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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8.17 10:00

각시탈 "삶은 감자와 이강토의 눈물, 민족인 이유..."

이광수의 '고아론'을 감정적이지만 통렬히 비판하다!

▲ 사진='각시탈' 포스터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의도된 연출이었을 것이다.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양백(김명곤 분)의 팔순노모가 직접 가꾼 감자를 양백이 손수 껍질을 까서 이강토(주원 분)에게 건넨다. 서울까지 오는 내내 간절히 바래왔다는 그 아무것도 아닌 몸짓에 이강토는 그리고 끝내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이광수의 '고아론'에 대한 작가의 늦었지만 통렬한 반박이었을 것이다. 부모가 죽었다. 고아가 되었다. 그래서 채홍주(한채아 분)는 스스로 기생이 되었다가 우에노 히데키(전국환 분)에게 구해져 그의 양녀가 되었다. 우에노 히데키의 양녀가 되어 우에노 리에라는 이름을 받고 그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 아버지와 자식간의 따사로운 정이 흐르던가?

아버지가 키쇼카이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어머니 또한 일본인 경찰 기무라 켄지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형은 일본인의 수족이 된 자신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만 이강토에게는 과연 누가 있었는가? 유일한 친구였던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마저 형을 잃은 충격에 오로지 복수만을 말하고 있다.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경멸과 증오를 감추지 않고 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일본인이었다. 이강토의 친구이기 이전에 일본인 기무라 슌지였다.

실제 우에노 히데키의 지시에 의해 암살당한 전경무국장 콘노 코지(김응수 분)는 이강토에게 있어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어렸을 적 세상을 떠나고, 믿었던 형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다가 그만 정신을 놓아버리고, 어느새 어머니와 형까지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어 버린 그에게 유일하게 기회를 준 것이 바로 전경무국장 콘노 코지였다. 그를 믿어주었었다. 그를 인정해 주었었다. 조선인이라고 하는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차별없이 그를 대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콘노 코지는 아버지가 될 수 없었는가?

조건부였다. 전제가 따라붙고 있었다. 유능해야 한다. 쓸모있어야 한다. 콘노 코지의 기대와 바람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거래다. 가족이란 무조건적인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바라고 무조건적으로 기댄다. 아버지라는 이유로. 어머니라는 이유로, 형 혹은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하지만 콘노 코지의 기대로부터 벗어난다면, 그래서 더 이상 콘노 코지에게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면, 이강토는 가차없이 버려지고 만다. 그같은 살얼음같은 냉정한 계약관계에 있다. 채홍주가 우에노 주리로써 우에노 히데키를 따르는 심리에도 그로부터 버림받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한 번 얼굴도 보지 못한 사이에 꼭 삶아주라고 직접 기른 감자를 싸주더란다. 그리고 그 감자를 싸들고 오며 위험한 길인데도 자기에게 삶은 감자의 껍질을 까 줄 기대를 품고 있더란다. 대단한 사람이다. 임시정부의 수반이다. 일본정부가 막대한 현상금을 걸고 쫓고 있는 해외독립운동의 구심점이다. 조선독립에 뜻을 둔 많은 조선인들이 암호명 그대로 마치 아버지처럼 우러르고 있는 대상이다. 이미 이강토 자신도 오래전부터 그 이름을 들어왔을 터였다. 그런데 그런 양백이 자신에게 소박한 감자 한 알을 소중하게 껍질을 까서 건네준다.

오히려 감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재의 선택이 탁월하다. 쌀이 없는 집에서는 감자를 먹는다. 밥을 지어 먹을 쌀조차 없는 집에서는 감자 몇 알로 겨우 한 끼를 해결한다. 대단한 진수성찬에서라면 아무리 맛난 요리라도 전체 가운데 일부에 불과할 테지만, 가난한 집에서 감자란 곧 그것이 전부다. 감자를 나눈다는 것은 전부를 나눈다는 뜻이다. 가난하고 고단한 삶 가운데 절박함마저 나누고자 하는 끈끈한 정이 흐른다. 전부를 나누는 것이다. 오로지 그 가운데 따뜻한 인정만이 흐른다. 이강토가 지금껏 억지로 눌러왔던 어머니와 형에 대한 기억이 한순간에 눈물이 되어 흐를 정도로. 그것은 크나큰 위로였다. 그것을 위해 이강토는 지금껏 싸워왔던 것이었다.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시절의 기억들을 위해.

어쩌면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 민족의 이미지일 것이다. 어머니와 같은 것이다. 감자를 싸주는 어머니와 그 감자의 껍질을 손수 벗겨주는 아버지, 그러나 남이 그렇게 해 줄 리는 없다. 차라리 삼촌이라도 좋다. 이모라도 좋다. 먼 친척이라도 좋다. 피가 이어져 있으니 남보다는 그래도 따스한 정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거짓말임을 안다. 양백의 모델인 백범 김구가 해방 이후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동진의 모델인 몽양 여운형 또한 그 끝이 결코 좋지 못했다. 양백의 또다른 모델이라 할 수 있는 김원봉은 친일경찰인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한 끝에 월북하고 말았다. 월북하고 나서도 끝내 숙청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꿈은 꿀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모든 가족이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그립고 따뜻한 기대가 생겨난다.

그들 스스로가 가족이기를 거부했다. 이광수는 속은 것이다. 일본은 이미 망해버린 조선을 대신해 조선인의 아버지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 행세를 하려 노력하던 콘노 코지는 극단적인 인사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콘노 코지를 대신한 모리무라 요시오(김명수 분)는 그같은 최소한의 가식조차 지워버린 인간이다. 최소한의 거래조차도 사라져버린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일방적인 복종 뿐. 일방적인 강요와 복종을 두고 가족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하기는 가부장사회에서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면 자식은 그저 맞는 도리밖에 없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아버지의 폭력에 대해 경찰조차 나서지 않았었다.

콘노 코지가 이강토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직접 만든 요리를 나누어 먹었다면. 특별하게 차린 대단한 요리가 아닌 일상의 음식을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면. 그 차이가 이강토의 선택을 갈랐다. 이강토로 하여금 목숨까지 걸어가며 각시탈을 쓰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었다. 민족주의에 대해 항상 비판적이면서도 민족주의를 끝내 거부하지 못하는 이유다. 인간은 누구나 따뜻함을 그리워하며 산다.

마침내 기무라 슌지가 각시탈의 정체를 알았다. 이미 거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마침내 각시탈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벗겨 그 정체를 확인했다. 선택은 남는다. 기무라 슌지는 아직도 이강토의 친구인가? 아니면 단지 일본인 기무라 슌지에 불과한가? 이미 스스로 일본인이기를 선택한 기무라 슌지지만 아직 남은 분량이 적지 않으니 다른 가능성도 열어두려 한다. 채홍주는 과연 자신의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질 것인가?

무력하다. 우에노 히데키의 개인무사에게 조선인의 영웅인 각시탈은 너무나 허무하게 허물어지고 만다. 원래 그랬다. 저들보다 강해서가 아니었다. 저들보다 우월해서가 아니었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길에 모로 쓰러지면서도 끝끝내 지키려 했던 무엇이 있기 때문이었다. 주원의 선택은 현명했다. 인간이 진정 존엄하고 위대한 이유를 보게 된다. 그의 벗겨진 가면 속에 지쳐 쓰러진 얼굴이 너무나 크게 보인다.

역사에 없던 일이다. 해방전 해외에서 활동하던 요인 가운데 국내로 들어온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서로 접촉한 일도 드물었다. 그것이 해방 이후 갈등과 분열의 이유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꿈을 꾸어도 좋지 않은가. 바로 그같은 꿈이야 말로 우리가 스스로 가족인 이유일 것이니. 같은 민족인 이유다. 꿈이 바로 주의다. 민족이라는 꿈이다.

위기가 찾아온다. 기무라 슌지의 선택에 달렸다. 아니 채홍주가 선택해야 할 때다. 목단이 나서야 할 때다. 담사리 또한 목숨을 걸게 될 것이다. 스케일만큼이나 비장해진다. 강철의 무지개다. 사라져야 하지만 너무 단단해서 사라질지 모르겠다. 절망의 시대다. 그만큼 간절한 의지들이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과거의 이야기지만 결코 과거에 한정되지 않는 진정한 바람이며 꿈일 것이다. 그것을 보려 한다.

다음주를 기다린다.  마지막 장면은 너무 치명적이었다. 인간에 대한 중독이다. 드라마에 대한 중독이다. 영웅이 어째서 영웅인가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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