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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7.12 09:41

각시탈 "슬픈 테러리스트, 그들이 범죄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전쟁이 아닌 폭력, 정의롭지만 불의한 싸움을 해야 하는 이들을 보다.

▲ 사진='각시탈' 포스터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테러란 곧 공포다. 공포야 말로 테러리즘이 추구하는 바일 것이다. 폭력을 통해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공포에 따른 혼란과 충격을 이용 대중의 심리를 자신이 의도한 바대로 움직인다. 폭력에 길들여진 맹수는 조련사의 가녀린 팔에 들린 채찍에 조차 굴복하고 만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다. 결코 전쟁이 될 수 없다. 전쟁이란 적의 전투역량을 파괴하는 것을 그 일차적 목표로 삼는다. 전투란 바로 적의 전투역량을 파괴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행위인 것이다. 도대체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총독을 암살한다고 해서 조선과 조선의 인민들이 일본에 대해 거둘 수 있는 승리란 무엇인가?

조선총독이 죽는다고 해서 당장 조선이 식민지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조선내 일본제국주의의 역량이 약화되어 손쉽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총독이 죽으면 다음 총독이 온다. 다음 총독이 죽으면 그 다음 총독이 온다. 총독은 많다. 하다못해 일본의 국왕이 죽는다 하더라도 그를 대신해 누군가는 국왕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조선은 식민지인 채일 것이다.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이들은 여전히 그들에 범죄자로 쫓기는 처지일 것이다.

승리를 하려면 일본제국의 군사력을 파괴해야 한다. 경제를 파괴해야 한다. 인적자원을 파괴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에는 그만한 역량이 없다. 조선독립군이라고 해봐야 고작 한줌이다. 상해임시정부의 요인이라고 해봐야 한 주먹거리다. 그렇다고 포기해야 하는가? 대신 한 명의 조선총독을 죽인다면 다음의 조선총독은 부담을 안게 된다. 두 명, 세 명, 계속해서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조선총독으로 오는 것을 꺼려하는 순간이 오게 될 것이다. 피해가 누적되다보면 그동안의 손실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협상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3.1운동을 기점으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보다 유화적으로 조선의 인민을 지배하려 입장을 바꾼 것이 그 예일 것이다.

그래서 테러를 한다. 일본에서는 수많은 예비총독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목담사리(전노민 분)이란 단 한 사람 뿐이다. 총독 한 사람이 죽는 것은 고작 생채기 하나에 불과한데 목담사리 한 사람이 잡히면 더 이상 대신할 사람이 없다. 하지만 해야 한다. 그것밖에는 없으니까. 그나마라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조선총독이야 아무나 앉으면 되는 자리지만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총독을 죽이는 의거는 목담사리가 아니면 할 수 없다. 그래서 비장하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도저히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 그의 의지이며 양심이다.

얼마나 잔인한 시대인가? 불의한 것을 안다. 그래서 불의한 것과 싸우고자 한다. 그런데 힘이 없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작은 하나에도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된다. 그 작은 하나를 위해 큰 목숨을 걸어야 한다. 고작 죽어봐야 왜놈 없는 천국이다. 그들에게 정정당당을 말한다. 합법을 말하고 도의를 말한다. 목담사리와 그의 동지들로 하여금 당당하게 일본과 맞서라고. 고작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나면 일개 범죄자로 무참히 구타당하고 짓밟혀야 하는 처지에 말이다.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에게 잡혀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는 그 모습 어디에 의사가 있고, 열사가 있고, 지사가 있는가? 그는 단지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어느새 잊고 있다. 당시 우리가 얼마나 절박했었는가를. 당시 얼마나 깊은 절망속에 살고 있었는가를. 조선총독이 아니다. 누구라도 상관없다. 일본인들에 조선인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알릴 수만 있다면 조선인들에게 아직 조선과 조선인이 살아있음을 알릴 수만 있다면 민간인이면 어떠한가? 무고한 민간인이던 기무라 슌지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우리는 지켜보아 알고 있다. 그는 일본인이었다. 목단(진세연 분)은 조선인이었다. 이강토(주원 분) 역시 조선인이었다. 굳이 조선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사는 세계 어디선가는 그렇게 절박함 속에 절망과 싸우는 가련한 정의들이 있을 것이다. 불의를 통해서라도 지키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면서도 슬퍼한다.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것을 안다. 죽으러 가는 길을 자랑스럽게 보내주면서도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평생의 아픔으로 남긴다. 한이 쌓이고 다시 한이 분노로 이어진다. 목단도 어쩌면 아버지처럼 목담사리가 그랬듯 목숨을 걸고 쌓인 한과 분노를 풀려 할 것이다. 그녀를 슬프게 하고 한스럽게 하는 모든 것들에 화를 내고 그것을 바로잡으려 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오명으로 얼룩질지라도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더 좋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 뿐 차라리 죽더라도 살아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고작 조선총독과 자신을 바꾸려 하는 목담사리와, 그런 목담사리를 구하려 필사적인 청년들과, 그 목담사리를 단지 범죄자로써 무참히 폭행하는 기무라 슌지, 남겨진 목단, 그리고 목담사리로 인해 두려움에 떠는 이시영(안석환 분)과 다른 많은 사람들. 콘노 코지(김응수 분)로 하여금 그런 시도조차 없어야 한다고 다그치도록 만드는 그것이다. 독립에 대한 희망조차 없이 단지 불의에 맞서려 그렇게 자신을 내던지고 산화한 이들이 그리 많았다. 지금에 와서야 단지 독립운동가라는 한 마디로 그들을 정의하고 있을 뿐이지만.

어쩌면 무모한 것이다. 아니 분명 무의미한 것이다. 무가치할지도 모른다. 도대체 테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다고 조선의 합병은 저지되었는가? 윤봉길의 의거조차 전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해야 한다. 해야 하니까. 그것이 옳으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누가 무어라 하더라도. 어느 누가 어떻게 그것을 평가하더라도. 그래서 각시탈도 범죄자가 되어 일본제국주의의 법과 질서에 도전한다. 단지 일본인을 때려누이는 것만으로도 의거가 된다. 그런 시대가 있다. 그조차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말 그대로일 것이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각시탈이란 단지 폭력사범일 것이다. 살인자이고, 방화범이고, 공권력에 도전하는 반체제 사범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상대가 일본이고 우리들 자신이 한국인인 때문이다. 일본을 부정하고 일본의 체제를 부정한다. 일본의 가치와 질서, 규범을 부정한다. 가장 적극적인 투쟁일 것이다. 비타협, 불복종, 그리고 더해 폭력. 그를 영웅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그는 정의로운 테러리스트다.

아무튼 마침내 기무라 타로(천호진 분)와 기무라 슌지가 이강토의 정체를 눈치채기 시작했다. 하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각시탈 있는 곳에 이강토가 없고, 이강토 있는 곳에 각시탈이 없다. 자신의 손으로 잡은 목담사리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과연 의심은 의심으로만 끝날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위기로 각시탈을 내몰 것인가?

여전히 조국을 말하지 않는다. 민족을 말하지 않는다. 분노만을 말한다. 불의와 부당함에 대한 분노다. 분노가 그 불의와 부당함을 부수려 한다. 테러리스트의 이야기다. 과연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는가? 아무런 명예조차 남지 않는 싸움이다. 눈물을 흘린다. 그들을 떠올린다. 기억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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