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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7.17 07:39

추적자 "실패한 반역? 성공한 복수? 우리 자신에게 묻다."

백홍석과 강동윤 두 남자의 차이, 그리고 그들이 닮은 이유...

▲ 사진출처='추적자' 방송캡처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문득 어느 무협소설의 장면을 떠올리고 말았다. 어떤 특정한 작품이 아닌 이미지다.

천민이었다. 가난하고 비루한 처지의 사내였다. 왕이 되고 싶었다. 왕이 되어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반역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킨 것이 끝내 자기에게로 돌아와 반역을 좌절시키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힘없고 가난한 희생자의 가족이 끝끝내 그의 앞길을 막아선 것이다. 반역은 끝나고, 반역자인 사내는 패장이 되어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반역을 진압한 왕은 반역을 막는데 공을 세운 주인공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모두 저와 같으라."

뭉클했다.

"그날 생각했다. 지수가 사는 세상에 들어가고 싶다고."

수리비만 수천만원이 나오는 사고였다. 아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수리비 걱정에 개의 안위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수리비 생각에 무사한 개를 원망하며 화를 낼 것이다. 아니면 개따위 신경쓰지 않고 그대로 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지수(김성령 분)은 단지 개의 안위만을 걱정하며 무사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밝다. 따뜻하다. 인간은 밤이 아닌 낮에 주로 활동한다. 털가죽이 없어 혼자서는 체온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밝은 곳을 찾고, 따뜻한 곳에 머물려 한다. 어두운 곳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섭고 외롭다. 추우니 서럽고 두렵다. 밝은 빛만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 몸이 따뜻해지면 얼었던 마음마저 풀린다. 그리고 그것을 서지수는 가지고 있었다. 누이가 죽었음에도 그 보상금으로 대학을 마칠 수 있음을 다행스러워하던 어둡고 춥던 강동윤(김상중 분)의 앞에 그것을 보이고 있었다. 과연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힘겨웠다. 그것은 너무나도 높은 곳에 있었다. 그냥은 올라갈 수 없었다. 그저 주어진 것들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서동욱(전노민 분)과는 달리 그는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서야 그와 비슷한 높이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서동욱과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된 뒤에도 그가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한참 더 위를 바라다 보아야만 했었다. 오히려 더 가까이 느끼게 되었기에 닿지 않는 그 밝고 따사로운 빛이 시리고 서럽다.

이대로 만족하고 멈출 것인가? 아니면 더 위를 바라고 다시금 오르기 시작할 것인가? 오르거나 아니면 떨어지거나 그러나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가 바란 것은 그 눈부시도록 밝고 따뜻한 빛이었지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의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올랐다. 눈앞에 보이는 장애물들을 치우며 그 과정에서 한 여자 아이가 무고하게 희생되었다. 그 죽음마저 철저히 더럽혀지고 말았다. 하지만 여지까지 올라왔다. 절대 멈출 수 없다.

하지만 어떤가? 결국 마지막 순간 타의에 의해 멈추고 보니 모든 것이 그저 편안하기만 하다. 어차피 자기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것이었다. 저들에게 허락된 것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강동윤의 모습은 이제까지 가운데 가장 편안하고 가장 선량해 보인다. 무엇을 얻자고 지금까지 아등바등 끔찍한 죄까지 저질러가며 힘들게 달려왔던 것일까? 그토록 강동윤을 적대하던 서회장(박근형 분)조차 강동윤의 마지막 앞에서는 원래의 장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것이 그의 자리다.

바로 강동윤과 백홍석(손현주 분)의 차이였을 것이다. 아니 비로소 딸과 아내를 모두 잃고서야 백홍석은 강동윤과 같은 처지에 놓이고 만다. 백홍석이 바란 빛은 정의였다. 백홍석이 바란 따뜻함은 도의였다. 하지만 그것은 백홍석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총을 들었다. 총을 들고 법정에 난입했다. 구속중에 탈출하기도 했었다. 한 마디로 강동윤이 백홍석보다 더 가난했다. 더 절망했고 더 좌절했다. 더 어둡고 더 추웠다. 그래서 더 간절히 빛을, 따뜻함을 바랐고, 그래서 잠시 인간이기를 저버렸다. 그나마 최정우(류승수 분)와 서지원(고준희 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백홍석 역시 강동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희망이란 없었다. 기댈 수 있는 어떤 밝음도 따뜻함도 없었다. 아버지는 손님의 지갑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아들은 그저 굶지 않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누이가 사고로 죽었는데 그 보상금으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게 되었음을 반기고 있었다. 건물주인으로 인해 아버지는 자신의 자랑인 아들의 상장을 이발소에 걸 수 없었고, 아들은 아버지의 이발소에서 자신의 상장들이 치워지는 것을 보아야 했었다. 더 밝은 빛을 찾아서. 더 따뜻한 온기를 찾아서. 온기 정도가 아닌 열기를 기댄다. 그러나 백홍석에게는 아직까지 그만한 절망까지는 보이지 않고 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었다.

위만을 보았다. 더 높은 곳만을 꿈꾸었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로소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추락하는 가운데 강동윤은 자신의 주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혜라(장신영 분)을 돌아보고, 아내인 서지수를 돌아본다. 장인인 서회장과도 오랜만에 정다운 대화를 나눈다. 백홍석은 더 높은 곳을 보려 하지 않았다. 주위만을 보았다. 바로 옆에 있는 아내와 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홍석이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의 빛은 그의 곁에 있었다. 그의 따뜻함도 그의 가까이에 있었다. 굳이 더 밝을 필요도 더 따뜻할 필요도 없었다. 딸과 아내가, 그리고 동료들이 그 온기를 대신해 준다.

결국 승리한 것은 백홍석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백홍석이 옳은가? 물론 옳다. 강동윤은 죄를 지었다.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렇다고 과연 강동윤이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그 위에 오르기 위해 노력한 것들이 잘못된 것이었는가? 굳이 죄를 짓지 않더라도 그곳에 오를 수 있었더라면. 정당하게 노력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더라면. 그러나 그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만든 구조에 대해서는 어떠한 심판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단지 빛을 탐하고 따뜻함을 구하려 한 강동윤의 탐욕과 죄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고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여전하다. 새로운 대통령당 선자조차 힘으로 길들여 다스리려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실패한 반역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꿈을 하나로 모으고 싶었다. 작은 꿈을 모아 더 큰 꿈을 이루고 싶었다. 뼈를 깎는 아픔으로 쳐낸 수많은 뼛가루들의 입장에서 페어한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자신도 역시 그런 뼛가루 가운데 하나라 생각했다. 서회장 앞에서 그 또한 깎아내고 싶은 걸리적거리는 뼛가루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힘이 부족했다. 그에게 충분한 힘이 있었다면 굳이 백수정을 죽이지 않고서도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서동윤이 아니었다는 데 대한 조롱과도 같은 탄식 뿐. 그가 강씨가 아닌 서씨였다면 그리 어렵게 무리하게 죄까지 지어가며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백홍석에 의해 결정적인 순간 좌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예 부딪힐 일도 없었다.

하기는 바로 그같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홍석의 가족을 힘으로 어떻게 한 자체가 지독한 자기부정이었을 것이다. 의도는 남았는데 의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의지를 잃었다면 그것은 허깨비나 다름없다. 허깨비가 대통령이 되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존엄이란 곧 양심이다. 양심을 찾음으로써 존엄을 되찾을 수 있다. 오히려 홀가분한 모습이 더 행복해 보이는 이유다. 그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최정우 검사의 백홍석에 대한 최후변론은 바로 그같은 공정한 사회에 대한 일갈이었을 것이다. 법만이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난이 장애가 되어서도 안되고, 힘이 없는 것이 죄가 되어서도 안된다. 법이 백홍석을 지켜주지 못했다면 어린 시절의 가난했던 기억 역시 강동윤을 지켜주지 못했다. 돈이 있다는 이유로 강동윤과 그의 가족이 삶에 개입해서 깊은 상처를 남긴 건물 주인이야 말로 강동윤이 처음으로 경험한 세상의 부조리이며 모순이었다. 건물 주인은 이제 서회장으로 모습만 바꾸고 있었다. 백홍석이 처벌받듯 강동윤도 처벌받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공정한 세상을 만드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는 백홍석도 강동윤도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서회장은 여전하고, 최정우가 뛰쳐나온 검찰에서는 박민찬(송영규 분)이 담당검사가 되어 백홍석의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바뀐 것은 아무엇도 없다. 깃털만 여러가닥 잘리고 바뀌었을 뿐이다. 남는 교훈이란 강동윤처럼 살지 말고 백홍석처럼 살라. 백홍석처럼 올바르게 욕심부리지 않고 만족하며 행복을 자기에게서 구하라. 그것만이 진정한 행복이다. 모두가 원래의 제자리로.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굳이 91.4%는 불가능한 투표율과 압도적인 표차로 일찌감치 낙선이 확정되는 강동윤의 모습이라는 것은. 잘 싸우고도 안타깝게 패한 영웅의 모습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밀리고 만신창이가 되어 일찌감치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패장의 모습이다. 희망조차도 남기지 않는다. 아쉬움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야말로 끝이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도 남긴 것이 없다.

굳이 강동윤을 동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죄를 지었다.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러야 한다. 백홍석 역시 마찬가지다. 심신미약이라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그는 냉정했으며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했다. 단지 현실이 그를 분노케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그를 내몰았다. 강동윤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죄를 지었지만 그것이 비단 강동윤 자신의 죄이기만 한가?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실패한 반역인가? 성공한 복수인가? 그러나 과연 세상은 정의로운가? 또다른 강동윤이, 혹은 백홍석이 우리 주위에 있지는 않은가? 그럼에도 말을 꺼내기조차 소심한 것이 이유가 된다. 후련하면서도 씁쓸한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누구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거나 기뻐할 수 없다. 현실이다.

어느새 벌써 15회다. 이제 16회 한 회가 남았다. 이대로 끝나려는가? 무겁다. 진지하게 고민한다. 드라마가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서도. 재미있다. 여운이 남을 것 같다. 진하게. 좋다.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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