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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10.09 10:50

마의 "시대의 선구자 백광현, 안이함과 진부함에 갇히다."

뻔하고 흔한 이야기, 백광현의 특별함이 아쉽다.

▲ 사진제공=imbc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실제 역사에 기록된 백광현의 모습은 원래 말을 치료하는 마의였다가 말을 치료하면서 쌓은 외과적 경험과 기술들을 사람의 종기를 치료하는데 적용함으로써 최초로 전통의 한방의학에 외과적 치료방법을 도입한 선구적 존재로 그려지고 있었다. 비천한 마의의 신분에서 오로지 의술 하나만으로 내의원에 들어가 임금을 치료하는 어의가 되었고, 마침내는 중추원부사 숭록대부의 벼슬까지 내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가 양반 - 그것도 도성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의 후예라는 이야기는 쓰여져 있지 않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백광현은 기록에도 없는 도성 최고의 명문가를 배경으로 두어야 했던 것일까? 아버지는 명문의 후예로 인품과 재주가 출중했던 강도준이었다. 그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에 휘말려 집안과 함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백광현이 아버지의 성인 강씨가 아닌 백씨의 성을 쓰게 된 이유였고, 굳이 비천한 마의로서 살아가게 되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명문의 후예로써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백광현이 아니면 드라마는 성립할 수 없었던 것일까? 단지 보잘 것 없는 하층민의 출신으로 그 재주와 포부가 뛰어나서 성공을 이루었다고 하면 안되는 것일까?

피는 못 속인다. 종자가 다르다. 그래도 내의원이 되어 임금을 치료하는 어의이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관작이 중추원부사에 숭록대부에까지 이르렀다. 당대에 그를 신의라고까지 부르고 있었다. 특별한 인물에게는 특별한 출생이 따른다. 견훤은 지렁이에게서 태어났으며, 주몽과 박혁거세는 알에서 깨어났다. 고려의 왕실은 거슬러 올라가면 난을 피해 한반도까지 흘러왔던 당나라 황제와 만나게 된다. 그런 대단한 신분에 대단한 일을 이루어낸 사람이라면 남들과 다른 특별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한반도는 지배층의 교체 없이 거의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이어져오고 있었다. 출신에 대한 믿음이 어느 사회보다도 확고하다.

출생의 비밀이 있으니 그에 따른 음모가 얽힌다. 단지 말을 치료하던 마의가 그 경험과 기술을 활용해 사람을 치료하는 최고의 의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고의 의사가 되어 모두로부터 인정받고 입신양명을 이루는 입지전의 일대기만이 아니다. 물론 시대를 살았으니 역사와 아주 무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역사란 정치와 권력의 욕망과 사정에 의한 역사다. 그에 따른 한과 증오의 역사다. 사람을 치료하고 살리는 의사로서의 본분 위에 출생에 얽힌 근원적인 한과 분노가 아로새겨져 있다. 의사로서 이명환(손창민 분)과 맞서는 것이 아닌 두 아버지를 모두 죽음으로 몰아간 원수로서 맞서게 되는 것이다. 아니라면 이제까지의 내용은 차라리 사족에 가깝다. 의사라고 하는 본분과 의술이라고 하는 본질은 단지 그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쓰여지고 말 것이다.

남다른 출생의 비밀과 그 비밀과 얽힌 사연과 배경들, 그리고 그로 인한 현재의 사건들. 전형적이다. 전혀 아무런 상상력도 의지나 노력도 보이지 않는 진부하고 안이하기 짝이 없는 설정일 것이다. 하기는 아역들이 보이는 모험 또한 마찬가지다. 어째서 거기에서 백광현은 어린 강지녕(아역 노정의)을 만나야 했으며, 또 하필 이명환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에 위험에 빠지는가? 그리고 다시 그것은 백광현의 양부를 죽이는 결과를 낳고 만다. 백광현의 양부와 강지녕이 마지막에 서로 만난다. 신파다. 어려서 바뀐 두 아이는 그렇게 서로 엇갈려 강지녕은 백광현의 자리로, 백광현은 다시 한을 품고 먼 세월을 떠돌게 된다. 그들은 다시 만날 것이다. 그를 위해 일부러 만든 자리인 셈이다. 작위라 부른다.

물론 <마의> 하나만 따로 떼어 놓고 본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제법 드라마적인 재미가 있다. 그러나 이미 <대장금>이 있었다. <대장금> 역시 요리와 의술이 궁궐내 정치적 사정과 얽히며 드라마적인 재미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가까이는 많은 무협소설들이 비슷한 플롯을 취하고 있었다. 고귀한 출생과 비천한 신분으로의 전락, 그리고 출생의 비밀과 그와 얽힌 음모와 원한들. 단지 드라마 <마의>는 천하제일의 무공 대신 천하제일의 의술을 주인공의 손에 쥐어주었을 뿐이다. 의술만 가지고는 원수를 죽일 수 없기에 왕이라는 최고의 권력자를 그의 배후에 두었다. 굳이 의원일 필요가 없었다. 최고의 의술을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도살자였어도 상관없고, 무수리였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결국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일 게다. 의사가 주인공인데 의사로서의 의술보다 사람으로서의 감정과 욕망이 우선한다. 의사도 사람이다. 의술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편이다. 그래서 어떤 장르든, 어떤 소재의 드라마든 내용은 한결같다. 시대만 바꾸고 배경만 바꾸면, 그리고 몇 가지 설정만 바꾸면 모두는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백광현이라는 선구적 인물을 앞세워 결국은 자신들이 상상할 수 있는 흔한 보통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려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최고의 의술이라고 하는 무기를 손에 넣게 되면 어떻게 행동할까? 욕망을 추구하고 한풀이를 하려 한다.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참 아쉽다. 좋은 소재다. 17세기라면 유럽에서 병의 근원을 치료한다고 태양왕 루이14세의 입천정을 몽땅 드러내던 무렵이었다. 18세기 독일의 한 의사는 프리드리히 2세의 임신을 진단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미라들이 만병통치약으로써 가루가 내어져 유럽에 팔리고 있었다. 바로 그 시대 조선에는 백광현이 있었다. 말을 고치는 의사로서 사람을 고치는 보다 진일보한 방법을 제시한 선구자였다. 그것이 배신과 음모와 복수에 먹히고 만다. 흔하고 진부한 이야기에 먹혀 퇴색되고 만다. 어디에 신의라고까지 불린 마의 백광현이 있는가.

너무 안이했던 것은 아닐까. 이미 거둔 성공에 갇혀 버리고 만 것은 아닌가. 노력이 필요했다.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했다. 자신이 만든 틀을 깰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답습하고 있는 진부한 반복이다. 굳이 아역을 등장시켜서 무리한 이야기를 끌고간 것은 아역에 기대어 성공을 거둔 기존의 다른 많은 드라마들을 의식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없어도 되는 부분이었다. 지루하고 지겨웠다. 그나마 기대가 실망을 넘어 절망으로 바뀐다. 백광현의 이름이 어설픈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아쉽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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