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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5.19 08:49

최고의 사랑 "김유정의 동백꽃, 늙은 소년소녀..."

유쾌한 패러디가 돋보이는 한 편의 멋진 동화...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을 이런식으로도 재해석해서 활용할 수 있구나.

“제목은! 동! 백! 꽃!”

“주인공은 참 괜찮은 애야. 집안도 좋고 인물도 좋고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아주 괜찮은 아이지. 그 괜찮은 애가 어쩌다가 동네 찌질이를 좋게 보게 됐어.”

“그래, 아주 찌질하고 구질구질하게 생긴 녀석이야.”

“어쨌든! 주인공은 그 녀석에게 마음을 담아서 아주 맛나게 생긴 찐감자를 내밀었어. 그런데 그 찌질이 녀석이 주제도 모르고 그 감자를 거절한 거야. 주인공 마음이 어땠겠어? 그냥 민망하고 어색한 정도는 아니었겠지?”

“그 찌질이한테는 소중하게 여기는 닭이 한 마리 있었어. 그래, 닭!”

“소중하게 내민 감자를 거절당한 주인공은 그 찌질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닭을 괴롭혔어. 마구마구! 거침없이! 처절하게!”

“그 찌질이가 찌질찌질하게 울면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게 돼. 활활 타오르는 동백꽃 아래에서.”

“나는 지금 열심히 찾고 있어, 구애정! 너의 닭이 과연 무얼까?”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다. 독고진(차승원 분)이 말한 괜찮은 주인공이란 원래는 주인공인 ‘나’를 짝사랑하던 지주집 계집아이 점순이이고, 그 점순이가 좋아하던 찌질이가 주인공인 ‘나’였다. 대략의 내용은 독고진이 말한 대로 성별만 바꿔서 주인공 ‘나’를 좋아하는 점순이가 대쉬를 하는데 그것을 받아주지 않자 ‘나’의 집에서 기르는 얼마 안 되는 닭을 괴롭힌다. 이에 ‘나’는 화가 나서 점순이네 큰 수탉을 죽여 버리는데...

구애정이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서 소설의 내용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이후의 내용이 마치 춘향전의 한 장면처럼 패러디되어 등장하고 있다. 원래 ‘동백꽃’이 성인소설이었던가? ‘동백꽃’의 마지막 장면을 성인용 이야기로 해석하는 감각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아무튼 정작 점순이가 ‘나’의 닭을 괴롭히다가 오히려 ‘나’에 의해 자신의 닭이 죽는 장면에서 이것이 어떤 암시이거나 복선이 아닐까. 정작 독고진의 닭이 죽을 수도 있다는. 아닐까?

그러고 보면 구애정(공효진 분)이 독고진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두 사람 사이에 인지도나 명성에서 너무 큰 격차가 있기에 그로 인해 자칫 잘못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상당히 적확하게 인용하여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대로라면 독고진이 구애정의 닭을 찾아 괴롭히기 전에 구애정이 독고진의 닭을 죽여 버릴 수 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지주의 딸이라고 하는 현실적 문제 때문에 조심할 수밖에 없는 ‘동백꽃’의 주인공과 너무나 대단한 스타이기에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는 구애정, 점순이의 닭을 죽이고서 겨우 소작을 붙이던 땅을 빼앗기고 쫓겨날 것을 걱정해야 했던 ‘나’와 마찬가지로 구애정 역시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톱스타와의 사랑이라는 꿈에 빠져들기엔 그녀를 둘러싼 여건들이 너무 각박하다. 독고진에게 사랑이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두면 되는 이기의 문제라면 구애정에게 사랑이란 당장의 현실의 문제다.

“저는요 독고진씨, 꿈꾸면서 설레고 싶지 않아요. 눈 똑바로 뜨고 열심히 살아야 하거든요.”

하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정작 내가 마음이 없는데. 전혀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두근거림도 없고 설렘도 없고 떨림도 없고. 아무리 대스타 독고진이라도 마음이 없는데 좋아한다 고백했다고 냉큼 자기도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독고진에게 전혀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스스로 독고진이기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인가. 그보다는 각박한 일상이 그녀로 하여금 더욱 엄격하게 다그치고 조이도록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지치고 치이고 주눅 들어서. 차 안에서 물을 쏟고 독고진이 건넨 수건으로 먼저 자기보다 차를 닦는 그 장면에서처럼.

“그래요, 무서워요. 괴롭히는 것 피하지도 않고, 사실 괴롭지도 않은 내가 너무 무서워요. 나는요, 정말로 진짜로 쿨하고 싶어요. 내가 10년 동안 얼마나 많이 데이면서 배웠는데. 이 나이에 괜히 설레다가 그것 홀라당 다 까먹을까봐 무섭다구요. 독고진씨는 나에게 열받아서 무서운 것 모르는 모양인데 그러다 내가 붙잡으려 들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소설과 드라마가 다른 점일 것이다. 분명 점순이의 사랑은 독고진의 사랑과 닮아 있다. 아마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게다. 사춘기 소녀의 풋내나는 첫사랑과 마찬가지로 독고진의 사랑 역시 철없이 맹목적이고 이기적이다. 그에 반해 구애정은 주인공 ‘나’와는 달리 이미 어른이다. 많은 것을 겪었고 그래서 항상 많은 것을 생각하고 조심한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만 충실할 수 없다는 뜻이다. 독고진에 대한 감정도 없지만 설사 감정이 생기려 해도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

아니 사실 감정이 아주 없지는 않다. 괴롭히는 것을 피하지도 않고, 그리고 괴롭힌다고 괴롭지도 않다. 독고진의 감정에 대한 불편함이 독고진에게 아주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쩔 수 없이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일 테니까. 그러나 소작을 붙여먹는 지주의 딸이라는 현실의 한계 때문에 사릴 수밖에 없는 ‘나’와 마찬가지로 구애정 역시 그런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그녀의 두려움이고 그녀의 현실인식이며 어른으로서의 그녀가 깨달은 경험이고 지혜다.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비상하게 구애정이 독고진보다 성숙하게 보이는 것은 그래서다. 그녀의 표정에는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정말 명장면이었다. 순간 무릎을 탁 치며 감탄하고 말았다. 아예 심야에 유원지를 통째로 빌려서는 고백 아닌 자백을 하는 독고진의 스케일에, 그것을 오히려 쿨하게 거부하는 구애정의 현실적인 반응에,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사가 매우 은유적이고 심오하게 각자의 감정을, 앞으로에 대한 복선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그 가운데 김유정의 ‘동백꽃’에 대한 인용은 김유정의 소설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가히 탁월하다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 순수하고 유쾌한 토속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런 불순한 성인스런 이야기로 각색하여 보여 줄 수 있는가? 그 마지막 장면이 그렇게도 해석될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더불어 작가의 센스에 감탄하게 된다.

유인나(강세리 역)는 역시 악역은 못 되는 모양이다. 겨우 몇 번 독한 모습을 보여주는가 싶더니 윤필주(윤계상 분)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귀여운 모습을 보여준다. 촬영 전날에는 물로 함부로 안 마신다던 그녀가 윤필주 앞에서 체면 불구하고 한 젓가락만 하다가 라면과 볶음김치를 다 먹어치우고 마는 모습이란. 더구나 결국 자기가 다 먹고 나서도 오히려 윤필주에게 탓을 돌리는 모습은 얼마나 애교스러운가. 아무래도 악역을 맡기에는 그녀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아직 두께가 부족하다.

기껏 공들여 준비한 선상데이트에 구애정이 걸릴 것을 걱정하며, 설사 걸리더라도 구애정에게 망가질 것을 요구하려는 극중 연예버라이어티 <커플메이킹>의 스태프들을 보면서 무언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윤필주의 모습도 귀엽기는 마찬가지였다. 윤계상 역시 서른을 넘어선 나이일 텐데. 그러나 아직 소년처럼 볼에 바람을 넣고 턱을 치켜들고 있는 모습이 앳띠게 귀엽게만 보인다. 윤필주 역시 독고진과 마찬가지로 철늦은 소년의 컨셉일까?

“그런 아들을 낳으려면 그런 남자와 결혼해야 할 텐데...”

물론 윤필주의 그런 소심한 고백은 무심한 구애정에게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자신감에 넘치는 강세리와는 달리 구애정은 윤필주같은 완벽한 남자가 자기를 좋아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 자체를 전혀 믿지 않는다. 독고진과는 달리 상당히 소심하다는 점이 윤필주를 끝내 조역으로 머물게 하려는 모양이다. 강세리와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발전될까? 순수하고 성실한 만큼 보여지는 허술한 모습이 아마 이제까지 윤계상이 맡은 배역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남자가 보기에도 귀엽기만 하다.

아무튼 독고진의 고백을 계기로 독고진과 구애정의 관계가 급격한 진전을 이루며 드라마가 급물살을 이루기 시작했는데, 구애정에 관심이 있던 윤필주는 그로 인해 독고진을 의식하며 보다 구애정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게 되고, 독고진의 명목상 연인이며 윤필주에게 관심이 있는 강세리 역시 가만히 있지는 못할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맹목과 이기로 교활하고 치사하다 할 정도로 저돌적으로 다가서려는 독고진 앞에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구애정의 현실적 선택이 충돌하며 헤프닝을 만들고. 그것이 주위로 확산되며 어쩌면 결말이 예정되어 있을 로맨틱 코미디에서 전혀 흥미를 잃지 않고 드라마를 지켜보게 만든다.

어째서 차승원인가? 어째서 공효진인가? 이렇게 망가지면서도 멋있는 배우는 드물다. 우울하면서도 해맑을 수 있는 배우도 흔치 않다. 마치 소년과 소녀 같아. 어쩌면 디테일해서 우울하기까지 한 현실의 이야기 속에 소년과 소녀 같이 보는 것이 즐겁기만 하다. 마치 한 편의 동화같다고나 할까? 첨예한 현실 속의 꿈같은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야기.

역시 ‘동백꽃’을 인용하고 만 이유일 것이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모두가 소년이고 소녀이다. 유인나가 그러하듯. 윤계상이 그러하듯. 동백꽃과도 봄봄과도 그렇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늦은 봄비처럼 시원해지는 그런 이야기였다. 기대하게 된다. 기분이 좋아지는 드라마다.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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