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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6.29 09:08

각시탈 "기무라 타로와 키쇼카이의 음모, 드라마의 목적을 읽다."

기무라 슌지의 후회와 그가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참으로 미묘하다. 과연 이것을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지배의 폐해라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을 미워하라고? 일본인을 원망하라고? 그러나 과연 일본과 일본인만의 문제인가?

일본인 자본가가 있다. 종로시장에 백화점을 짓고 싶어한다. 상인들을 내쫓기 위해 공권력을 동원해 압박한다. 그리고 끝내는 조영근(고인범 분)과 같은 협잡꾼을 동원해 상인들의 재산을 속여 빼앗으려 한다. 나쁜 일본놈들! 하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은 일본정부도, 조선총독부도 아닌 키쇼카이라는 일개 사조직에 불과하지 않은가. 심지어 조선총독은 그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더구나 과거 일제강점기라고 하는 특수한 배경을 가진 시대의 이야기라기에는 너무나 익숙하다. 아마 그 장면 그대로 시간만 바꾸어 현대로 옮겨 놓더라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이다. 아니 다를 것이다. 해방되고도 무려 반 세기가 넘게 지난 현대의 대한민국에는 공익사업법이라는 법이 있으니까. 정부나 지자체가 이미 공익적인 목적을 갖는 사업이라 판단한다면 더 이상 해당 주민들의 반대나 반발은 의미가 없어진다. 강제로 토지수용에 들어간다. 보상금을 받고 순순히 땅을 비워주거나, 아니면 끝까지 버티다 사설용역들에 의해 강제로 내쫓기거나.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공익적 목적성은 판단하는데 키쇼카이와 기무라 타로(천호진 분)가 개입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많이 보았다. 살던 집을 잃고 울부짖는 아낙들을. 용역들에 의해 무참히 폭행당하는 어른들을 보며 우는 아이들도. 그것을 경찰이 지켜보고 있었다. 공무원들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폭력에 저항하려 하면 오히려 체포된다. 범법자가 되어 처벌당한다. 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결정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따라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강제당한다. 드라마속 상황과 현실에서 흔히 보는 그와 같은 모습들이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말했듯 키쇼카이란 고작 일본내 사조직에 불과하다. 종로경찰서장인 기무라 타로의 공적인 권력이 아닌 조영근이라는 협잡꾼의 사적인 사기에 의해 종로시장의 상인들은 그 터전을 잃을 위기에 놓여 있다. 물론 본격적으로 공사에 들어가려 할 때 상인들이 반발한다면 그때는 어떤 형태로든 폭력이 풀려지게 될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다.

해방만 된다면 더 이상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강제로 땅을 빼앗기는 일도, 그 과정에서 부당하게 억압받고 강요당할 일도, 그 모든 억울함을 억지로 참아내야 하는 일 또한 역시. 하지만 어떠한가? 일본인들은 물러갔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해 차지하고 있다. 일본인이 있기 전에는 조선의 전근대적인 봉건적 지배가 있었다. 단지 그 대상과 수단만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과연 당시 시장상인들이 느껴야 했던 고통이, 아니 주인공 이강토(주원 분)가 느껴야 했던 절망이 일제강점기이기에만 가능했던 것이었을까? 일본인들만 물러간다면 더 이상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이었을까?

그래서 항상 생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가 진정 의도하고 있는 것은 '각시탈'이라고 하는 영웅도 아니고, 일제강점기라고 하는 특수한 시대도 아닌, 그야말로 보편의 인간이 아닐까? 권력이라고 하는, 지배와 피지배라고 하는,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욕망과 갈등일 것이다. 시대의 모순이며 부조리인 것이다. 드라마 초반 재판정에서 목담사리(전노민 분)가 재판장을 일갈하던 모습은 비단 일본제국주의만이 아닌 모든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것이었던 셈이다. 어차피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그다지 없다. 그렇다면 목담사리나 이강토나 무엇을 위해 일본과 싸우는가?

소박한 삶을 꿈꾸었다. 작지만 자기 땅을 아내와 자식과 일구며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삶을 꿈꾸었다. 형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형이 성공만 한다면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형이 꺾이고 말았다. 죄인이 되었고 감옥에서 미쳐서 나왔다. 그리고 그 형을 마침내 이강토는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말았다. 목담사리 역시 그 소박한 꿈이 결코 현실로 이루어질 수 없는 시대적 모순을 보았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다.

일본이라서가 아니다. 일본인이라서도 아니다. 일제강점기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이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가장 존엄하고 가장 존엄하려 하는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담사리는 그토록 아끼던 가족마저 뒤로 한 채 일본과의 싸움에 나서고, 이강토 역시 형이 못 다 이룬 뜻을 이루기 위해 홀로 일본의 칼잡이들이 지키는 곳으로 뛰어들어간다. 굳이 일본과 일본인을 다른 무엇으로 바꾼들 어떨까? 일본제국주의와 일제강점기에 분노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일본이어서가 아니라 그 불의함과 무도함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본능적 거부감인 것이다.

높은 이자를 주겠다고 조선인들을 속여 돈을 가로챈 조영근이나, 그로부터 얻은 이익을 키쇼카이로 보내 쓰도록 하는 기무라 타로나, 더 이상 조일은행으로부터 수입을 기대할 수 없자 새로운 돈줄을 찾아 나서는 키쇼카이나, 그러고 보면 불과 얼마전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일로 한 번 세상이 시끄러울 뻔했던 것이. 일제강점기가 아니다. 지금이다. 지금의 우리들이다. 그 이야기를 한다.

어째서 인간은 후회할 일을 저지르는가? 벌써부터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는 후회하고 있다. 친구인 이강토와 적대하려 한 것을, 그토록 사랑하던 목단(진세연 분)과 거리를 두려 한 것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다. 그는 일본인이다. 종로경찰서장 기무라 타로의 아들이다. 형인 켄지가 죽었으니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한다. 키쇼카이에도 몸담게 되었다.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아버지를 거스르거나 거역하지도, 이제는 키쇼카이에 대항할 생각조차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비겁한 것이다. 두려운 것이다. 당장의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일상을 거스르는 것이. 그것을 부수고 헤어나는 것이. 이미 한 말이 있다. 이미 한 행동이 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기세라고 한다. 그러나 역시 호랑이를 잡자면 먼저 호랑이에게서 뛰어내려야 한다. 호랑이에게 먹히거나. 아니면 호랑이를 잡아먹거나.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아래 현실에 순응하며 점차 물들어간다. 그것이 원래의 자기 색깔이라는 듯이. 그것이 친구인 이강토를 멀어지게 하고, 사랑하는 목단이 눈물짓게 한다. 아마 사람이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어도 세상은 더 살기 좋아졌을 것이다.

갈등에 휩싸인다. 고민에 빠져든다. 단지 복수에 불과했다. 자신의 손에 죽은 형에 대한 죄갚음일 뿐이었다. 형이 이루지 못한 것을 대신 이룬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형을 죽게 만든 복수를 한다. 그것이 전부였다. 국가따위. 민족따위. 조선이며 조선인따위. 그런데 목단이 다가온다. 목단을 통해 목담사리가 접근해온다. 민족적 각성을 일깨운다. 아니 그 이전에 조선의 인민에 대한 연민과 신뢰다. 영웅이 된다. 그는 벌써 종로시장 상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다.

목담사리와 각시탈의 만남은 하나의 계기다. 개인적 복수와 보편적 추구가 하나로 만나게 된다. 목담사리도 거쳐운 길이다. 목담사리는 아버지의 대신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각시탈의 싸움에도 점차 목적이 붙기 시작한다. 새로운 탄생이다. 목단과의 관계는 어찌될까? 짐짓 심술을 부리는 듯 바지까지 걷어올리고 목단의 빨래를 돕는 장면은 차마 귀여웠다. 이리 귀여운 남자던가, 이강토는?

더욱 재미있어지고 있다. 이야기의 스케일도 커진다. 조선총독에게 테러를 가하려 한다. 조선에서 무소불위인 존재를 쓰러뜨리려 한다. 일본의 대응도 만만치 않다. 각시탈에게는 각시탈을 위해서라도 목담사리가, 목담사리에게는 각시탈이 필요하다. 이강토의 목단의 오해는 깊어진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다. 일제강점기이든, 해방후 반세기가 넘게 지난 대한민국이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갔다. 슬픔과 분노의 기원일 것이다. 안타깝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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