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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공소리 칼럼니스트
  • 칼럼
  • 입력 2018.02.13 19:55

[공소리 칼럼] #미투 이용할 줄 모른다고?

- 왜 관심을 안 뒀냐고? #미투니까. - “다들 진짜 그 입장을 알면서 떠드는 거야?”

[스타데일리뉴스=공소리 칼럼니스트] 요즘 #미투(me too) 운동이 유행의 도구로 소비되거나, 관심의 주제로 소비되는 건 SNS를 하는 사람이라면 느꼈을 거다. 어떤 해시태크 모음, 게시물, 칼럼 등 미투가 SNS를 장악한 것을 보며 내심 불편했다. 우선 미투를 마구 소비하는 모습은 어색했다. 진짜 불편한 것은 #미투 그 자체였다.

주제를 떠나 마구 소비되는 미투가 어색하고, 미투 의미가 불편하지만 나도 #미투를 쓴다. 왜냐하면, 미투를 외치도록 동기부여가 되는 대사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지인 A씨는 #미투를 활용해서 글을 써보라고 권하면서 “왜 한창 이슈인데 이용할 줄 모르냐”고 지적했다. A씨의 요지는 성칼럼을 쓴다는 사람이 이럴 때 물타기 해야지, 왜 가만있냐고 훈계하는 거다. 나는 “최근 #미투와 관련된 현상에 대해 말하기 불편하다”고 답했지만, A씨는 나를 못마땅해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미투이기 때문에 불편했다.

이슈를 활용할 줄 모른다고? 다들 그 입장을 알긴 알면서 #미투라고 떠드는 건가? 이슈에 흥행 타기 위해서 쓰고 싶지도 않지만, 나도 #미투이기에 이슈 몰이만큼은 합승하지 않았다.

#미투에 대해 글을 쓰는 건 객관적일 수 없다. 차분히 생각을 가다듬고 비판적인 사고를 하더라도 개인적인 심정이 어찌 안 담기랴.

사는 동안 성희롱, 성추행 등 수십, 수백 번 성폭력을 당했다. 어렸을 때는 ‘여자의 삶은 원래 그렇게 사막을 삼킨 기분을 종종 느끼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수백 번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면 안 믿을 사람이 대부분일 거 같다. 진짜라고 믿는다 해도 성희롱이 대부분이며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할 것도 같다.

그러나 바늘 촉수처럼 선명하게 기억나는 여러 가지 괴로운 기억들은 아직도 망각하지 못하고 남아있다.

학교에서도, 또래 친구 사이에도, 직장에도, 업계에도, 길거리에도 #미투는 일어났다. 어린이 혹은 성인, 나이도 외모도 상관없다. 나이 많은 어른에게, 젊은이에게, 어린 친구에게, 이성에게, 동성에게 언제든지 당했다.

성폭력 가해자와 성폭력 사건을 알게 된 주변인들은 대부분 피해자를 탓한다. “네가 더 조심하지 그랬냐”, “너도 사실 좋아한 거 아니냐”, “왜 그 당시에는 안 그러더니 인제 와서 문제 삼느냐”, “싫다고 분명히 말했냐”, “방어를 에둘러 표현해서 상대방(가해자)을 헷갈릴 수도 있다”, “그러게 평소에 조신하게 다니지 그랬냐”, “피해자도 어느 정도 과실과 책임이 있다” 등 무수한 언어 2차 폭력이 가해진다.

그뿐이랴. 가해자가 그 이상 더 불행해지길 바라냐며, 선처와 사건을 무마하기를 종용한다. 현실은 피해자를 불쌍하게 바라볼 뿐, 가해자의 신변을 염려한다.

그런 현실을 마주할 때면, 그때 그 자리에 존재했던 내 잘못이 된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성폭력이라는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참 쉬운 논리가 소리 없이 종용된다.

여러 해 전, 밤길에 집까지 미행해 온 신원불명의 남자가 우리 집 베란다를 타고 올라와 빨래통에 있던 모든 속옷을 가로채 갔다. 또한, 내 방 창문으로 침입하려던 것이 미수로 끝났다. 그 이야기를 들은 주변인은 그날 ‘내 옷차림’에 관해 묻고, ‘왜 밤늦게 집에 갔느냐’고 나를 나무랐다.

누군가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신체를 제압하고, 시간과 사회적 이미지까지 제 입맛대로 구속했다. 헤어진 사람의 집과 직장 앞에서 감시하고 가는 곳마다 쫓아왔다. 폭력을 저질러 놓고 사랑이라고 말했다.

어릴 적, 수개월을 전화로 스토킹하며 야한 말, 지난 나의 일과까지 읊어대고, 겁박했던 스토커는 누구였을까. 그 당시 나는 저음의 허스키한 남자 목소리만 들으면 저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며 불안해했었다. 왜 나에게 이상한 관심을 두고 스토킹을 한 건지. 그리고 대체 누구인지. 평소에 나와 웃고 떠든 적이 있는 가까운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일면식조차 제대로 한 적 없는 사람이었을까 알 수 없다. 신원불명의 누군가가 나의 일상을 알고, 내게 거북한 성적 이야기를 해댄 자가 혹시 내 지인이었을까 봐, 아직도 생각하면 소름 끼친다.

전화 스토킹을 수개월 당했다고 하면, 내게 먼저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하다. 전화번호를 추적하든, 경찰에 신고하든 조치를 취하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적극적인 반항을 안 하는 동정 가치도 없는 피해자 취급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십대였다. 부모님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 힘들었다. 수치스럽고, 도리어 내가 혼이 날까 봐 무서웠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적인 조치를 할 수 없었다. 다만, 스스로 전화 온 시간에 함께 있거나, 알리바이가 확실한 남자를 배제하며 마음속으로 찾아 나섰을 뿐이다. 소극적이라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반항은 그 정도였다.

대개 성폭력 뒤에는 소극적인 반항뿐이었다. 적극적으로 반항을 한다면 즉, 나를 아프게 한 자들을 심판해주길 외부에 요구하다간 스스로 더 곤고해지기 때문이다. 그게 내가 겪은 현실이었다. 대개 미투에게 남는 건, 조용히 덮자는 종용과 성폭력 피해자라는 각인이 대부분일 거다. 그게 사람들의 인지 수준이며, 미투를 위한 애프터 체계가 없는 사회 현실이다.

성폭력 피해자는 언제나 승리할 수 없다. 가해자와 원만한 합의에 이르거나, 재판에서 승소하더라도 진정한 승리가 아니다. 마음속 흉터는 사라지지 않고, #미투가 당한 일이 없는 일이 되지도 않는다. 또한, 용기 내어 사회에서 피해자임을 인정받았음에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더 참혹한 현실은 승리는커녕 이차적 폭력·성폭력을 당하기 일쑤라는 거다.
 
#미투다. 승리하지도 않았지만, 패배하지도 않았다. 그저 살아남았고, 살아가고 있다. 진정 #미투 · #워드_미 운동에 동참하고 싶다면 ‘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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