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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사회
  • 입력 2012.10.13 10:27

민주주의와 선거의 의미 "대선에 즈음하여..."

유권자가 하나의 주체이며 단위임을 잊지 않는다. 그 전제를 말한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고양이들이 서열을 정하는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오로지 힘이다. 누가 더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가? 그래서 고양이들을 보면 항상 조용하다가도 시끄럽다. 털이 날리고 피가 튄다. 누구 하나는 다치고 도망쳐야 싸움이 끝이 난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사람은 곧잘 폭력에 의지해 자신의 욕구와 본능을 충족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강한 자가 선이고 약한 자가 악이다. 강한 자가 곧 옳은 것이며 약한 자는 틀린 것이다. 설사 그에 반대하려 해도 폭력으로 그것을 억누르고 만다. 목소리가 크고, 힘이 세고, 난폭하고 잔인한 성품을 지녔다.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람들은 그같은 원시적인 의사결정방식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서로 힘을 겨루다 보면 다치는 사람이 나온다. 피를 흘리고, 마침내는 불구가 되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람마저 나오게 된다. 개인으로서도 불행이지만 집단 전체에 있어서도 한 사람 분의 노동력과 전투력을 잃는다는 것은 큰 손실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그와 같은 일을 겪게 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대안을 제시한다. 대화로 풀어보자.

물론 그저 말 몇 마디로 해결을 보자는 안이한 생각은 아니다. 서로 세력을 모은다.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아 무리를 이룬다. 그리고 비교해 본다. 필경 머릿수도 더 많은 더 큰 무리가 서로 싸우더라도 승리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른바 다수결에 의한 합의제의 시작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이 언어를 가지고 이성으로써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

근대에 들어 누군가에 의해, 혹은 특정한 집단에 의해 어느 순간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의 전유물이었던 것만도 아니었다. 고대 신라에도 화백이라는 것이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선제후에 의해 왕이 선출되고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전근대의 정부라는 것도 전근대사회를 이루고 있던 유력자들의 합의기구에 가까웠다. 왕이라고 해서 대신을 함부로 죽이지 못했다. 권력을 가진 고위직의 관리란 필경 그를 따르는 다수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자기편을 늘리고 상대편을 줄인다. 그것이 정치의 기본전제였다. 그것이 단지 제도적으로 다듬어진 것이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였고 근대의 선거제도인 것이다.

당장 생각해 본다. 노동자의 권리를 우선한다. 사용자의 자유를 우선해 보장한다. 노동자에게 더 높은 임금과 처우를, 사용자가 보다 값싸게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자유를, 그것이 현장에서 충돌하는 것이 바로 파업이고 노동쟁의다. 과거 노동쟁의 현장에서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난무하고 있었다. 사용자는 자기의 이익을 지키려, 노동자는 최소한의 권리를 어떻게 해서든 확보하려, 목숨을 잃는 사람마저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정치인이 나선다.

"노동자에게 더 높은 임금과 복지를 보장하겠다."

그리고 다른 정치인이 나선다.

"사용자가 보다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그리고 사회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 앞에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피력한다. 어째서 그런가? 무엇때문에 그리해야 하는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만일 자신이 그것을 실제 실행에 옮기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그것을 이루려 하는가? 당사자는 물론 사회를 이루는 다른 제 3자에게까지 동의를 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동의를 통해 확보한 지지자를 동원하여 행동에 나서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선거다.

누가 옳은가? 누가 자기에게 궁극적으로 이익이 되는가? 누구에게 투표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자신과 사회 전체의 이익과 정의를 확대하는데 기여하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결정된 결과에 대해서는 선거에서 승리한 승자에게 강력한 정치적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그 실천에 있어 우선권을 주게 된다. 다수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으니 그 승리에 대한 댓가로서 우선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이다. 다수의 뜻이다. 다수가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설사 그것이 틀린 판단이었다 할지라도 지금으로서는 다수의 뜻을 존중하여 그들이 하는 바를 지켜본다. 아니면 싸움이다.

더 이상 굳이 피를 흘려가며 서로 부딪힐 이유란 없다. 자신들의 입장과 이익을 대변할 정치인을 선택해서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승자가 되도록 만든다. 그가 대신해서 해결해 줄 것이다. 사회 저변이 요구하는 바를 들어 누가 옳은가, 누구의 입장에 서야 하는가 판단하고 결정해 줄 것이다. 그것이 곧 법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행정이라고 하는 형대로 집행된다. 물론 이상적이다. 현실은 그렇게 무르지도 만만하지도 않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선거라고 하는 좋은 제도가 있음에도 아직도 현실에서는 많은 이해주체들이 물리적 충돌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서로 상처입고 상처입히고 심지어 서로 죽고 죽이고 있다. 그나마 그같은 주체들이 참가하는 선거라는 제도가 없었다면 현실이란 얼마나 참혹한 전장이 되어 있겠는가. 과거 프랑스대혁명이나 러시아혁명 역시 그렇게 서로 다른 이해주체들이 소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구비되어 있지 않은데 따른 폭발이었었다. 단지 빵을 원했고 삶의 안정을 원했다. 그러나 그런 민중의 목소리는 최고권력자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바로 총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란 무엇인가? 투표란 어떤 의미인가? 그저 이 사회를 위해서? 단지 이 나라를 위해서? 그래서 모두를 위한 누군가를 뽑는 것일까? 모두를 위해 좋은 정치를 할 누군가를 뽑아 올리는 자리인 것일까? 하지만 이 사회를 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나라를 위한다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 무엇보다 그것이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판단을 내리고 선택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오롯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누구의 편에 서고 누구에게 힘을 실어줄 것인가?

드라마 <추적자>의 마지막 선거장면을 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던 이유였다. 어째서 저 많은 유권자 가운데 강동윤의 정책을 지지해서 강동윤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하겠다는 사람이 다만 몇 사람이라도 전혀 보이고 있지 않았던 것일까? 단지 강동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고 있었다. 강동윤을 대신해 당선될 후보자에 대한 아무런 비판도 검증도 없이. 오로지 강동윤의 죄만 단죄할 수 있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대통령이 되어 어떤 정책를 펼치든 전혀 상관할 것이 없다는 뜻이었을까?

서회장이 말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답은 정답에 가까워진다고 하는 맥락을 생각해 본다. 모두가 한 가지 답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모두가 서로 다른 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답을 서로가 내놓는 가운데 그 안에서 어떤 공감하고 공유할만한 지점이 나타난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질서로 나타나게 되는 지점이다. 강동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다수의 답이 강동윤의 심판이라는 결론으로 모아지고 있어야 했었다. 그같은 고민이 사라져 있었다. 수많은 유권자란 단지 숫자의 하나에 불과했었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선거에 대한 가장 큰 치명적인 오해가 아니었을까?

민주주의라는 말의 뜻을 생각해야 한다. 국민이 주체가 되는 제도라는 것이다. 주체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중심이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판단한다. 내가 선택하고 결론을 내린다. 나 자신이 민주주의를 이루는 하나의 단위다. 그 단위들이 모여서 이 사회를 만들고 이 사회를 이끌어간다. 때로는 틀린 길도 가고 어긋난 길에서 헤매기도 하지만 결국은 다수가 원하는 그 길을 찾아 느리더라도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도 아니라.

어째서 한국 국민들은 그토록 여의도정치를 싫어하는가? 어째서 민주주의의 근간인 정당정치를 혐오하며 부정하려고만 드는가? 싸우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들 역시 하나의 단위일 것이므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졌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졌다. 이해마저 엇갈린다. 그래서 싸운다. 그들의 싸움은 국회를 넘어 유권자가 있는 유세장에까지 이어진다. 하나의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모두를 위한. 그래서 당선이 유력한 사람에게 투표한다는 행위도 가능해진다. 누가 당선되든 그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 무엇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다.

자신은 이미 전장에 서 있는 것이다. 내 땅과 내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내 가문과 내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자신과 입장이 같고 이해가 맞는 다른 제후들과 손을 잡고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힘겨루기에 들어간다. 반드시 승리하여 내가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을 지켜내고야 말 것이다. 공약을 살피고 후보자 개인의 성향을 꼼꼼히 훑어본다. 과연 어떤 후보자가 자신에게도 이익이 될 것인가? 자기와 같은 입장에서 같은 전선에 서게 될 것인가? 국가와 국민은 잊는다. 단지 결과적으로 보다 많은 나의 이익이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될 것이다.

선거는 정의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어떤 공공의 보편적 이익이나 상식을 관철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결과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정의롭기도 하고,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이기도 하다. 명분이야 천하의 안녕을 위한다지만 전쟁을 일으키는 대다수는 자기의 입장과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내게 손해가 되고 피해가 온다면 그것은 결코 정의도 상식도 아니다. 다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이기든 지든 충실히 승복한다.

사실 그게 전제되어야 한다. 승복하는 것. 선거의 결과를 온전히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승자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승자에게 그같은 권리가 결과적으로 주어졌음을.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 일단 지켜보며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준다. 화가 난다. 약이 오른다. 저건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어쩌겠는가? 지지 않기 위해라도 더욱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다.

국가와 국민이 아니다. 정치인 자신도 아니다. 나 자신이다. 그래서 나 자신이 올곧게 자신을 중심에 두고 판단할 때 정치인도 자신을 위해 정책을 만들고 공약을 내세운다. 카페왕조가 결국 프랑스의 왕위를 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제후들에게 약속한 나머지 거의 빈털털이가 되어 빛좋은 개살구꼴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거래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해, 자신을 중심에 둔 사회 전체를 위해 이익이 되기를 바란다.

기본일 것이다. 선거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렇게 하릴없이 낭만적이고 온유한 무르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다. 더 치열하고 냉혹한 전장이 그곳에 있다. 일단 표를 주고 반대하면 된다. 누가 되었든 결국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할 것이다. 더 큰 사람이 더 큰 일을 한다. 선거의 결과야 어찌되었든 우리는 모두 하나 같은 편이다. 그럼에도 사용자가 임금을 더 적게 주려 할 때 노동자는 더 많은 임금을 받기를 원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그들은 같은 편이 될까? 그래서 그들은 산업현장을 전장삼아 서로 부딪히곤 한다.

선거가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쓸데없는 걱정이 늘고 있다. 특정 후보의 발언 역시 필자의 걱정을 더욱 키우고 있다. 선거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해 전혀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다. 사회는 거대화되고 있다. 과거 작은 부족단위로 나뉘어졌던 것이 그 수백배, 수만배, 그 이상의 거대사회로 첨예화되고 있다. 결코 하나로 녹아들 수 없는 다양한 요소들이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다. 그것을 하나로 만든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망상이다.

자신의 위치를 먼저 살핀다. 자신에게 무엇이 이익이 되고 무엇을 우선해 추구하는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성향에 가장 가까운 후보자를 찾는다. 이 사람이라면 믿고 함게 싸워볼 수 있겠다. 주인이 되어 그를 선택한다. 섬길 군주를 찾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이 직접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진다. 질 수밖에 없다.

어렵다. 이 땅에 민주주의라는 것이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 3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도 부족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도 충분치 못하다.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그래서 더욱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 현명한 선택을 기대해 본다. 당신이 곧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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