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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6.25 10:25

넝쿨째 굴러온 당신 "방장수의 분노, 남자가 화내는 법에 대해..."

남자의 분노가 방귀남이 방장수의 아들임을 확실히 깨닫게 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바로 남자의 분노라는 것일 게다. 차라리 자기 일이라면 용서할 수 있다. 자기와 관계된 일이라면 그까짓것 동생이고 제수인데 용서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아들이다. 그리고 아내다.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자기가 지켜야 할 자기의 가족이다. 용서할 수 없다.

조용하던 남자가 화를 낸다. 항상 점잖고 침착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된 듯 거칠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심지어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동생에게 폭력까지 쓴다. 술에 취해서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늙으신 어머니에게 목소리까지 키워가며 원망을 토해낸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무엇을 탐내거나 얻고자 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 순간 방장수(장용 분)가 보고 있던 것은 다름아닌 아내 엄청애(윤여정 분)였다. 그녀를 위해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어쩌면 방귀남(유준상 분)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만 방장수는 그렇게 강하게 자신의 분노를 드러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미안함이었다. 물론 방귀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엄청애의 경우는 바로 그의 눈앞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방장수 자신도 가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내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아내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자신도 알고 있었음에도, 그런데도 방향을 잃은 좌절과 분노가 그녀에 대한 원망으로 나타나고 말았다. 굳이 드러내놓고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 모든 죄를 끌어안고 그 모든 원망을 받아야 했던 그녀에게 방장수는 한 번 따뜻한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그것이 죄가 되었다. 마음의 빚이 되었다. 그동안은 어쩔 수 없었노라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 스스로를 설득하며 납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유가 다른 곳에 있었다 한다. 그 모든 책임이 다른 누군가에게 있었다고 한다. 전혀 엉뚱하게 오해한 것이다. 오해도 아니다. 그저 힘없는 아내에게 모든 짐을 지운 채 혼자서만 편하려 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내 엄청애 자신이었을 텐데도, 그런 아내를 탓하고 원망함으로써 자신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죄의 원인이 밝혀지고 말았다. 자신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었다.

자식을 잃은 죄와 아내를 보살피지 못한 죄, 그런 주제에 비겁해지려 했던 죄, 그러나 비겁해질 수 없는 방장수는 남자라는 것이었다. 그는 남자이면서 아버지이고 남편이었다. 자식에게는 아버지이고 아내에게는 남편이었다. 어머니에게는 자식이었다. 그래서 분노한다. 분노하면서도 자학한다. 죄가 무거운 이유다. 단지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큰 짐을 지고 큰 상처를 남기게 된다. 물론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 한정된 이야기다. 방장수는 그래서 남자다.

방귀남이 누구에게서 배워 저렇게 반듯하게 자랐는가? 씨도둑질을 못한다는 옛말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그렇게 따진다면 방장수와 방정훈(송금식 분) 또한 같은 부모를 둔 형제였을 터였다. 그보다는 아직 부모로부터 떠나기 전 어려서 보았던 아버지의 등이 그의 기억에 화인처럼 남아 있던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며 자라난다. 이역만리 먼 미국땅에서 전혀 생소한 삶을 살게 되었음에도 한 번 각인된 아버지의 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무의식이었을까? 모든 진실을 알았으면서도 가족을 위해 그것을 덮으려 한 그의 용기가 그래서 무척이나 멋지고 공감된다. 아버지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닮은 아버지와 아들일 것이다.

남자란 그런 것이다. 다른 누군가로부터 무엇을 뺏고자 남자에게 육체적인 힘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키라는 힘이었다. 외부로부터 여자와 아이를 지키라고 남자는 보다 강인한 육체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남자라고 하는 이름이다. 남편이며 아버지라고 하는 이름이다. 방귀남의 이름이기도 하다. 하기는 방정배(김상호 분) 역시 남자였을 것이다. 비록 밖에서의 모습은 어떨지 몰라도 집안에서 그는 누구보다 든든한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가장이었다.

엄청애 또한 그런 점에서 또다른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걱정이 많다. 그렇게 마음 가는 곳이 많다.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우리 어머니도 그러신다. 잠시도 걱정을 놓지를 못하신다. 무언가를 손에 쥐고, 반드시 무언가를 하고 계셔야 한다. 그러면서도 잠시의 휴힉은 무척 꿀맛이다. 한가함이 익숙지 않으면서도 무척이나 반갑다. 오랜만에 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즐겁다. 이제는 조금 여유를 즐길 때도 되었다. 아들 방귀남을 찾으며 쫓기듯 살아온 그녀의 일상에도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모든 어머니들에게도 여유와 풍요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차윤희(김남주 분)의 도움으로 방일숙(양정아 분) 또한 매니저로서 자신의 첫일을 훌륭하게 처리해낸다. 자신의 가수 윤빈(김원준 분)을 위해서 그녀는 당당히 PD에 맞서 그의 권리를 지켜내고 쟁취해낸다. 더 이상 어머니에게조차 무시당하던 방일숙이 아니다. 전남편 남남구가 만나자고 하는데 딸 민지만 내보내겠다 당당히 말한다. 과거에는 그녀가 남남구에게 의지했지만 지금은 윤빈이 그녀를 의지하고 있다. 남편만 보고 살던 과거와 달리 그녀는 홀로 걸어간다. 홀로서려 하고 있다.

방이숙(조윤희 분)이 걱정스럽다. 원래 만족이란 체념의 다른 표현이다. 체념하고 포기하면 단지 현재로 만족스러울 수 있다. 아직 20대에 불과한 아가씨가 아무런 판타지조차 없이 현실만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도 사실 정상은 아니다. 세월에 부대끼며 마모되었을 때 사람은 비로소 현실에 안주할 수 있게 된다. 착하고 성실한 것도 좋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 버린 그녀의 삶이 때로 안타깝다. 그런 점에서 천재용(이희준 분)이란 그녀의 답답한 일상에 주어진 어떤 보상이 아니었을까. 초월적인 의지를 가진 존재가 있어 방이숙의 그같은 억눌린 일상의 엄격함을 부수어주고 싶었던 것일 게다. 딱 어울린다. 적당히 소심하고, 적당히 착실하고, 적당히 제멋대로인데다, 일상에서 벗어난 재벌3세라는 특별한 신분의 남자라는 것은. 다만 아직 그녀는 껍질을 벗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천재용의 앞날은 아직도 험난하기만 하다. 비로소 솔직해질 수 있게 된 것 같기는 하다.

차진요의 기세가 무섭다. 방장군(곽동연 분)에 이어 친구이자 라이벌 박만식까지 붙었다. 학생증도, 학교에서 찍은 사진도, 이제는 재학증명서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아닐 가능성만 따진다면 세상에 의심가지 않는 것이 없다. 역시나 지적으로 보통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그들이기에 그 선을 알지 못한다. 의심이란 어디까지 허락되며 어디까지 합리적이라 말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불과 2년전 날뛰던 수많은 네티즌과 대중이 그랬다. 철저히 조롱한다. 그들이야 말로 방장군과 박만식의 수준이라는 것을. 그러고 보면 방장군은 참 착하고 성실하기도 하다. 어리석은데 성실하면 모두가 피굔해진다.

차세광(강민혁 분)과 방말숙(오연서 분)의 관계가 마침내 차윤희에 의해 들킬 위기에 처했다. 가장 큰 적일 것이다. 가장 방말숙과 감정의 골이 깊고, 차세광에 대해서도 공포로써 판단을 강요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필 차세광의 어머니 한만희(김영란 분)와도, 형수인 민지영(진경 분)에게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지 못하다. 사방이 적이다. 한 대로 돌려받는다고 하필 차세광을 사랑하게 된 탓에 모두를 적으로 만나고 있다. 절대 이기려 해서는 안되는 질 수밖에 없는 적들이다. 지더라도 차세광과는 사이를 지켜가고 싶다. 과거에는 참으로 미웠지만 이제는 가엾기까지 하다. 헤어지자는 차세광의 말에 애원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다. 과연 이들의 사랑은 이어질 것인가? 험난한 사랑의 여정에 올케 시누이의 가호가 있기를.

소름이 돋으려 하고 있었다. 조용하지만 차갑게 들끓는 분노에. 머리는 끓어오르는데 몸의 피는 차갑게 식는 것 같다. 분노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마냥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더 단호하게 입장을 정리함으로써. 애원하고 사정해야 하는 것은 장양실(나영희 분)과 남편 방정훈이지 방장수나 아내 엄청애가 아니다. 방귀남도 아니다. 체구도 작은데 역시나 그는 아버지였다. 가장이었다. 남자였다. 굳이 연기에 대해 언급을 않는 것은 그가 바로 장용인 때문이었다. 새가 하늘을 난다고 해서 칭찬하지 않는다. 물고기가 바다를 헤엄치는 것을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는 장용이다.

재미있다. 분명 화해할 것이다. 그것이 드라마다. 드라마일 것이다. 하지만 화해는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강제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권리다. 어떻게 방장수와 방귀남, 그리고 엄청애는 장양실을 용서할 계기를 찾을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을 증오하는 것도 자신에게 무척 가혹한 일이다. 증오란 무엇도 생산해내지 못한다. 소모하며 파멸시킬 뿐이다.

차윤희의 새로운 인연이 흥미롭다. 방귀남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양부모에게 입양되었었다. 양부모는 그를 친자식처럼 사랑으로 길러주었다. 그런 방귀남과 차윤희 앞에 차윤희에게서 모성을 구하는 아이가 나타났다. 몸으로 아이를 낳고 가슴으로 아이를 낳는다. 아마 이 또한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 어울리는 주제의식이며 메시지일 것이다. 방귀남이 이처럼 행복하게 훌륭하게 자랐다면 다른 아이들도 그럴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세상에 빚을 지며 그 빚을 갚으며 살아간다.

차윤희의 임신에 따른 주위의 공격이 심해진다. 아예 차윤희의 노력마저 아무렇지 않게 가로채려 하고 있다. 방귀남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이를 가지라 한다. 아이를 낳으라 한다. 차윤희가 겪는 모습이 현실이다. 실제 필자의 경우 출산을 몇 주 앞두고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던 여성을 알고 있다. 임신이 일을 하지 못할 장애가 되지는 못한다. 출산은 어쩔 수 없지만 임신은 아니다. 그녀의 슬기로운 대처를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하나같이 그녀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과연 차윤희는 새로운 인연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방말숙과 차윤희의 입장역전은 어떤 편지풍파를 몰고 올 것인가? 차세광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윤빈은 재기할 수 있을 것인가? 남남구와 다시 마주한 방일숙을 상상해 본다. 고옥(심이영 분)의 눈물이 무척 아프다. 조윤희의 사랑은 여전히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차진요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가볍다.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다. 무겁다.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다. 수많은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아우르는 재미가 있다. 기분좋게 웃으면서도 생각을 가져볼 수 있다. 남이 아니다. 우리다. 아버지이고 어머니이고 누이이고 형제다. 가족이다. 가족드라마다. 진지하지 않게 진지해진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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