가? 그러면 묻는다. 영국에는 지금도 왕이 있다. 그래서 영국은 영국 국왕의 나라인가? 일본에도 텐노라 부르는 왕이 아직 남아 있으니 일본 역시 텐노의 나라라 할 수 있는 것일까? 단지 왕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조선을 왕의 나라라 단정지어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사대부에 의해 건국되었고, 사대부들의 지지와 협력을 받아 유지되며, 무엇보다 왕 자신이 사대부들에 의해 옹립되었다. 왕위에 있으니 조선은 자신의 나라인가?

공신들에게도 당연히 지분이 있다. 그것을 바라고 공신들 역시 목숨을 걸고 반정을 일으켰던 것일 게다. 무엇보다 왕 자신이 그에 동의하고 있었다. 신하로써 왕을 쫓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겠다는데 지금의 왕 이거(안용준 분) 역시 동의하여 지금의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신하가 왕을 내쫓을 수 있다. 왕을 내쫓고 새로운 왕을 세워 임의로 갈아치울 수 있다. 왕으로서 자격이 없다면 그는 왕이 아닌 일개 필부에 불과하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물론 그만한 능력을 갖춘 사대부들일 터다. 그래서 반정이다. 그런데 왕의 나라라 말한다.

하기는 그래서 왕은 선량할 것이다. 왕비 역시 누구보다 선량하다. 관리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그것을 쌀과 돈으로 바꾸어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 조선이 보다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도록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도 하고 있다. 고귀한 이는 선량하다. 그래서 그같은 고귀한 이와 맞서는 야심가들은 악하고 탐욕스럽다. 왕에게 나라를 돌려준다. 왕에게 왕으로서의 권력과 권위를 돌려준다. 그를 위해 그를 억누르는 집단과 맞서싸운다. 고난에 처한 왕자를 구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공녀를 돕는다. 그로써 그의 능력은 가치를 갖는다.

결국 전우치(차태현 분)과 마강림(이희준 분), 그리고 마숙(김갑수 분)의 가치란 서로가 모시는 고귀한 이의 가치에 달려 있을 것이다. 마강림은 권신인 오용(김병세 분)의 수족이 되어 왕을 압박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마강림의 뒤에는 마숙이 버티고 있다. 세상을 뒤집겠다는 마숙의 원대한 포부는 그같은 오용의 부패와 전횡 앞에 가려지고 만다. 반면 전우치의 선량함은 왕이 보증한다. 왕을 위해 오용과 맞서고, 왕과 왕비를 위해 마강림, 마숙과 부딪히며 전우치 또한 영웅으로서 완성된다. 가련한 지배받는 이의 숭명일 것이다. 뒤웅박팔자라는 말 그대로 누구를 섬기는가로 그의 운명과 가치가 결정된다.

하지만 좋지 않은가?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왕이란 고귀하고, 더구나 현재의 왕 이거는 누구보다 선량하고 현명하다. 왕비 역시 무척이나 현숙하다. 그들은 왕에 어울린다. 왕비에 어울린다. 그런 왕과 왕비를 돕는다. 목숨을 걸고. 이제는 마강림의 도력이 전우치를 넘어섰다. 불리함을 무릅쓰고 악을 무찌를 수 있는 것은 그가 정의롭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것이 필연이고 당위이기에 주인공은 승리하고 만다. 영웅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

동시간대 그나마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늦은 시간이다. 삶에 치이며 고단한 사람들에게 굳이 고민할 필요없이 단순하게 즐길 수 있는 동화란 하나의 휴식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악은 응징당한다. 모든 것은 원래의 제자리를 찾는다. 낮은 이로써 고귀한 이를 도우며 마치 자신의 신분이 상승한 것 같은 쾌감을 느낀다. 다만 그렇다기에는 전우치가 그다지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걸린다. 거기에서 굳이 공신들의 나라를 바꾸기 위해 나선 청렴하고 학식 또한 뛰어난 부원군이 죽임을 당하는 좌절을 맛보도록 해야 했을까? 이제껏 밝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봉구(성동일 분)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게 되었다. 너무 무겁고 너무 어둡다.

차라리 어두운 분위기로 시작하려면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을 것이다. 차츰 분위기가 밝아지며 사람들에게 밝은 희망을 보여준다. 차태현이라는 배우를 굳이 캐스팅한 것은 그가 갖는 밝은 분위기를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참 밝다가 다시 끝없이 어두워진다. 희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한 어둠이다. 더 이상 드라마가 즐겁지 않다. <전우치>란 무척 즐거운 드라마였을 터였다. 재미가 없다.

역시 이희준 자신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마강림의 캐릭터가 갖는 한계이거나, 전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마숙의 이상을 그저 들을 뿐이다. 오용의 명령을 단순히 따를 뿐이다. 무엇을 해보겠다는 의지가 없다. 어떻게 해야겠다는 판단 또한 없다. 왕과 왕비가 겪는 비극을 보면서도 연민을 갖지 않고, 그렇다고 어떤 분노나 증오를 보이지도 않는다. 마치 기계처럼, 엑스트라처럼 그저 주어진 역할에만 피동적으로 따를 뿐이다. 프로그램된 로봇처럼 전우치에 대한 감정 또한 경직되어 있다. 홍무연(유이 분)을 과연 사랑하기는 하는 것일까?

대략 조선 전기인 듯 싶다. 공신의 수를 줄이는 등 왕을 등에 업고 개혁을 추진하다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는 모습은 중종 때의 조광조를 보는 듯하다. 중종 역시 반정에 동참하기를 거절했다가 반정공신들에게 죽임을 당한 신수근의 딸이었다는 이유로 단경왕비와 생이별을 경험하고 있기도 했었다. 폐서인되어 궁에서 쫓겨나고서도 서로를 그리워했던 왕과 왕비의 이야기는 '치마바위'의 전설로 지금도 전해진다. 그러고 보면 반역자의 딸로써 폐서인되어 노비가 될 처지에 놓인 왕비를 자신의 노비로 달라는 어느 공신의 요청은 정순왕후를 자신의 노비로 달라고 했다던 신숙주에 대한 민간의 전승과 무척 닮아 있다.

사실 조선사회에서 아무리 역모로 몰렸다 하더라도 삼족을 멸하거나 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하물며 그 가족을 공신의 사노비로 보내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세조가 저지른 대표적인 패악 가운데 하나다. 어제까지 친구이고 동료이고 선후배였던 이의 아내, 혹은 누이나 딸을 오늘 노비로 삼아 부리려 한다. 어지간한 신경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명회는 오랜 친구인 권람의 외손녀를 자신의 노비로 삼아 부렸다. 세조는 동생인 안평대군의 손녀를 권람에게 노비로 내리기도 했었다. 물론 세조 이후 그같은 일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군사를 일으켜 조정을 위협했던 이징옥조차 그의 가족은 단지 변경의 관비가 되었을 뿐이다. 신숙주와 관련한 일화는 그런 세조의 처사에 대한 민간의 분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없는 시골의 이름없는 선비라 해서 그 상소가 철저히 무시당했는가? 그것이 조선의 힘이었다. 그러니까 판타지다. 무지렁이 백성도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려 자신의 뜻을 전할 수 있었고, 그 뜻이 타당하다면 그것이 실제 국정에 반영되기도 했었다. 관직에 있는 이의 상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배경만 조선이다.

어쨌거나 정말 어둡다. 암울할 정도다. 보고 있으면 우울해진다. 그래도 한 가지 갖는 희망은 이 드라마는 코미디일 것이라는 것. 웃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침내는 모두가 웃으며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래본다. 차태현의 전우치마저도 너무 무겁고 우울하다. 그렇지 않아도 현실이 버거울 정도로 무겁고 우울하다. 힘이 빠진다. 다시 원래의 밝은 길로 돌아오기를.

마강림이 깨어날 때가 되었다. 그가 변수가 되어주어야 한다. 홍무연이 그 촉매가 되어줄까? 길을 잃고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제대로 길을 찾아가기를. 마숙이 다시 전면에 나서는 순간을 기다려 본다. 조금은 흥미진진할 것이다.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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