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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6.13 10:08

추적자 "포기하는 자와 포기하지 않는 자, 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선택의 연속, 그러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죄를 묻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백홍석, 네가 멈췄으면! 네가 포기를 했으면! 나도! 나도! 왜! 왜! 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아주 오래된 컴퓨터게임 가운데는 그래픽조차 없이 단지 몇 줄의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있었다. 게임이 유저에게 묻고 있었다.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하겠는가?"

왼쪽으로 가겠는가? 아니면 오른쪽으로 가겠는가? 상자가 있는데 그것을 열겠는가? 적이 있는데 과연 싸우겠는가? 도망치겠는가?

그래픽이 발달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시는 텍스트로 선택하던 것을 이제는 마우스와 게임패드로 선택한다. 왼쪽으로 가겠는가? 오른쪽으로 가겠는가? 아니면 점프를 하겠는가? 그리고 대개는 그같은 선택에 따른 결과가 뒤따르게 된다. 옳은 선택이었는가? 아니면 잘못된 선택이었는가?

비단 게임의 경우만이 아니다. 아니 게임이라고 하는 자체가 삶의 미니어처라고 할 수 있다. 최소화된 현실이다. 현실의 수많은 선택 가운데 일부를 떼어 극대화시킨 것이 바로 게임이라고 하는 것일 게다. 선택해야 한다.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점프할 것인가? 자세를 낮출 것인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차이라면 삶에는 리셋이 없다. 세이브도 로드도 없다.

포기해야만 했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간절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그래서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왔었다. 가난에 지쳐 양심마저 저버렸다. 삶의 모순과 부조리에 치이며 옳고 그름의 판단조차 한쪽 구석에 치워두었다. 누이의 죽음에조차 가족의 정을 떠올리기보다 그렇게나마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포기해가며. 무언가를 버려가며. 간절한 한 가지를 위해서.

그래서 화가 나는 것이다. 그의 어리석음에 대해. 딸이 죽고 아내마저 죽었다. 자신마저 이같이 위험에 처하고 말았다.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조금만 더 영리했더라면. 그래서 포기할 줄도 알고, 버릴 줄도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자기 역시 그와 같은 큰 죄를 짓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다시 더 큰 죄를 지으려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같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무지와 무모한 만용이 모든 것을 망쳤다. 자신을 망치고 자기마저 망치려 하고 있다.

포기해야 하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버려야만 하는 것들에 어떤 애정도 집착도 남기지 않는다. 어차피 자기의 것이 아니었다. 자기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얻을 수 있게 된 그것이 자기에게 허락된 것이었다. 그를 통해 지킬 수 있게 된 것이 자기의 것이었다. 신혜라(장신영 분)도 그래서 아버지와도 같이 따르던 이를 배신하고 돌아와서 잃어버린 사람보다 그를 통해 얻게 될 이익만을 생각한다 말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조차도 어리석은 백홍석(손현주 분)은 전혀 모른다.

어째서 백홍석의 친구 윤창민(최준용 분)은 백홍석과의 오랜 우정을 그토록 허무하게 배반하고 말았는가? 그토록 자신을 따르던 친구의 딸을, 더구나 어떻게든 살리려 필사적이던 그 손으로 겨우 살아나려던 목숨을 끊어놓고 말았다. 그 역시 체념에 익숙해 있었으니까. 기껏해야 시골수재, 제아무리 노력해서 의대에 진학하고 의사자격증을 땄어도 이렇다 할 배경도 밑천도 없는 그에게 세상이란 좌절과 절망 뿐이었다. 자존심을 버리고, 희망을 버리고, 이번에는 우정과 양심을 저버렸다. 그나마 딸의 목숨은 빼앗았어도 마지막까지 용서를 구하며 염려를 거두지 않는 모습이 윤창민이라고 하는 인간에게 있어 백홍석과의 우정이 갖는 무게와 가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자기가 살아야 한다는 당위 앞에서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아버지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백홍석은 딸 백수정의 명예를 위해 현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타협하기를 거부한다. 타협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딸의 명예를 더럽히는 판결에 대해서 기꺼이 총을 들고 재판정에 난입함으로써 적극적인 거부의 의사를 드러낸다. 딸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자신이 범죄자가 되어서라도 끝까지 싸우겠다. 그러나 강동윤(김상중 분)의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위해 아들 강동윤에게 굴복을 강요하고 있었다.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사과하고, 훨씬 많이 다쳤음에도 용서를 구하고, 현실 앞에 강동윤의 존엄과 명예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서회장(박근형 분)이 딸인 서지수(김성령 분)에게 말한 그대로일 것이다. 손에 쥐어진 것이 없다. 손에 닿는 것이 없다. 그래서 소망한다. 그래서 소원하게 된다. 진정으로 그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단지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내게 없는 것이 바로 그곳에 있으리라. 지금 내게 없는 행복과 만족이,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곳에 있으리라. 환상이다. 하지만 이미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에 그 환상이나마 쫓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윤창민에게 세상이란 도저히 아무리 찾아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 그 자체였다면, 그래도 강동윤에게 있어 세상이란 그것을 손에 쥔다면 무언가 이제까지와 다른 삶이 펼쳐질 것 같은 막연한 기대이기도 한 것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윤창민이 그러했듯 강동윤도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다. 자기 자신마저도.

바로 백홍석과 강동윤이 충돌하는 지점일 것이다. 말했듯 백홍석에게 행복이란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백홍석에게 있어 만족이라는 것도 그의 손이 닿는 곳, 그의 손에 쥐어지는 그곳에 있었다. 그가 간절히 지키고자 했고 얻고자 했던 모든 것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사랑하는 딸 백수정의 아버지가 아닌 적이 없었다. 아내 송미연(김도연 분)의 남편이 아니었던 적도 없었다. 그것은 그가 지켜야 하는 모든 것이었다. 포기도 체념도 허락되지 않는, 양보도 타협도 있을 수 없는 그가 지켜야 하는 모든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대단한 목적을 위해서도 그것들을 수단으로 내놓을 수는 없다. 동료경찰인 황반장(강신일 분)과 조형사(박효주 분)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가까운 측근인 신혜라나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그다지 소중하다거나 간절하게 여기지 못하는 강동윤과 비교되는 부분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들이 죄를 짓고 마는 이유다.

결국은 현실에 부딪힌다. 백홍석의 가장 소중한 것과 강동윤의 가장 소중한 것이 현실과 부딪힌다. 그러나 백홍석은 가장 소중한 가족을 위해서, 강동윤은 자신의 유일한 꿈을 위해서 현실과 맞서고 만다. 딸을 지키기 위해 백홍석은 범죄자가 되고, 꿈을 이루기 위해 강동윤은 자신의 양심마저 저버린다. 그리고 서로의 죄를 통해 그들은 서로가 잃어야 했던 것들을 보고 만다. 강동윤은 자기가 하찮게 여기고 버리고 온 것들을, 백홍석은 그런 강동윤에게 짓밟힌 가장 소중한 것들을 본다. 만일 두 사람 다 그다지 크게 댓가를 치를 필요 없이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면 그와 같은 비극은 굳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서회장이 바로 그렇다. 딸 서지수에게도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말한다. 아들 서영욱(전노민 분)의 앞에서도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말한다. 강동윤에게 경선에서 지고 외로운 신세가 된 유태진(송재호 분)을 찾아가 강동윤을 흔들 수 있는 판을 만든다. 심지어 강동윤이 총리로 내정했던 장병호(전국환 분)마저 유태진이 만드는 신당의 대변인으로 안겨준다. 그야말로 무소불위다. 어떤 댓가도 치를 필요 없고, 어떤 결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뜻한 대로 행동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 강동윤이 장병호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그러한 서회장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서지수조차 남편과 오빠를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서영욱 또한 그룹의 후계자와 여동생을 모두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서회장은 가능하다. 아들과 딸, 부와 권력, 그리고 자신을 거스른자에 대한 응징까지. 강동윤의 의지는 소용없다. 강동윤이 아무리 용서를 빌고 화해를 쳥해도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체는 서회장 자신이다. 그래서 그는 죄를 짓지 않는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을 힘이 그에게는 있다.

백홍석 앞에서는 강자가 되어 있지만 서회장 앞에서 강동윤은 백홍석과 마찬가지로 약자에 불과할 뿐이다. 백홍석 앞에서 강동윤 자신의 룰을 강요하듯, 강동윤 역시 서회장 앞에서 서회장의 룰에 복종한다. 아니 복종할 자격조차 아직 허락받지 못하고 있다. 백홍석은 강동윤의 룰을 거부하고, 서회장은 강동윤의 복종을 거부한다. 외롭다.

어쨌거나 참으로 애닲은 장면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는 강동윤 앞에서 백홍석은 뻔한 상식적인 이야기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강동윤의 죄를 일깨우고 그를 꾸짖지만 그것이 강동윤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그야말로 미미한 정도다. 아무리 사람들이 욕을 하고 비난을 해도 이미 권력을 쥔 이들이 크게 신경쓰지 않는 이유와 같다. 비난은 사람에게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한다. 그만한 힘이 있는 사람에게 비난이란 그저 약자의 칭얼거림에 불과할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렇게라도 악을 쓰고 발버둥을 친다.

어째서 판도라의 상자에는 마지막에 희망이 남아 있었을까? 법이란 정의를 지키는 것일까? 아니면 불의한 세상에 타협하며 살라는 기만에 불과한 것일까? 법과 도덕, 윤리와 가치, 정의와 규범, 사상, 철학, 이념, 그러나 과연 세상의 수많은 정의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그들의 편에 설 수 있는 것들이란 과연 무엇일까? 존재하기는 할까? 그렇게 죽임을 당하더라도 위로는 되었을 것이다.

무력하다. 비참하다. 구차하고 추레하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권력이라는 것이다. 양심을 지키려 죄를 지어야 하는 소시민이다. 꿈을 이루려 양심을 저버려야 하는 권력자도 있다. 그 무엇도 지킬 필요도 버릴 이유도 없는 자들도 존재한다. 세상을 본다. 어느새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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