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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8.02 11:06

각시탈 "이강토와 목단이 서로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이유..."

이강토와 목단, 기무라 슌지, 일제강점기의 현실을 보다

▲ 사진='각시탈' 포스터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로리타>에서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 어린시절 끝내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보상으로 10대의 어린 소녀이던 로리타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현재의 로리타는 그가 과거 무력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첫사랑의 소녀 애너벨의 대신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사랑을 한다. 그리고 첫사랑의 기억을 간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사람들이 평생을 첫사랑의 기억에 구애되어 살아가지는 않는다. 지금에는 지금의 사랑이 있다. 지금에는 지금의 삶이 있다. 단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은 있다. 처음 느껴본 떨림이었기에 그 간절함은 아직도 시린 아픔으로 남아 있다.

미련이란 미망이다. 이루지 못한 희망이다. 현재가 만족스럽다면 굳이 지나버린 미련 따위 부여잡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 앞으로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이루지 못한 과거의 미망 따위 다시 일깨우려 할 이유가 없다. 현재가 불행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에 이미 놓아두고 온 기억을 되짚는다. 만일 그때 그랬었다면... 그랬더라면 지금 자신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깊이 각인된 기억이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뜻밖의 따뜻한 보살핌, 그리고 귀해 보이던 도련님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까지. 이강토(주원 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있었다. 그를 도련님이라 불러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몸은 고단했지만 모두로부터 떠받들려지며 보호받고 있었다. 그때 역시 자신을 도련님이라 불러주던 분이(목단)과 만나 모두의 보살핌 속에 설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분이와 헤어지는 순간은 그래서 그리 비장하고도 처절했다. 다시 볼 수 없으리라.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이강토와 목단(진세연 분)이 서로에게 집착하는 이유였다. 어찌 살아가면서 다른 만남이 한 번도 없었겠는가? 목단에게도 그래서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가 있었다. 이강토와 그렇게 헤어지고 에스더라는 세례명으로 선교사에게 신세지고 있을 때, 때마침 선교단체에서 운영중이던 병원에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 소년 기무라 슌지가 입원하고 있었다. 아마 기무라 슌지가 일본인이 아니었다면, 당시가 일제강점기가 아니었고 목단 역시 조선인이 아니었더라면, 그랬다면 어쩌면 두 사람은 우정을 넘어 사랑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의 우정은 민족을 뛰어넘어 매우 깊은 것이었다.

하지만 목단은 조선인이었다. 기무라 슌지 역시 일본인이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조선은 식민지가 되어 있었고, 목단 또한 식민지 조선의 백성으로서 일본에 의해 지배되어지는 시대의 모순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심지어 목단의 아버지 담사리(전노민 분)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어선 이른바 독립투사였다. 일본인들은 그를 폭도, 테러범이라 일컫는다. 바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어선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가 자신의 눈앞에서 온갖 고초를 겼어야 했고, 그로 인해 끝내 어머니마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과연 그런 그녀가 그같은 절망적인 현실을 앞에 두고서도 일본인인 기무라 슌지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연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겠는가?

목단이 전부터도 계속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도 각시탈에게서 어려서 헤어졌던 첫사랑 도련님의 모습을 찾으려 했던 것이 바로 그래서였다. 어려서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으러 나섰다 그만 어머니가 길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머니는 죽고 자신만 시신과 함께 있는데 도련님과 도련님의 일행들이 자신을 구해주고 어머니의 장례까지 치러주었었다. 그때처럼 다시 이번에도 도련님이 자기를 자신이 놓인 절망적인 현실로부터 구해주기를 바란다. 그 절망의 원인인 일제강점기의 모순으로부터 모두를 구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를 위해서라도 도련님의 장도를 알고 있고 자신을 여러번 구해주기까지 한 각시탈의 존재는 그녀의 머릿속에 남은 도련님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각시탈이 바로 그녀가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는 도련님 그 자체인 것이었다.

그래서 목단은 각시탈이 사실은 이강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 이강토 역시 사랑하게 된다. 그토록 증오해마지않던 이강토였지만 그가 각시탈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제까지의 그에 대한 모든 감정과 기억을 지우고 다시 도련님으로서 그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이강토 역시 목단이 옛날의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일깨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서로를 사랑해서라기보다 서로의 안에서 그동안 간절히 키워온 그리움과 바람이 서로를 원하도록 만든 것이다. 새로운 사랑에 대한 기대가 없으니 과거의 사랑을 떠올린다. 현실에 대한 불안과 분노가 그들로 하여금 사랑하게끔 만든다.

기무라 슌지와 목단이 서로 갈라지게 되는 지점이다. 그나마 지금 기무라 슌지는 과거 그녀를 에스더라 부르던 시절에 대한 기억마저 지워버린 채였다. 그녀를 에스더라 부르던 시절의 인연 또한 깨끗하게 잊어버린 뒤였다. 목단이 자신을 향해 일본인이라 말한 그 순간부터. 기무라 슌지 자신은 일본인이었고 목단은 조선인이었다. 기무라 슌지 자신이 일본인이고 목단이 조선인인 이상 두 사람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과거가 그렇다면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말한다. 그래서 기무라 슌지는 더 이상 에스더라 부르던 과거의 기억이 아닌 미래를 말한다. 현재를 말한다. 지금 당장, 그리고 앞으로 그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말한다.

식민지의 비극이다. 나라를 빼앗겼다. 나라를 잃은 식민지의 백성으로서 이강토가 스스로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도, 앞으로도 무엇 하나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조선이라 불리우는 것은 조선이었던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식민지라 불리우게 된 것은 일본인에 의해 지배되어지는 현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식민지가 된 조선은 일본인에 의해 지배되어지리라. 이강토가 식민지 조선의 과거라면 기무라 슌지는 식민지 조선의 현재인 셈이다. 그리고 아마도 식민지 조선의 미래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과거로 회귀하여 그로부터 불확실한 미래를 찾으려 한다. 절망이기까지 한 희망을 구하려 한다. 그래서 기무라 슌지는 현재와 미래를 말하고, 이강토와 목단은 과거만을 말한다.

당시의 식민지 조선의 상황이 그랬다. 나라를 빼앗겼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어떻게? 왜? 어째서? 식민지가 되기 이전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립국이었으니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당위는 맞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나라를 되찾을 것인가 하는 물음에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장차 나라를 되찾아 어떤 나라로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무엇도 확실한 것이 없다. 거의 절망에 짓눌리며 고작 발악처럼 발버둥치는 것이 고작인 시절이었다. 분열되었다. 마땅한 확신이 없으니 나름의 답을 찾아 이합집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면 일제에 부역하던 이들은 답이 확실했다.

춘원 이광수의 고아론이 얼핏 보인다. 나라란 부모다. 자식인 백성이 부모인 나라를 의지하고 따르려 해도 이미 나라가 망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졸지에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은 나라잃은 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조선이 망한 자리에 대신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신민이 되어 있었다. 어찌해야겠는가? 이미 죽은 부모를 끝까지 그리워할 것인 것인가? 아니면 새로이 부모가 된 일본제국주의를 부모로 여기고 의지하며 따를 것인가? 일본제국주의야 말로 조선을 대신한 조선 백성들의 새로운 부모다. 식민지 조선의 현재이며 미래다.

매우 상징적일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작가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과거를 단절하고 오로지 현재와 미래로써 목단을 소유하고자 강요하는 기무라 슌지와 절망 속에서 단지 과거의 기억만으로 서로 간절히 그리워하는 이강토와의 관계와, 그리고 마침내 그리움은 사랑이 되어 두 사람을 맺어주고 있었다. 목단이 선택한 것은 기무라 슌지가 차지하고 있는 확실한 현재와 미래가 아닌, 이강토와의 과거의 기억 속에서 이어지는 불확실하지만 간절히 바라고 기대는 미래인 것이다. 하필 그 순간 이시용(안석환 분)을 비롯한 친일인사들은 새로운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작해야 흰 저고리다. 어쩌면 조선이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털고 지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과거의 유산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조선의 것이기에 간절히 지켜야 하는 대상이 되고 만다. 양력을 쓰면서도 설은 음력으로 쇤다. 일본제국주의가 음력을 금지했던 탓이었다.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는 그렇게 일제강점기 너머의 먼 과거로부터 비롯된다. 한국근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다. 일본제국주의와 근대화가 서로 겹치는 탓에 전근대적 인습으로부터의 탈피가 많이 늦었다. 전근대와 근대가 공존하는 한국사회의 모순은 바로 그로부터 비롯된다. 흰저고리를 입고서 담사리를 살리려 모인 백성들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다.

아무튼 묻고 싶은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폭탄테러가 벌어진다. 팔레스타인의 누군가가 폭탄을 몸에 두르고 이스라엘군을 향해 몸을 던진다. 그것을 사람들은 과연 무엇이라 평가할까? 인명을 도외시한 자살폭탄테러? 인명을 존중하지 않는 야만적 폭력? 그러면 드라마는 무엇일까? 대일본제국의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고, 그 범인을 공개처형하려는데 다이너마이트를 두르고 나타나 스스로 불을 붙인다. 그들은 폭도일까? 테러리스트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어느새 지배자의 논리에 동화되어가는 자신을 보게 된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커져 있다.

조선의 백성이 있었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그리워해 온 조선이라는 과거의 기억이 있었다. 또한 한 편으로 지금 곁에 있어주고 있는 일본이라는 현재가 있었다. 일본이라고 하는 현재는 미래를 말해준다. 그러나 조선은 단지 과거를 그리워 할 뿐이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목단의 아버지는 일본제국주의에 폭탄을 던지고 공개처형을 당할 위기에 놓인다. 단순하지만 명확하다. 의도한 것이라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넘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원래 의도한 것이 그것이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교하고 세밀하다. 기무라 슌지란. 이강토란. 그리고 목단이란. 일제강점기라도 하는 당시의 현실마저도. 오동년(이경실 분)이 쓰러졌다. 백성의 피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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