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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6.18 10:40

넝쿨째 굴러온 당신 "진실과 죄의 무게, 용서가 아닌 타협을 선택한 이유..."

윤빈과 방송국PD의 사정, 방송과 대중의 속성을 비판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누구나 현실에서 흔히 겪게 되는 딜레마일 것이다. 진실인가? 아니면 평화인가? 진실을 지키고자 평화를 해칠 것인가? 아니면 평화를 지키고자 진실을 덮을 것인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더 이상 전처럼은 지낼 수 없다. 이제까지의 평화롭던 일상은 깨지게 된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하기에 진실이다.

언론의 자유와 관련해 끈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언론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언론의 알릴 권리와 대중의 알 권리를 위해 사회는 어디까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가? 나라에 해가 되고, 사회에 해가 된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진실이기에 기꺼이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알려야 하고 알아야 하는 것인가?

결국 여기서도 적용되는 것이 바로 비례의 원칙일 것이다. 진실의 크기가 크고 가치가 높다면 얼마든지 더 많은 비용을 치르더라도 그것을 알릴 수 있어야 하고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러나 진실의 크기와 가치에 비해 그것을 알리거나 알기 위해 치러야 할 댓가가 지나치게 크다면 어느 정도 배려가 필요하다. 자칫 불필요한 피해와 희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가족들이 받을 충격과 고통을 걱정해 작은어머니 장양실(나영희 분)에 대한 진실을 묻어두려는 방귀남(유준상 분)처럼.

반드시 알려야 할 진실이다. 반드시 모두가 알아야 할 진실이다. 그로 인해 방귀남이 가족들과 헤어졌다. 그로 인해 가족들 역시 방귀남을 잃고 수십년을 고통속에 살아야 했다. 특히 방귀남을 잃어버린 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방이숙(조윤희 분)은 아직도 자신을 온전히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방귀남을 만나 가족들이 모두 웃을 수 있게 되었는데 다시 진실을 밝히겠다고 가족들 사이에 편지풍파를 일으키려는가? 그로 인해 작은어머니 장양실을 믿고 의지해 온 어머니 엄청애(윤여정 분)과 할머니(강부자 분)의 충격은 어찌할 것인가?

결코 쉽게 내린 결론이 아니었다. 오랜 고민이 필요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들어야 했다. 시아버지 방장수(장용 분)의 걱정은 그래서 진실하며 슬프다. 며느리 차윤희(김남주 분)가 말하는 진실이 무엇인가 자신도 궁금하지만 모두를 위해 차라리 묻어두기를 바란다. 그는 차윤희와는 달리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세 딸과 다시 찾은 아들을 지켜야 하는 가장의 입장이다. 장남으로서 동생인 방정훈(송금식 분)과 방정배(김상호 분)의 가족까지 책임져야 한다. 알고 싶어도 알아서는 안된다.

방송작가의 조언은 시아버지의 충고보다 더 직접적이었다. 어느새 한 편의 막장드라마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진실로 인해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각각의 개인들의 삶은 파탄나고 만다. 비록 방송작가 개인의 작가적 상상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감히 차윤희로서는 그같은 결과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끔찍하기만 할 뿐이다. 장양실이 지은 죄의 무게다. 장양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죄의 무게이건만 진실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차윤희까지 그것을 함께 짊어져야 한다. 진실이 갖는 무게다. 진실은 때로 죄보다 더 무겁다.

물론 용서는 아니다. 용서란 그렇게 쉽게 입밖에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모든 잘못을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대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용서라 말한다. 앙금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납득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음을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타협한다. 장양실의 죄와 자신의 원망과 그리고 가족의 평화와 행복을 두고. 차라리 모든 것을 묻고 가더라도 진실을 모른 채 웃을 수 있으면 좋다. 거짓된 기만일지라도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으면 좋다. 그것을 때로 어떤 사람들은 용서라 착각하는 모양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지혜다. 사람이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비결이다. 일일이 다 용서하고, 용서하지 못하면 결국 등돌리고 살아가게 된다. 무리는 유지될 수 없다.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적당히 타협한다. 용서하지 못하면서도 용서한 것처럼. 용서받지 못했음에도 용서받은 것처럼. 사실은 거래다. 진실을 양보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누르는 댓가로 방귀남은 가족의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얻는다. 방귀남의 가족이 웃게 하는 대신 장양실은 자신의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더 이상 손윗동서인 엄청애와 시어머니로부터 미움받지 않아도 된다. 해결된 것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사람은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여전히 장양실을 보면 불편한 방귀남의 표정과, 장양실과 같이 마주보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차윤희의 태도와, 모든 것이 해결된 듯 다행스럽다 말하면서도 내내 쫓기는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는 장양실의 모습에서, 하지만 정작 그들을 제외한 누구도 진실을 알지 못하고 진실에 대한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한다. 평화는 유지된다. 가족도 유지된다. 어머니 엄청애의 생일에 모든 가족이 모여 근사한 식사를 하려 한다. 하필 그런 자리에서 차세광(강민혁 분)과 방말숙(오연서 분)이 차윤희를 사이에 두고 만날 것이 무언가?

정말 하필이다. 하필 방귀남이 방장수와 엄청애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직전 차윤희와 엄청애 모녀는 크게 다투고 만다. 다시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로 크게 다투고 사실은 서로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차윤희와 차세광이 서로 남매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바로 직전 차윤희와 방말숙이 마지막으로 부딪힌다. 차윤희도 방말숙이 사실은 차세광이 사귀는 여자라는 것을 그때까지는 몰랐었다. 시어머니의 솜씨인데도 방말숙이 싸왔다는 반찬을 맛보고서도 전혀 의심조차 못한 것은 차윤희 특유의 대범함이라 할 수 있을 테지만 말이다.

어떻게 될까? 시누이와 올케의 사이가 서로 뒤바뀌게 될 두 사람은. 사실은 그를 위한 장치였다. 그래서 방말숙은 지독한 시누이였고, 그런 그녀로 하여금 차세광을 만나게 한 것이다. 방말숙이 차세광이라면 꺼뻑 죽도록 만든 것도 마찬가지였다. 차세광이 아니면 죽고 못살 정도가 되어야 시누이가 된 차윤희를 감당할 수 있다. 상황역전이다. 방말숙에게는 고난의 시간이, 차윤희에게는 복수의 시간이 돌아왔다. 물론 차윤희가 그렇게 경우가 없는 여자는 아니다.

천재용(이희준 분)의 고난의 시간은 갈수록 끝이 보이지 않는다. 방이숙은 말 그대로 곰이다. 곰이라기보다는 달팽이다. 단단한 껍질 속에서 밖의 사정따위 아예 보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기에 대한 비판에는 어느새 발끈하면서도 그러나 열등감에 휩싸여 어느새 자기 안으로 침잠하고 만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도 따라서 단단한 껍질 속에 숨어든  자신을 끄집어내 줄 누군가일 것이다. 세상은 안전하다, 모두가 너를 존중해주고 사랑해준다 말해줄 수 있는 누군가일 것이다. 누구일까?

하여튼 방이숙을 위해 생일파티를 열고서도 그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는 천재용의 소심함이 문제인 것이다. 마치 첫사랑에 설레는 소년과도 같이 천재용은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데 솔직하지 못하다. 사람은 나쁘지 않은데 치사하고 뒤끝이 있다. 부하직원에게 약점을 잡힌 이유이고 그럼에도 부하직원이 그의 편을 들게 되는 이유다. 단지 소심하고 치사한데다 뒤끝이 있을 뿐이다. 사람은 좋다. 그의 어려운 사랑을 응원해 본다.

윤빈(김원준 분)이 방송국 PD에 의해 일방적으로 당하는 상황은 마치 어느 서바이벌프로그램의 이야기를 빗댄 것 같다. 사실 PD만이 아니었다.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동의한 것 아닌가? 그런 프로그램이라는 걸 알고서 출연하기로 한 것 아니던가? 그래서 검색어 순위도 올라가지 않았던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지 않았던가? 태연히 누군가를 비난하는 글을 쓰던 그 손가락으로. 윤빈에게도 그랬을까? 그렇더라도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으니 어떤 비난도 감수하라.

연예인이란 소모품이다. 방송국 입장에서도. 대중의 입장에서도.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많다. 방송국이나 대중의 입장에서 오히려 간절히 필요한 몇몇 대스타를 제외하고 어차피 그들이 아니더라도 방송국과 대중의 힘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연예인과 연예인 지망생은 너무나 많다. 싫으면 그만두라. 태연히 소모품처럼 이용하고 버린다. 그래서 아마 첫머리에 언급한 그 부분과 어우러져 한 바탕 크게 일어났던 것이 타진요 파동이었을 것이다. 진실따위는 상관없이 오로지 연예인을 소모품으로, 대상으로서만 소비하려 한 결과가 한 인간을 파멸시키고자 한 악의로 드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전혀 세상물정 모르는 것 같던 방일숙(양정아 분)이 반격을 위한 단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이제는 칼자루가 방일숙의 손에 쥐었다. 계기가 만들어진다. 윤빈의 재기와 윤빈의 재기에 힘입은 방일숙의 홀로서기가. 통쾌한 반전과 직설적인 비판이 속이 후련할 정도다. 그로 인해 행복해지는 이가 있다는 것이 그래서 시리도록 시원해진다. 즐겁다.

세상 모든 일에는 나머지가 있다. 그 나머지가 경계를 이룬다. 완전한 용서도 완전한 화해도 없다. 완전한 증오도 완전한 원망도 없다. 그래서 사람은 갈등하고 다투면서도 서로 어우러질 수 있다. 더구나 가족이다. 참 무서운 단어다. 가족이란. 가족이란 단어의 무게를 계량하려 한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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