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6.15 08:16

유령 "존재와 인식의 경계, 제목이 '유령'인 이유에 대해..."

사실과 사실이 만나 거짓이 되고 마는 이유, 인간과 인간의 사회에 묻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태초에 말씀이 있으니 그로써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종교적 가르침은 존재와 인식에 대한 아주 오래된 신화적 이해에서 출발하고 있을 것이다. 실재하는 것은 비로소 인식을 통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같은 인식을 매개하는 것이 다름아닌 언어다.

보이지 않는다면 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져지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면 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노란색을 띄고, 달콤한 향기를 풍기고, 혹은 꽃병에 꽂혀 있고, 무엇보다 그것이 국화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다못해 꽃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존재하게 된다.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수많은 꽃들 가운데 그렇게 아주 일부만이 세계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작용이다. 그래서 세계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달콤한 향기를 풍긴다. 그것을 사람이 맡는다. 작용을 통해서 그것을 인식한다. 노란색인 것을 알고, 꽃잎이 겹겹이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고, 늦가을에 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붉은 색 국화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노란색 국화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쉽게 국화로서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도 역시 붉은색 국화를 국화로 여기게 하는 것은 기존의 또다른 국화를 정의하는 정보일 것이다.

다만 문제라면 바로 그와 같은 인식의 주체가 다름아닌 인간 자신이라는 것일 게다. 인간의 감각기관과 인간의 불완전한 인지을 통해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발생하게 된다. 새는 하늘을 난다. 새에게는 날개가 달려 있다. 하지만 박쥐는 하늘을 날고 날개도 달려 있지만 새가 아니다. 아니 과연 하늘을 날고 날개까지 있는데 박쥐를 새로 분류해서는 안되는 이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주 오래전 많은 사람들은 물에 살고 지느러미까지 있는 고래를 물고기의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 물론 물고기와 어류는 어쩌면 다른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일 것이다. 조류와 새도 다르다.

참으로 통쾌한 반전이었다. 아니 반전이라기보다는 필자의 착각이었다. 이미 김우현(소지섭 분)이 하데스 박기영(최다니엘 분)이라는 사실을 보아 알고 있었다. 여기에 권혁주(곽도원 분)가 하나둘 우연과 필연이 겹치며 김우현이 사실은 박기영이라는 눈치채고 확인하는 과정까지 TV를 통해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과 사실이 만난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또다른 직접 눈으로 확인한 사실에 의해 밝혀지려 하고 있었다. 이제는 진실과 마주하는 것만이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박기영은 김우현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김우현의 얼굴을 하고 있다. 김우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와 마주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김우현이라 여기고 대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다고 그는 김우현이 되는가? 그가 김우현이 되어야 하는 객관적인 증거는 넘치지만 정작 김우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이 박기영이라 인식하고 있다. 그것을 그가 김우현이 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운 유강미(이연희 분)가 증언해준다.

논리와 근거가 반드시 사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지가 인식을 담보하지도, 인식이 존재를 담보하지도 않는다. 존재와 실재는 사실 전혀 별개일 수 있다. 그래서 제목도 <유령>인 것이다. 유령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다. 실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같은 모순된 경계에 존재하는 것을 주로 유령이라 부른다. 김우현이지만 김우현이 아니며, 김우현이 아니지만 현실에서 김우현인 김우현의 모습을 한 박기영처럼 말이다. 존재하는 것은 김우현인가? 아니면 박기영인가? 그러나 실재하는 것은 분명 김현우가 아니다.

사실 그것은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온라인상의 네트워크와도 무척 닮아 있다 할 수 있다. 온라인의 네트워크란 기본적으로 텍스트를 전제로 이루어진다. 온라인을 오가는 모든 정보는 0과 1의 문자열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여러 전제와 단서를 만나 하나의 구체적 형태를 띄게 된다. 여러 구체적인 근거들에 의해 기의로 이루어진 기호적 실체일 것이다. 그것을 잇는 것이 관념에 존재하는 논리적 구조다. 네트워크는 상호작용을 통해 그것에 존재를 부여한다. 물론 배전반에 물을 끼얹어 강제로 누전을 일으키자 바로 사라져버리는 신기루와 같은 존재다. 하지만 충분히 그 영향력은 현실세계에서도 중요하게 서로 작용하고 있다.

김우현이 김우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 그렇다. 김우현이 김우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어떻게 권혁주가 확보한 그같은 근거들은 김우현이 김우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가? 어떻게 김우현이 사실은 박기영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줄 수 있는가? 하지만 근거라는 것도 결국 존재다. 그것이 존재하는 논리란 사실과의 상호작용 속에 존재한다. 그 상호작용을 바꾼다. 기표와 기의의 상호작용을 비틀어 놓는다. 논리적 구조가 비틀리며 근거들은 전혀 다른 사실을 가리키게 된다. 근거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만으로도 절대 부족하다.

사실상 사기다. 하지만 바로 그와 같은 기만 위에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불교가 공이라 말하고, 도교에서는 허라 말하는 그것이. 인간의 인지란 얼마나 허무한가? 인간의 인식이란 얼마나 허술한가? 따라서 존재란 또 얼마나 무의미한가? 말장난일수도 있지만 드라마의 주제와 어우러지며 박기영이 권혁주의 의심으로부터 한 숨 돌리는 장면이 꽤나 의미심장하다. 사람이 죽어 영혼이 유령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지만 여전히 현실에서 그는 작용하며 존재하게 된다.

조현민(엄기준 분)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재한다. 실제 현실에서 역할도 하고 작용도 하건만 실체가 없으니 실재란 없다. 유령과도 같다. 보이는 것이 실체가 아니다. 단지 시청자라고 하는 특별한 지위의 힘을 빌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다. 기믹이다. 바로 거기에 필자도 속았다. 필자가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은 전혀 보이고 있지 않다. 필자가 존재하고 있다고 여긴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유쾌하다. 제목을 떠올리게 된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아쉽다면 그렇게까지 국가적인 규모로 사건을 일으키고서는 고작 노리는 것이 곧 인수할 '세이프텍'이라는 보안업체의 가치를 높이려는 것에 불과했다는 점일 것이다. 비례의 문제였다. 얻게 될 이익에 대한 들어가는 노력에 대한 것이었다. 허무할 지경이었다. 허탈해지고 있었다. 차라리 이것이 시작이 되어 더 큰 음모를 꾸미려 한다. 그만한 스케일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0과 1의 문자열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의 세상에 대한 우화였을 것이다. 그동안 느껴온 그대로 네트워크의 세상을 고스란히 현실로 옮겨 놓았다. 어느새 얼굴과 이름을 바꾸어 간단히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박기영이 그것을 보여준다. 온라인에는 거짓도 진실도 없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도 거짓도 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흥미롭달까?

결국 권혁주는 김우현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고 그를 뒤쫓게 된다. 비밀을 간직한 주인공을 뒤쫓는 집요한 추적자란 매우 고전적인 설정이다. 어느새 그를 의심하여 뒤쫓는 적이 있다. 그들은 곧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박기영이 아닌 김우현 자신의 그늘진 부분을 쫓으려는 전재욱(장현성 분)에 의해 권혁주의 행동에도 당위가 부여된다. 박기영이 경찰대학을 중퇴하게 된 사정이 전재욱의 의도와 서로 만나게 된다. 최승연(송하윤 분)과도 만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벌써 이만큼 왔다.

조이는 방법을 안다. 풀었다 조이는 것이 더 아프다는 것도 안다. 악취미다. 그러나 스릴러라는 장르에 있어 너무나 고마운 악취미다. 쫓는 자와 쫓기는자, 숨는 자와 그것을 찾아내려는 자, 불안과 공포가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다. 옭죈다. 기대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재미있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