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영화
  • 입력 2012.09.09 21:04

김기덕 감독의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에 붙여...

보는 이를 고통스럽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그 비주류스러움을 말하다.

▲ 사진제공=NEW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언어에는 보고와 청원 두 가지 기능이 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보고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고, 청원은 상대의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고란 이성에 작용하고 청원이란 감정에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보고란 고발로 이어지고, 청원은 선전과 선동으로 이어진다.

창작이란 곧 표현의 수단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적극적인 수단일 것이다. 말이나 몸짓 등 1차적인 기호로써 표현하지 못할 것을 창작을 통해 보다 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창작이란 언어가 갖는 그같은 기능들을 보다 극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림같다'라는 표현이 그 한 예일 것이다. 그림이란 이미 있는 풍경을 그리는 것이지만, 그러나 일상의 풍경 가운데서도 가작 극적인 순간을 화폭에 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게 묘사되고는 한다. 사람들의 감정적 정서적 동의를 구하기 위한 목적에서다. 그런 그림을 사람들은 아름답다며 칭찬한다. 그런 그림들이 잘 팔리기도 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근대 이전 유럽의 많은 종교지도자들과 그에 동조한 예술가들은 지옥을 묘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보다 끔찍하게. 보다 혐오스럽게. 그것은 종교적인 메시지를 대중에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것은 또다른 쾌락의 수단이기도 했다. 악덕과 죄를 저지른 이들이 지옥에서 고통속에 신음하며 징벌받는다. 다만 보는 순간 그것이 즐겁냐고 한다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결국 대중예술이란 이같은 언어적 기능을 종합한 두 가지 목적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고통이고, 다른 하나는 쾌락이다. 이것은 고대그리스의 희비극론과도 닿아 있다. 희극은 현실의 모순을 희롱하고, 비극은 그 모순을 고발한다. 조롱당하는 현실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보며 사람들은 기쁨을 얻고, 보다 첨예하게 극적으로 고발되는 그런 모습들에 공감하며 감정적 정화를 얻는다. 같은 대중예술이더라도 전자가 이후에 얻어질 쾌락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후자는 그 진실을 보다 직접적으로 마주함으로써 얻는 어떤 자각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비극은 그 순간 보는 이조차 무척 고통스럽다.

오히려 현대에 이르러 예술이 갖는 불쾌감과 고통은 극대화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자본과 미디어의 발달은 대중예술에서 보다 쾌락적 요소를 더욱 강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헐리우드 영화에 비극은 없다. TV드라마에도 절망이나 좌절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이 바라고 즐기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닌 까닭이다. 자본은 소비자인 대중을 창작의 위에 두었고, 대중을 위해 봉사하는 대중예술은 철저히 그같은 대중의 욕구에 봉사한다.

하지만 보다 발달한 인간의 이성은 끊임없이 창작을 통해 인간의 불편함을 자극해왔다. 인간이란 누구이고, 무엇이며, 인간이 사는 사회란 과연 어떠한 곳인가? 인간의 이성과 윤리, 보편적 상식조차 도전받고 조롱당한다. 어차피 사람이 사는 세상이란 모순투성이일 수밖에 없기에 그것을 솔직하게 고발함으로써 이성적 자각을 일깨우려 한다. 하지만 주류는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같은 고통을 쉽게 참아내지 못한다.

아마 김기덕 감독에 대한 여러 논란들의 이유일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는 여성이 없다. 하지만 남성도 없다. 인간이란 없다. 극단화된 캐릭터들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캐릭터들은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따로 존재한다. 대화를 나누지만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고립된 채 자신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할 뿐이다. 그런 그들이 서로 소통하는 수단은 단 하나, 파격과 극단 뿐이다. 마치 생살을 꼬집어 현실인가의 여부를 깨닫듯. 극단의 상황 속에 살을 헤집어 고통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이 살아있는가를 확인하듯.

그래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면 불편하다. 고통스럽다. 아마 그것이 전혀 남의 이야기였다면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들이 특히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여성의 현실인 때문이다. 아니 인간의 현실이다.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를 바닥으로 끌어내려 절망에 신음하게 만들고서야 비로소 만족하는 인간의 심리다. 주로 연예인에 대해 흔히 나타나는 대중의 심리일 것이다. 손에 닿을 수 없는 대단한 존재들이기에 그들의 악의란 때로 정의롭고 매우 도덕적이다. 절박하기까지 하다.

김기덕 감독이 지나온 심상치 않은 인생유전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의 하층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고단하지만 그래도 인정도 많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이 모여사는 동네에 한 번만 가봤어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이란 도태를 뜻한다. 추락이며 절망을 뜻한다.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올라갈 곳도 없는 단절의 현장이다. <나쁜 남자>에서 조재현이 서원이 성매매하는 것을 남몰래 지켜보는 것이 그것을 상징한다. 심장을 헤비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같은 인간이지만 그렇게 조재현과 서원 사이에는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깊은 단절의 벽이 존재한다. 여전히.

최근의 영화들은 그나마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알아가는 것 같다. 부드러워졌고 세련되어졌다. 더 이상 전처럼 극단의 표현을 쓰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김기덕 감독의 나이도 웬만하다. 세상을 알았고, 나름대로 성공한 감독으로서 입지도 굳혔다. 국내에서만 흥행이 안될 뿐 세계적으로 그의 명성은 높다. 이제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까지 받았다. 전처럼 단절된 자신 안에서 웅크리고만 있을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예술의 목적이다. 대중을 불편케 하는가? 고통스럽게 하는가? 그러나 자본은 대중을 기쁘게 하라 가르치고 있었다. 부쩍 높아진 소비자로서의 대중의 지위는 대중의 욕구에 충실하라 요구하게 되었다. 그것을 당연스럽게 여긴다. 대중예술이란 대중을 즐겁게 만드는 오락적 도구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그같은 경향이 강하다.

TV드라마에서 조금만 현실을 불편하게 묘사해도 바로 '막장'이라는 말이 튀어 나온다. 그 상황이 말도 안되게 극단적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보기에 불편하고 불쾌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창작의 엔터테이너적인 기능만을 요구한다. 반면 창작자를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으로 우러른 것은 바로 그같은 고통과 불편함을 통해 대중을 일깨우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이다. 과연 대중은 그같은 고통과 불편함을 정면으로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실 필자 역시 그같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필자가 그래서 코미디를 잘 보지 못한다. 코미디란 말했듯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희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웃음을 위해 보다 극단으로 첨예하게 묘사되는 모순과 부조리란 때로 필자를 무척 불편하게 만든다. 인간의 신체를 희롱하고, 성을 조롱하고, 가난이나 장애를 비하한다. 우습지만 불편하다. 보고 있으면 마음을 옭죄는 것이 있어 김기덕 감독의 영화도 극장에서는 보지 못한다. 집에서 멈췄다 재생했다를 반복하며 겨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김기덕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 황급사자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듣고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과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김기덕의 영화는 한국대중으로부터 외면받게 되거나, 아니면 베니스의 권위를 빌어 그의 영화를 제대로 이해해보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되거나. 권위가 좋은 것은 바로 그래서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워도 권위에 이끌려 끝까지 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이가 나타나게 된다.

한국의 현실이 만든 괴물일 것이다. 그가 겪어온 심상치 않은 현실이 그의 영화를 만들었다. 처음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이 32살이었다고 했다. 그의 영화를 정의하는 것은 이전의 다른 유명한 감독의 영화가 아니다. 그가 지나쳐 온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의 관객들에게는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불편하기만 한. 수상을 축하한다.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다. 만일 그가 행복한 삶을 살았었다면 김기덕이라는 감독은 없었을 것이다. 무척 다행스러우면서도.

김기덕 감독의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다. 개인에게는 영광이겠지만 한국과 한국사회에도 기쁨인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한국영화계의 주변이 세계영화의 주류로부터 인정받았다. 그 상황이 묘하게 코미디스럽다. 다시 한 번 축하한다. 진심으로.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