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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9.06 09:28

각시탈 "비극의 시대의 모순된 선과 순수, 각시탈 마지막 위기를 맞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닥친 가장 큰 위기, 비극의 시대에 선 영웅의 마지막을 기다리다.

▲ 사진제공=블리스미디어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목단이만 있으면... 아니 에스더만 내 옆에 있으면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아이들과 함께 풍금치던 그 시절로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안타까운 선량함이다. 그리고 서글픈 순수함이다.

누군가의 아들이다. 누군가의 동생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형이 죽었다. 그리고 이제 같은 사람에게 아버지마저 목숨을 잃었다. 그 분노와 원통함을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어긋난 것을 바로잡으려 한다. 그 모든 일들의 원흉을 잡아 죄를 물음으로써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려 한다.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려 한다. 오목단(진세연 분)이란 짝사랑에 설레어하던 그 시절의 자신 대신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그녀를 그때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자신은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안된다. 아니면 지금껏 그를 지탱해 온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허물어지고 말 테니까.

누구를 탓하겠는가? 친혈육인 형인가? 아니면 자신을 낳아주신 아버지인가? 그도 아니면 조국인 일본인가? 누군가에게 잘못이 있다. 누군가가 이 모든 원인을 제공했다. 형도, 아버지도, 조국인 일본도 잘못이 없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잘못이 있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소수다. 전체 조선인 가운데서도 일부에 불과하다.

물론 나중에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소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소외감을 느껴야 했다. 거물 친일파를 아버지로 둔 이해석(최대훈 분)이나, 돈에 매수되어 경찰을 위해 오목단의 주위를 감시하며 정보를 제공하던 끄나풀 계순(서윤아 분)이나, 심지어 평소 알고 지내던 오목단의 양어머니 오동년(이경실 분)이 자신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조선인이고 자신은 일본인이다. 자신은 일본인이고 그들은 조선인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신의 조국이 말하는대로 내선일체만 이루어진다면 일본인과 조선인의 구분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저들로부터 소외당하지 않아도 된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저들끼리만 무리짓지 않아도 된다. 역시 정상으로 되돌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본인인 자신이 조선인인 저들과 어울릴 수 있던 그때로. 모든 것은 굳이 조선과 일본을 구분지으려는 그들 때문이다.

소학교 교사다. 물론 초등학교 교사를 비하하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 만큼이나 어리고 순수하다. 그 분노 또한 그만큼 어리고 순수할 수밖에 없다. 단순하다. 형이 죽었다. 아버지가 죽었다. 오목단이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배척하려 한다. 바로 보이는 현상 그 자체에만 반응하려 한다. 더 이상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보이고 들리는 그대로의 사실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만다. 형이 죽었으니 원수이고, 아버지가 죽었으니 갚아야 한다. 다시 자기가 아는 원래로 되돌려야 한다.

각시탈만 죽이면. 양백(김명곤 분)과 동진(박성웅 분)만 잡아없앨 수 있으면. 오목단의 친아버지인 것을 알면서도 담사리(전노민 분)를 죽이면 다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 그 순수함이 소름끼칠 정도다. 저들만 죽이면. 이 모든 일들의 원흉인 저들만 제거할 수 있으면. 하지만 자신도 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각시탈이 아버지를 죽였다. 이강토가 각시탈이 되어 나타나 아버지를 죽이고 달아났다. 우에노 리에(=채홍주, 한채아 분)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강토가 각시탈인 것을 알면서도 그를 위해 숨겨오고 있었다. 아마 우에노 리에가 조금만 더 일찍 이강토의 정체를 자신들에 알렸다면 오래전 이강토를 체포하여 이후의 일들을 미연에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자신의 아버지는 죽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녀 또한 공범이다.

하지만 기무라 슌지는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그녀를 보호하려든다. 그녀는 자신과 닮았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에 입양된 우에노 주리와, 일본인으로서 오히려 조선인에 애정을 느꼈던 자신과. 그리고 조선인이기에 일본인인 키쇼카이의 회장 우에노 히데키(전국환 분)에게 제거되려는 그녀의 모습이 일본인이기에 조선인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고작 이강토의 정체를 감춰준 것이 이 모든 일들의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라는 것도 그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되돌리기 힘들다.

결국 그대로 갈 수밖에 없다. 자신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이제까지 자기가 해 온 일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순수를 원하고 정상을 원한다. 지금의 현실은 순수하지도 정상적이지도 못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순수하지 못하다. 누구 때문일까? 그에 대한 원망까지 결국 각시탈에게로 쏟아진다. 다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그의 원망과 증오가 각시탈 이강토에게로만 흐르고 만다. 양백과 동진조차 그에게는 곁가지다. 이강토를 죽여야 한다. 혼란스런 그가 찾아낸 유일한 해답의 열쇠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각시탈의 비중이 줄었다. 당연하다. 드라마다. 드라마란 갈등이다. 긴장이다. 충돌이며 격정이다. 이제 각시탈 이강토는 평온하다. 처음에는 형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조선인들의 처지에 대한 불만이며 분노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충돌하지 않는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의 경찰제복을 입고 있다고 하는 모순마저 경찰에 정체를 들키고 도망나옴으로써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저 오로지 양백과 동진이 추구하는 봉기를 위해 최선을 다해 도우면 그 뿐이다. 오목단과도 오해가 사라지며 이제는 결혼까지 앞두고 있다. 더 이상 무엇을 보여줄까?

반면 기무라 슌지는 아직 보여줄 것이 많다. 고민하고 갈등하는 만큼,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의 모순과 싸우며 답을 내지 못하는 혼란스러워하는 모습 만큼이나. 그러면서도 결국 모순 속에 하나의 답을 쫓아 때로 자신마저 배신하려 하고 있다. 불행한 시대에 선량함이란, 그리고 순수함이란, 어떻게 선량하고 순수한 채로도 악의로써 나타나는가. 유대인을 앞장서서 학살했던 독일인 가운데도 선량한 가장이 있었을 것이고, 흑인을 차별하던 백인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아이와 같은 순수를 간직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분노는 정의가 아니다. 원망도 정의가 아니다. 그 시작은 될 수 있다. 어째서 형은 죽어야 했는가? 어째서 친구인 이강토의 손에 의해 아버지는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어째서 일본인인 자신은 조선인인 지인들로부터 배척받아야 하는가? 오목단은 어째서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거부하려고만 하는가? 하지만 그 답이 자신의 현실과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자신의 양심과 이성마저 배반하고 만다. 순수해서 순수하지 못하고, 선량해서 선량해지지 못한다. 이성의 단호함에는 인정마저 배제한 무심함이 필요하다.

그러면 물을 것이다. 이강토는 무엇이 다른가? 그것이 절박함이다. 그렇게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벼랑에서 자신을 떠밀려 하는데 달리 생각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말이다. 그저 발버둥치는 것이다. 발악하며 저항하는 것 뿐이다. 오목단에게 건넨 풀반지처럼 그의 정의란 그렇게 다른 여지 없이 직접적으로 부딪힌다. 그에 비하면 기무라 슌지는 한참 여유로운 상황에 놓여 있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

일본인들에게 묻는 것이다. 과거사를 이유로 오히려 한국인들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일본인들에 대해. 그들은 지금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가? 무엇을 원망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한국인 자신에게도 묻고 있는 것이다. 지금 자신은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을 원망하고 있는가? 그저 쉽게 간편한 방법으로 감정을 배설함으로써 모순을 덮으려는 시도는 않고 있는가? 과거 일본제국주의가 그러했듯 우리 자신도 이제는 그같은 모순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자신은 기무라 슌지와 같은 괴물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 자신조차 모르게.

"당신 바보 아니야?"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큰 위기가 찾아온다. 가장 큰 기회 가운데 가장 비참한 진실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된다. 절망의 시대다. 공포보다 강한 감정은 드물다. 공포 앞에 강해질 수 있는 사람도 또한 드물다. 공포를 이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보다 더 큰 공포다. 고문에 굴복했다고 그를 나약하다 비겁하다 말할 수 있을까?

타샤(지서윤 분)도 그래서 지레 사실을 털어놓은 노상엽(이재원 분)을 탓하지 못한다. 단지 겪어보지 못했기에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어쩌면 너무 쉽게 말하고 행동했는지도 모른다. 현실은 그보다 더 냉엄하고 공포스러웠으므로. 과연 자신은 끝까지 기무라 슌지의 고문을 참아낼 수 있었을까? 어이없이 비밀을 그렇게 클럽 엔젤의 직원에 의해 기무라 슌지에게로 흘러들어가고 만다. 그것도 이강토가 오목단과 결혼식을 올리려는 그날.

비극은 극대화된다. 비장함은 더욱 절정을 이룬다. 이제 마지막이다. 기무라 슌지가 이끄는 일본경찰의 공격을 맞아 각시탈과 동진결사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역사의 비극으로 흘러갈 것인가? 아니면 영웅물의 판타지로 끝날 것인가? 어느쪽이든 개인에게는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이강토의 비극이든, 아니면 기무라 슌지의 비극이든. 아니 본질적으로 이것은 기무라 슌지의 비극으로 끝날 개연성이 높다.

만화원작 <각시탈>의 엔딩과 그 연작이라 할 수 있는 <쇠퉁소>의 엔딩은 사뭇 다르다. <쇠퉁소>쪽이 훨씬 사실적이고 몸서리쳐지도록 비극적이다. 필연과 우연의 경계를 넘어 비극의 절정을 이룬다. 아니기를 바라지만. 비극처럼 보는 이를 슬프게 하는 것도 없는 까닭이다. 그동안 지켜봐 온 시청자들에게 그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하지만 바로 그같은 비극의 시대를 다루고 있는 까닭이다. 각시탈은 바로 그 비극의 시대의 영웅이다.

단지 저것만. 저놈만. 저런 것들만. 그 근본을 쫓는다. 그 원인을 찾는다. 그럴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이 기무라 슌지에게도 있다. 하지만 일부러 외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다. 이성의 적은 쉽고 편하고자 하는 안이함이고 나태함이다. 그는 여전히 선하고 순수하다.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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