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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8.01 09:19

골든타임 "현장의 절규, 왜 그랬냐고? 사람 살리려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에서 중증외상센터의 필요를 절감하다

▲ 사진='골든타임' 포스터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이를테면 야구의 예를 들어보자. 두 사람의 야수가 있다. 한 사람은 전해 실책왕이다. 다른 한 사람은 아직까지 실책이 하나도 없다. 누가 더 좋은 야수일까?

타구가 날아온다. 한 눈에 보기에도 안타성으로 보이는 빠른 타구가 깊숙한 곳으로 날아든다. 수비수가 달려간다. 한 사람은 글러브에 닿았고 다른 한 사람은 터무니없이 스쳐갔다. 전자는 실책으로 기록되었고 후자는 안타로 기록되었다.

수비를 보면서 실책을 저지르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다. 잡을 수 있는 타구만 잡는 것이다.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타구는 버려두고 잡을 수 있는 타구만 확실하게 노려 잡는 것이다. 그래도 물론 실책은 없을 수 없겠지만 무리하게 어려운 타구를 따라가 잡으려 하는 것보다는 비교할 수도 없이 실책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어떤가?

안타성 타구를 잡지 못하고 놓쳤다고 화를 낸다. 그냥 두었다면 안타를 얻어맞은 투수의 잘못이 되었을 터였다. 실수를 탓하고 그 결과를 질책한다. 하지만 과연 실수를 줄인다고 해서 그것이 좋기만 한 일인가? 야수가 실책을 않고, 투수가 실투를 하지 않는다. 실책이 두려워 야수가 수비를 피하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환자가 죽어간다.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다. 가까이에 수술을 할 수 있을만한 병원이라고는 해운대세중병원밖에 없었다. 입원할 병실조차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해운대세중병원에서 수술해야지만 살 수 있는 위급한 상태였다. 실제 최인혁(이성민 분)의 독단에 불만을 내보이던 학과장들 조차도 최소한 일단 수술을 마치고 응급실에 임시로 입원해 있는 박원국 환자에 대해 나름의 살리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데 중환자실이 아닌 응급실에 입원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기사가 올라온다.

차라리 해운대세중병원에서 수술하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아도 되었을 기사였다. 중환자실이 없다는 이유로 환자를 받지 않고 다른 곳으로 보냈다면 워낙 상태가 위중했으니 크게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수술도중 죽었으면 어땠을까? 수술도중 사망했어도 환자의 상태가 너무 나빴으므로 그저 불행한 사고의 하나로 여겨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환자를 살려놓았다는 이유만으로 병원의 명운까지 걸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래서야 선의를 베풀어놓고 도리어 덤터기만 쓰게 된 꼴이다.

하기는 그래서 학과장들도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 책임을 누가 지실 겁니까?"

가장 많이 나온 대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실수가 두렵다. 책임이 두렵다. 아이들도 학교성적을 이유로 부모가 너무 심하게 야단을 치면 성적표를 숨기거나 아예 위조하는 것으로 당장의 불똥을 피하려 한다. 지나치면 아예 학교에 가지 않거나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마저 있다. 병원의 실수를 빌미로 난동을 부리고, 막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그 책임이 모두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학과장들 사이에서 최인혁이 따돌림당하는 이유였다. 최인혁이 담당한 외상외과란 가장 긴급한 치료를 요구하는 환자들을 책임지는 곳이었다. 그만큼 위험부담도 크다. 피로도도 크다. 그런데 돌아오는 이익은 그다지 크지 않다. 오히려 적자나 보지 않으면 다행인 정도다. 차라리 환자를 받지 않는 쪽이 더 낫다. 박원국 환자의 경우만 보더라도 처음부터 해운대세중병원에서 환자를 받지 않고 거부했다면, 그러니까 최인혁이 억지로 밀고 들어와 수술하지만 않았더라도 이와 같은 불편한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더구나 박원국 환자가 청와대에서 대통령표창까지 받은 바 있는 사람이었다고 하니 부담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한 쪽에서는 인턴의 실수를 이유로 병원에 막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환자의 주변인들이 있다. 또 다른 한 쪽에서는 병원의 실수가 의심된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환자의 가족이 있었다. 모두가 의사들을 압박하는 환경들이다. 물론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직업이니 그만큼 정확해야 하고 엄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다. 사람이 항상 완벽할 수는 없다. 어디선가는 아쉬움이 생기고, 어디선가는 안타까운 일도 생긴다. 그때마다 일일이 책임의 압박에 시달려서야 제대도 마음놓고 치료하기조차 힘들어진다. 역시나 아직 인턴이라 이민우(이선균 분)나 강재인(황정음 분)이나 기운이 넘친다. 그렇게 실수를 저지르고서도 아직도 꿋꿋하다. 실수를 저질러서 매번 책임을 져야 한다면 두 사람은 지금쯤 의사를 그만두어야 한다.

의사는 환자를 살리는 직업이다. 동시에 환자를 죽이는 직업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집이 아닌 병원 침대에서 의사의 치료를 받던 도중 사망한다. 어쩌면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의사가 더 훌륭한 의사일 수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결과 환자의 마지막까지 바로 자신의 앞에서 맞게 되었다.

환자를 죽인 만큼 환자를 살린다. 환자를 살린 만큼 환자를 죽인다. 그런 점에서 병원은 확실히 전장과 닮았다. 살리기 위해 죽이고, 죽이기 위해 살린다. 그러나 워낙 의학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인지 의사는 당연히 환자를 살리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런 만큼 부담은 더 커진다.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지고, 실망은 분노로 이어진다. 분노는 원망과 증오로 이어진다. 그 모든 것을 의사와 병원은 감당해야 한다.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 전에 그 다음을 걱정해야 한다. 그래서 때로 환자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기게 되기도 한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환자를 치료하려 한다.

역시나 전장의 치열함과 일상의 평온함이 교차하는 지점일 것이다. 아직 평온한 일상에서는 원칙과 규칙이 중요하다. 딱 짜여진 그대로 어긋남없이 이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전장은 다르다. 초단위로 전황이 바뀔 수 있다. 전황이 바뀌면 다시 수많은 목숨이 살거나 사라진다. 임기응변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살아야 한다고 하는 생명의 절대명제다. 그것은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난 순간 부여된 절대법칙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살리기 위해 인간은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일상의 평온함 속에서는 그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중환자실이 있었는가의 여부를 따진다. 어째서 응급실에서 치료하는가부터 따져묻는다. 의사가 병원소속이 아니었음도 묻는다. 그리고는 환자의 이름을 주목한다. 환자가 누구인가에 집중한다. 삶과 죽음이란 그들에게 큰 의미가 없다. 살아야 한다는 당위에 동의했다면 굳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렸는가를 따져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환자가 누구인가를 들어 살려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어느 노인을 살리기 위해 무작정 최인혁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한 한 의사가 있었다. 환자의 상태가 안좋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중증외상센터(=트라우마센터?)라고 하는 드라마의 주제를 강조하는 장면들이었을 것이다. 전장과 일상이 만난다. 일상이 전장으로 바뀌고 전장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다른 것은 상관없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한 가지. 사람을 살린다. 그리고 죽인다. 살리고자 해서 살리고, 살릴 수 없기에 죽인다. 그 잔혹한 치열함이 그 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다. 어째서 그같은 중증외상센터가 지금 당장 필요한가? 사람의 삶과 죽음을 둘러싼 한가로운 이야기들이 전장에 사는 최인혁을 답답하게 만든다. 그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지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는 평범한 개인일 수 없다. 개인으로서의 일상은 아예 드라마에 나오지도 않는다. 그만큼 그가 선 전장이 긴박하고 잔혹하다.

단 한 마디였다.

"왜 그랬냐고? 사람 살리려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한 마디였을 것이다. 그 한 마디에 드라마의 모든 주제가 집약되어 있었다. 아니 우리가 지금 당장 잊고 있을 지 모를 가장 소중한 한 가지이기도 했을 것이다.

너무나 평화롭다.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생각지도 않는다. 생각도 못한다. 그래서 충격적이다. 그래서 감당하지 못한다. 혹은 지나치게 익숙해져있다. 사람이란 당연히 사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사람은 단 한 순간에도 어이없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사람에게 가장 허락되지 않은 것이 가장 필요한 한 가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던가?

드라마 <골든타임>이 갖는 가치다. 아름다운 수술은 없다. 따뜻한 의료현장도 없다. 지나칠 정도로 차갑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냉정하고 교활하다. 사람이 죽어나간다. 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지금껏 수술한 환자 가운데 완치가 된 경우는 아직 한 사람밖에 없다. 현실은 그렇게 지금도 가혹하다. 가감없이 오히려 더 극단적인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려 한다.

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살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맞는다. 살 수 없는 사람들마저 살리려 하고, 그래도 안되면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낸다. 다른 것은 그 다음이다. 그 나중에 시린 비극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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