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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공소리 칼럼니스트
  • 칼럼
  • 입력 2017.02.25 15:01

[공소리 칼럼]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 누가 논할 수 있는가

시대에 따라 불륜도 성적으로 여러 입장

[스타데일리뉴스=공소리 칼럼니스트] 지난 18일(현지시각) 제67회 베를린영화제에서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출연한 배우 김민희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홍 감독과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에 이어 두 번째 호흡이다.

지난 2015년에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의 스캔들이 터졌다. 홍상수 감독은 기혼자로 논란이 컸다. 그리고 그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홍 감독과 이혼협의가 되지 않은 채 그의 가족과 측근을 취재한 기사가 연이어 쏟아졌고, 김민희의 다른 영화제 불참 등 관련 기사는 “연예계 불륜”이라는 꼬리표를 달며 나왔다. 그리고 영화 밤의 해변을 찍으며 포착된 홍 감독과 김민희의 모습, 현재 베를린에서 수상까지 모두 “불륜”이라는 낙인찍은 내용이 난무하다.

불륜이라, 그것도 유명인의 불륜이란 얼마나 자극적인가. 일부 언론은 더욱 자극적인 멘트로 불륜내용을 상기시킨다. 베를린 수상을 전할 때도 둘의 관계에 대해 거론하고, 노골적으로 영화 내용과 두 인물의 관계를 연결 짓는 일부 언론의 자극성은 굉장하다. 물론 이번 베를린영화제의 수상 쾌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로, 작품과 배우로서의 발돋움을 인정하는 기사내용이 주를 이뤘다.

▲ 홍상수, 김민희 ⓒ전원사

문제는, 네티즌은 싸늘하다 못해 지저분하다

네티즌은 홍 감독과 배우 김민희를 비난한다. 욕을 한다. 그런데 홍상수와 김민희가 똑같이 페널티를 당하진 않는다. 그간 김민희의 공개연애를 편력 삼고, 마치 남성을 휘어잡는 이미지로 묘사하는 둥 김민희의 유책 부분에 치중되게 몰아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가정적인 가장이었던 홍 감독을 젊은 김민희가 꼬여냈다는 노골적인 비난도 난무하다. 불륜과 가정파탄의 책임을 여자인 김민희에게 꽤 뒤집어씌운다. 올바른 비판 댓글은 찾기 힘들다.

굳이 유책을 따지려면 누구라도 가정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가정에 포함된 당사자다. 그러므로 간통의 유책 여부는 외도한 기혼자의 책임이 큰 것. 그런데 오히려 여자인 외도상대에게 페널티를 매긴다.

당사자가 아니면 누구도 관계성에 대해 알 수 없다

유명인이라고 본보기로 돌팔매질 당하는 건 잔인하다. 그것이 과연 윤리적인가, 도덕적인가, 객관적인가 진정, 인간적인가. 간음한 여인이 끌려와 심판에 오를 때 예수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다. 그리고 아무도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스캔들이라는 내용 외에 자세한 내막이나 당사자의 이야기를 전혀 들은 바 없다. 각자의 복잡한 관계성에 대해 해당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 타인의 복잡한 내용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면 판단하는 건 모순이다.

공인은 문제의 요소를 지니면 안 된다고 한다. 유명인은 공인이 아닌데 공인보다 더 엄중하게 평가한다. 일례로 역대 대통령만 봐도 공인의 사생활은커녕 도덕과 윤리에 개의치 않는 게 분명한데 말이다. 더욱이 불륜이란 스캔들이 극악무도한 범죄도 아니고, 자질은 논할만한 가치도 아니다.

불륜이라는 관계도 사생활이다. 누구나 프라이버시를 침해받고 싶지 않다.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유명인이나 공인은 그 권리가 없거나 돈과 명예와 바꿔먹지 않았다.

실제로 유대인의 율법에는 간음한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예수의 말씀에 군중은 가만히 서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어른부터 젊은이까지 모두 심판의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타인의 가장 예민한 프라이버시를 논할 자격 있는 자 있는가? 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찬성하지 않아서, 반대한다고 해서 혐오와 오물을 맘껏 던져도 되는 건 아니다. 그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만들고, 오물은 더러워질 뿐이다.

이제 불륜이라는 개념도 무색해져야 하지 않을까?

지난 2015년 간통죄는 위헌판결이 났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 정서상 불륜은 범죄와 도덕 사이에 떠다니는 것 같다. 제마다 도덕적이지 않다, 범죄와 같이 느껴진다, 사생활이니 상관없다거나 가치관은 다르다.

과거에 간음이란 혼인한 경우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미혼자에게 더욱 엄격했다. 우리는 간음(=성행위)한다고 누군가를 심판할 수 없다. 대신 혼인제도 안에서 순결한 약속을 한다.

예전에는 간음한 자가 잘못이었다. 처녀가 성관계하면 낙인 찍혔다. 지금은 대부분 싱글이 성생활을 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오픈하기까지 한다. 아직 불륜이라는 주제가 처녀만큼 진부한 주제가 아닐 뿐이다.

누군가는 별거한 채로 파트너를 만나고, 누군가고 이혼을 기다리며 파트너를 만나고, 상관없이 세컨드를 두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는 몸과 마음의 파트너가 다른 모양으로 다른 때에 찾아오기도 한다.

누구나 추구하는 바는 다르다. 누군가는 혼전순결을 원하고, 누군가는 상대만의 혼전순결을 원한다. 누군가는 두 명과 성관계했고, 누군가는 백 명과 성관계했다. 그건 나름대로 모습일 뿐, 사적인 영역인 것을 알고 있다. 불륜도 사적이고 영역이며 성적 입장이다.

어느 시대에는 처녀와 총각의 육체적 관계가 불륜이었다. 양반과 노비의 만남이 불륜이었다. 심지어 과부와 총각의 만남도 불륜이었다. 불륜의 이미지는 변해간다.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지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이유도 달라진다. 

평생 몸과 마음이 한사람만을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두 명 이상의 파트너를 만날 가능성이 높다. 혼전에 여러 번 연애하고 성관계했는데 그 기간이 고작 얼마나 될까. 그런데 결혼 후의 삶은 지난 연애와 성생활 기간보다 길다. 우리의 긴 삶 속에서 다른 파트너를 충분히 만날 수 있다.

전해진 기사를 보면 홍 감독은 배우자와 이혼소송 과정 중이라고 한다. 또한, 협의이혼이 되지 않았지만 사실상 이미 남녀로서의 끝을 맺은 듯하다. 더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혼인의 종결은 보통 이별처럼 말로 이루어질 수 없고 복잡한 현실과 절차를 따라야 하므로 어떤 방식의 이혼도 기다려야 할 수 있다. 이미 몸과 마음이 떠났다 해도 마치 기다리는 이별인거 같다.

긴 삶 속에서 몸과 마음이 한 사람만 향하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정말 긴 삶이다. 노력으로 한 사람에게 묶이고 싶지 않다. 이미 우리는 여러 가지 성적 입장을 선택하고 고민하며 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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