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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8.06 08:58

넝쿨째 굴러온 당신 "차윤희의 유산, 잔인한 비극이 또다른 희망을 낳으려 하다."

고옥이 어머니를 용서한 이유, 가족이기에 쉽게 용서한다.

▲ 사진='넝쿨째 굴러온 당신' 포스터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아파 본 사람이 아픈 마음을 안다. 내가 지금 아프기에 아팠던 마음을 안다. 모두가 위로해준다. 남편과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시아버지와 시할머니 역시 그녀를 걱정해준다. 막내 작은아버지 내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둘째 작은어머니 또한 집을 나서려던 걸음을 멈춰세운다. 하지만 누가 있어 채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설움을 알아줄까?

그나마 장양실(나영희 분)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친정 부모는 오래전에 돌아갔고 형제 또한 아무도 없는 외동이었다. 남편은 냉정했다. 냉정하다기보다는 냉혹했다. 시댁식구들은 그녀에게 무심했다. 장양실 혼자서 그 고통을 모두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두의 걱정과 위로를 들으며 홀로 오열하는 차윤희(김남주 분)의 울음이 그래서 애닲기만 하다. 비극이지만 그 아픔을 통해서 차윤희도 어쩌면 장양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이다. 남자라면 더욱 여자라도 마찬가지다. 한 생명이 사라졌다. 형체조차 갖추지 못한 한 생명이 자기의 안에서 어느 한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이기에 태어남을 기약하며 아홉달 넘게 자신의 일부로서 아이와 함께해야 한다. 누구보다 먼저 아이의 존재를 느끼고, 누구보다 먼저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태어난 순간의 기쁨을 위해 그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기꺼이 인내하며 희생한다. 그런데 그 아이를 잃었다. 이제껏 함께 해왔던, 그리고 이제 곧 만날 것을 기대하며 기뻐하던 자신의 일부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말이야 장황하지만 과연 그 아픔을 누가 있어 감히 이해한다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장양실은 옛날사람이다. 고작 30년 전을 가지고 옛날이라 하기도 어색하기는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아직 여성이 자기 일을 가지고 사회속에서 자존을 지키고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먼 이야기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저 여자는 결혼 잘해서 살림 잘하고 아이 낳아 잘 기르면 된다. 여성은 자궁이었다. 여성의 존재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그래서 바로 출산이었다. 예전에는 생산이라고 불렀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시집에서 내쫓긴다. 내쫓기지 않더라도 아이를 낳기 위해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을 참아내야 했다. 그 모든 괄시와 구박을 혼자서 감수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동서인 엄청애(윤여정 분)에게도 그래서 그때는 모질게 내뱉는 말에 상처도 많이 입었었다. 아무리 남편이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어도 장양실은 여자다. 아무리 좋은 집안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자랐어도 장양실은 어디까지나 여자다. 결혼했으면 아이를 가져야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여자로서의 자존에 관련된 것이다. 하물며 아무도 모르는 새 그녀는 아이를 유산하고 혼자서 쓸쓸히 돌아가야 했었다. 과연 자신이 장양실의 처지였다면 어땠을 것이라 차윤희는 말하는데, 실제 같은 처지였다면 그녀는 어떠했을까?

고의인가의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장양실은 실수라 주장하고, 언뜻 떠오르는 방귀남(유준상 분)의 기억은 그것이 장양실의 고의였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케 유도한다. 최소한 방귀남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놀라고 가장 열성적으로 방귀남을 찾으려 노력했던 것이 장양실이었다는 엄청애의 증언은 그 중간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고의였었다. 일부러 의식하려 하지 않았지만 무의식 가운데 고의로 그리 행동했다. 그러면 그 동기는 무엇일까? 아직 그녀는 누구로부터도 그에 대한 위로를 받지 못했다.

높은 곳에서 낮은 자리로 떨어진다. 귀해졌다가 천해진다. 더구나 아픔까지 이해하게 된다. 어차피 미워하기가 더 고통스럽던 시할머니(강부자 분)이다. 비록 자식의 일로 화를 내기는 했지만 내내 미워하고만 있기에도 방장수(장용 분)에게는 그녀는 제수가 된다. 누군가를 끝까지 미워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아직 장양실과 충분한 기억이 축적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에 방귀남이나 차윤희나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장양실이 어째서 아버지인 방장수의 집으로 올 생각을 했는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이 그녀의 마음을 열게 한다. 가엾게 여기고 안타깝게 여기도록 만든다. 그렇게 될까? 지금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에게는 비극이지만 가족에게는 계기가 되어준다. 혈연은 아니지만 가족의 인연을 맺고자 했던 아이가 있었다. 가족이지만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그렇기 때문에 다시 가족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용서해야만 하는 대상이 있었다. 작가가 잔인하다. 작가가 잔인하다기보다는 현실이 잔인하다. 그런 계기가 만들어져야지만 사람은 비로소 한 걸음 내딛을 결심을 하게 된다. 차세광(강민혁 분)과 방말숙(오연서 분)의 가출이 비로소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볼 마음을 가지게 한 것과 같다. 완고하게 닫혔던 차윤희의 세계가 아이의 죽음과 함께 깨어진다. 아이를 위한 그녀의 눈물과 함께 서럽게 녹아내린다. 과연... 그래도 사람은 앞으로 나아간다.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다. 그때도 바나나는 무척 비쌌다. 송이도 아니고 낱개로 팔았다. 그래도 쉽게 사먹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바나나도 무척 싸져서 이제는 굳이 그때처럼 절박하게 찾는 과일은 아니게 되었지만,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한다. 그런 바나나조차 사주지 못할 정도면 고옥(심이영 분)의 어머니는 얼마나 가난했던 것일까? 사랑하는 딸에게 한참 싸진 바나나조차 사주지 못할 정도였다면 어머니의 삶은 얼마나 고단했던 것일까?

잔인한 것에는 슬픔이 있다. 잔혹한 것에는 아픔이 있다. 그래서 고옥도 고작 바나나 하나에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접는다. 남편에게 찾아가는 것조차 하지 말라고 한다. 어머니가 자신을 기억해주고 있었으므로. 그 시절의 기억을 여전히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아들의 이름을 빌어 그때 사주지 못한 바나나를 선물로 보내주고 있었다. 고옥도 어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삶의 고단함도 알게 되었다. 쉽게 놓지 못할 현실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고작 바나나 하나면. 그녀는 이미 어머니다. 용서란 또한 이렇게 아프기도 한 것이다.

역시 방이숙(조윤희 분)의 열등감이 문제다. 방말숙은 사랑받고 싶어하고, 방이숙은 인정받고 싶어한다. 차라리 천재용(이희준 분) 사채업자에 쫓기는 한심한 처지였다면 방이숙은 마음을 열었을지 모른다. 천재용에게는 방이숙이 필요했을 테니까. 방일숙(양정아 분)와 비슷한 경우다.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인정에서 찾는다. 타인의 인정은 자기에 대한 필요다. 부자다. 그것도 거의 재벌수준으로 큰 부자다. 천재용에게는 자신이 필요치 않다. 지레 판단한다. 사실 그것은 천재용이 판단한다. 그러나 방이숙에게는 자기에 대한 확신이 없다.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답답할 정도로 완고한 자기세계에 갇혀 살고 있다. 나오기가 두렵다. 무섭다. 겁난다. 그녀를 끄집어내주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그녀보다 너무 잘나서는 열등감만 자극할 뿐이다. 방일숙의 삶을 답습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운데, 그래도 천재용이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아 그것은 다행이다. 천재용은 바보다. 그래서 바보라서 정말 다행이다. 억지로라도 그녀의 세계에서 끌어내 마주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있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깎아내림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신을 끌어올리려 한다. 비난하고 모욕하고 조롱함으로써 그보다는 자신이 낫다는 확신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야말로 인터넷에 흔히 서식하는 악플러를 형상화한 캐릭터일 것이다. 남남구(김형범 분)를 말하는 것이다. 무엇하나 스스로 이루려는 것 없이 남에 기대고, 남을 깎아내리고, 그러면서 자기 아닌 자신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방일숙도 참 남자복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부모다. 대신 남남구는 당시 방일숙을 필요로 했었다. 지금 윤빈(김원준 분)도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 누군가를 원한다.

드디어 겹사돈의 패러독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딸에게는 친정엄마다. 며느리에게는 시어머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이 한만희(김영란 분) 안에서 충돌한다. 아들의 어머니이고자 하는 순간 딸의 어머니로서의 자신이 발목을 잡는다. 차세광의 어머니로서 아들의 입장을 최우선으로 한 것이 딸 차윤희를 곤란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딸 차윤희를 대하듯 방말숙을 대하려니 그것은 아들의 장래와 관련한 문제다. 둘 모두를 취하기에는 상대인 엄청애 또한 만만치 않다. 구세대와 신세대의 충돌처럼 보여지던 두 사람의 싸움이 어느새 그 대상이 바뀌며 거꾸로 뒤집힌 듯 보인다. 역시 사람은 당사자가 되어 봐야 비로소 제대로 판단을 할 수 있다. 과연 며느리도 가족이라는 한만희의 말이 차세광이 결혼을 하게 될 경우에도 지켜질 것인지. 시어머니가 친정엄마가 되고 친정엄마가 시어머니가 된다.

무거운 주제다. 용서라는 것은. 쉽게 용서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용서가 너무 어려워서도 안된다. 용서는 어디까지나 용서다. 그리고 가족이다. 너무 큰 죄라 용서를 위해서도 이렇게 복잡하고 무서운 과정이 필요하다. 댓가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댓가없이 얻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차윤희는 과연 무엇을 얻을 것인가? 이대로 비극으로 끝나리라고 믿지 않는다. 엄밀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코미디일 것이므로. 세상을, 낙천을 믿는다.

무거웠다. 우울했다. 그러면서도 희망을 보았다. 고옥은 복선이다. 고옥이 이미 어머니를 용서했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고작 바나나 하나에 용서하고 있었다. 유산이라는 무거운 비극이 용서와 화해라고 하는 희망과 만난다. 또다른 만남의 계기가 된다. 잔인하지만 그 잔인한 균열로 인해 새로운 길이 열린다. 드라마니 다행이란 말도 할 수 있다.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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