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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8.11 10:18

배우와 연기력 논란 "사실은 그다지 사실적이지 못하다."

그다지 배우의 연기력에 대해 엄격하게 보지 않는 이유...

▲ 사진출처=KBS-2TV '해운대 연인들' 방송캡처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아주 오래전 일이다. 하필 1991년 12월 그 역사적인 순간에 TV도 없던 신병교육대에서 열심히 훈련받고 있던 어느 남자의 이야기였다. 훈련을 마치고 퇴소식날 가족들과 처음으로 면회를 하는데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소련이 사라졌다."

남자는 바로 반응했다.

"거짓말을 하려면 좀 비슷하게나 해라."

어느 작가의 말이다. 80년대 이전 누군가 소련이 사라진 20세기를 상상한 작가가 있었다면 그는 독자들로부터 비웃음부터 샀을 것이다. 아니 너무 허황되다고 편집부에서 먼저 걸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미국과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던 초강대국의 붕괴는 뉴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던 필자마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현실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드라마틱하다."

필자는 이 말을 한 번 이렇게 바꾸어 보려고 한다.

"픽션은 그 어떤 사실보다도 더 사실적이다."

소련이 해체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역사속에 실재한 사건이었다. 비록 미디어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필자 또한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믿기지 않았다. 하물며 그것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었다면 마치 농담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농담이 아닌 진실은 따로 있다. 믿기는 사실 또한 따로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현실에 실재하는 사실에 대한 관념에 존재하는 사실 - 곧 관념적 사실일 것이다.

정확히는 관성이다. 경험의 관성이고 추론의 관성이다. 과거에 그랬다. 그랬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경험과 경험을 연결한다.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연결한다. 그 구조를 잇는 것이 이성이고 추론이다. 세계는 그렇게 관념 속에서 하나의 완성된 구조를 가지게 된다. 이른바 철이 들었다는 것이다. 나이 마흔을 불혹이라 부르는 것도 그만큼 구조가 완고하게 정립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을 기준으로 사람은 사물을 비추어보고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일까? 이른바 상식이라 부르는 것이다.

소련은 강대국이다. 일부러 망하게 하려 해도 도저히 망할 것 같지 않은 미국과 더불어 슈퍼파워 가운데 하나다. 차라리 소련이 전쟁을 일으켜 세계를 멸망에 이르도록 만든다면 그 말이 더 믿길 정도다. 그런데 그런 소련이 어느날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상식에 균열이 일어나고, 완결된 관념의 세계에도 동요가 일어난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다. 거짓말같다.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못된 장난이다. 실재와 관념의 괴리를 그렇게 납득하려 한다. 하물며 실제조차 아닌 허구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사실적(Reality)다. 사실같은 것이다.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며 허구를 비추는 거울이다. 허구를 판단한다. 그것은 과연 사실적인가. 차라리 현실은 그것이 실제이기에 얼마든지 관념과 상식을 배신할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이다. 어떻게 여기든, 어떻게 믿고 있든, 개미가 코끼리를 낳는 장면을 보더라도 그것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사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허구의 세계에서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상식, 관념의 사실들이다. 그래서 사실이 아닌 사실적이라 하는 것이다. 오히려 사실보다도 사실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전제한다.

일본인이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인의 이야기를 보여주려면 그냥 자신들의 일상을 보여주면 된다. 하지만 한국인이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인의 이야기를 보여주려 하면 일본적인 것들이 필요하다. 그때로 굳이 한국이거나 일본일 필요 없이 그저 아시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충분한 경우도 있다. 많은 미국인들이 굳이 한국과 일본을 구별하려 하지 않는다. 짐짓 일본스런 외모에 일본스러운 차림을 한 드라마속 캐릭터들은 그같은 사실 아닌 '사실적' 요구를 위해 그처럼 의도적으로 왜곡되어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실적이다.

연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굳이 배우의 연기력에 대해 지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실에서는 그다지 배우처럼 능숙하게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일 필요가 없다."

이를테면 최근 있었던 연기력 논란 가운데 드라마에서 배우가 우는 장면을 캡춰해서 그 입꼬리가 웃는 모양이라 지적한 것이 그 한 예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보면 울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가 자칫 웃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거꾸로 웃고 있는데 울쌍인 경우도 있다. 말을 어눌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감정표현이 어색한 사람도 있다. 말을 하는데 어법이 엉망인 경우도 있다. 사투리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서울사람이라면 부산에 살아도 서울말씨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서울을 떠나본 적 없는 필자의 말투를 듣고 강원도 사투리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저 살다 보면 그런 사람도 있다. 실제 연기력이 미숙한 것일수도 있지만, 어차피 모든 사람들이 드라마에서처럼 능숙하게 자연스러운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것은 드라마속 개인들이 더 잘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허구의 드라마를 대중들에 납득시킬 수 없을 테니까.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연기한다. 대중이 동의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연기해 보인다. 작품을 쓰기도 그렇게 쓴다. 하지만 조금만 떨어져 생각해 보면 그런 미숙함이나 아쉬움도 결국 세상을 이루는 한 부분일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많고 사람마다 다 모습이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면 연기를 못하는 것도 연기 못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것이 지나치게 거슬리지만 않는다면 굳이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

즉 연기력이란 이미지다. 다소 주관적인 부분이 있다. 역시나 대중의 관념속에 존재하는 어떤 사실적 요구일 것이다. 잘하는 연기가 있다. 훌륭한 연기가 있다. 그러나 때로 그런 대단하게 훌륭한 연기가 필요치 않은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력이 아닌 캐릭터를 찾는다. 젊음과 아름다움과 대중의 호감을 쫓아 캐스팅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아마추어보다는 프로가 우위에 있다. 아니 진정한 아마추어는 그런 것을 굳이 따지거나 가리려 하지 않는다. 엄격한 대중의 비판을 들으면서도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작품의 예는 굳이 찾아볼 필요조차 없이 많다.

과연 사실적인가? 그 이전에 과연 그것은 사실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사실적인 것이다. 배우도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현실에서도 그런 사람을 만나면 처음에는 많이 어색하다. 배우는 작품을 통해서만 대중을 만난다. 더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도 분명 있다. 보다 더 강한 설득력으로 작품 안으로 대중을 끌어들이는 연기다. 다만 조금 여유를 두고 본다면 그렇게까지 엄격하거나 가혹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는가. 즐기자고 보는 것이지 따지고 분석하자고 작품을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유희로나 즐기면 좋다.

허구와 실제가 만나는 지점일 것이다. 거짓과 사실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배우의 연기는 거짓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대중은 허구의 이야기에 마치 사실처럼 빠져들고 만다. 사람들이 배우에게 사실적인 연기를 요구하는 이유일 것이다. 필자가 그것에 그다지 엄격하게 동의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질은 같다. 기왕이면 거짓말을 해도 그럴싸하게 하라. 허구는 사실이 아닌 사실적인 것이다.

어려운 것이다. 사실보다 더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래서 필자는 관대하고, 누군가는 엄격하다. 그래야 작품이 재미있다. 재미있고자 하는 것은 작품을 만드는 입장이나 즐기는 입장이나 모두 같다. 그래서 모두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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