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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6.12 07:50

추적자 "마지막 양심과 존엄마저 팔아야 하는 가난과 죄에 대해..."

모순이 죄를 만들고 죄가 비극을 만든다. 슬픈 이유를 찾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가난한 아내가 있었다. 남편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도 부족한 것은 시집올 때 가져온 옷가지며 패물을 파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래도 부족할 때는 머리를 잘라 팔았다. 도저히 그것으로도 안되자 아내는 몸을 팔았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전부였으므로.

지금도 기억하는 MBC의 대하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한 장면이다. 간첩혐의로 재판정에 선 여옥에게 검찰이 일본군 성노예로 있던 전력을 문제삼자 여옥은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몸을 팔았지만 당신들은 이곳에서 양심을 팔았죠?"

신혜라(장신영 분) 역시 그래서 아버지와도 같던 한경식 사장을 저버렸다. 매년 아버지의 기일을 챙기고, 심지어 자기를  결혼식장에 데리고 들어가 달라고 아버지가 유언한 이이건만 그녀는 자신이 모시는 강동윤(김상중 분)의 야망을 위해 그를 막다른 궁지로 내몰고 만다. 내년부터는 그나마 찾아와주던 이조차 더 이상 찾지 않을 테니 아버지도 더 외로울 테지만 더 이상 잃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최악의 절망에서 강동윤을 구하기 위해 그를 아내인 서지수(김성령 분)에게 보내려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녀 또한 자기가 마음에 품은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보낸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테지만, 바로 그같은 자신의 판단에 남자의 평생의 꿈이 달려 있기에 그녀는 기꺼이 자신의 여자로서의 당연한 욕심을 포기하고 만다. 차라리 서지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신을 내치겠다 약속하라.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그녀의 자존심이며 존재의 이유다.

같은 꿈을 꾼다. 같은 꿈을 꾸며 그것을 함께 이루어 나간다. 그것이 신혜라가 강동윤의 곁에 머물고 있는 이유다. 강동윤이 신혜라에게 자신의 곁을 허락한 이유이기도 하다. 신혜라 역시 강동윤의 앞에서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어느새 여자의 얼굴을 한 신혜라에 대해 강동윤도 바로 경고를 보낸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보다 더 절박한 그들은 함께 싸워나가야 할 동지이며 동반자인 것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자기가 여자라는 당연한 사실마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

그래서 강동윤도 신혜라의 뜻을 쫓아 기꺼이 아내 서지수에게 자신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털어놓고 마치 기르는 개처럼 순종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자존심 따위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야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를 위해서 신혜라는 여자로서의 자신마저 포기했다. 강동윤 역시 그런 신혜라를 포기했다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깟 자존심따위. 그가 걸 수 있는 전부다. 자존심이나마 버림으로써 그는 간절히 꿈을 이루고자 한다.

그래서 바로 강동윤은 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그래서 눈을 감았다. 귀를 막았다. 양심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양심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막고 외면했다. 타협했다. 어쩔 수 없노라. 그로 인해 한 가정이 불행으로 빠져들고, 또 다른 죽음과 더불어 죄인이 되어 쫓겨야 하는 죄없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는 끊임없이 되뇌여야 했다. 그런 가엾은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엄마저 야망의 제단 위에 올려놓고 만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더 이상 아무것도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가장 간절한 것이 있었기에 그들은 그렇게라도 자신을 팔지 않으면 안되었다. 몸을 팔고, 마음을 팔고, 양심을 팔고, 자존심을 팔고, 존엄을 판다. 그에 비하면 그토록 벼르던 강동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고서도 동생을 위해 주저할 수 있는 서영욱(전노민 분)의 우애란 얼마나 선량하며 여유가 넘치는가? 강동윤이라면 기꺼이 자신의 동생마저 자신의 야망을 위한 제단 위에 희생시켰을 것이다. 그만큼 혜택받은 풍요로운 환경 속에 살고 있는 탓이다.

친구인 윤창민(최준용 분)마저 백홍석(손현주 분)을 배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백홍석을 강동윤에게 넘기려 결심하기까지 윤창민이 보인 말이며 행동들은 백홍석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과 우정을 담고 있었다. 백홍석만큼은 살리고 싶다.친구인 백홍석만큼은 무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강동윤이 보낸 사람이 건넨 전화번호마저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었다. 하지만 앞에서는 백홍석이 범인을 잡겠다 하고, 뒤에서는 경찰들이 그가 백홍석의 딸 수정을 죽이는데 쓴 약물을 빼낸 사실을 찾아내고 있지 않은가. 그 이전에 자기가 살아야겠다.

그래서 죽인 것이다. 친구의 딸을. 가장 친한 친구의 딸을. 친구가 믿고 맡긴 딸을. 자기의 딸처럼 그토록 살리고자 애쓰던 그 아이를. 자기의 손으로 살려낸 아이를 자기의 손으로 죽이고야 말았다. 살아야 했으니까. 힘들게 개업한 병원마저 망하고 빚에 쫓기고 있던 그에게 다른 탈출구는 없었다. 소중한 친구이고, 그 친구의 소중한 딸이지만, 그러나 그조차 자신의 제단에 올리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사정이 그를 막다른 곳으로 내몬다. 우정을 팔고 마지막 양심까지 팔아버린다. 그같은 모든 사실들이 백홍석에 의해 들통날 위기에 몰리자 그는 자신의 친구마저 배신하고 팔아버리고 만다. 인간이란 얼마나 이리도 어리석고 나약한 것일까? 비루하고 비겁하다.

인간은 악한 것이 아니다. 약한 것이다. 도무지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고 약하기에 그들은 죄라고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자존심을 버리고 서지수의 애완견으로 전락한 강동윤의 모습이나, 자신의 양심마저 내팽개친 채 어린 소녀를 죽이라는 지시를 내리고 마는 강동윤의 모습이나, 그래서 윤창민도 돈에 쫓겨 사람을 죽이고, 죄에 쫓겨 다시 친구인 백홍석을 배신하는 죄를 저지른다. 마지막 순간에까지 그는 고민하고 갈등하고 후회했지만 죄를 그만두지는 못했다. 어째서 단지 딸을 잃었을 뿐인 아버지 백홍석은 죄인이 되어 쫓겨야 하는가?

죄를 지었으니 악인이라면 백홍석 역시 죄인이다. 그는 총기를 들고 법정에 난입했다. 총을 쏘며 사람들을 위협했고 마침내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법에 의해 처벌을 받기 위해 옮겨지던 도중 도망침으로써 수배를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는 악한가? 단지 약했다. 그렇게밖에는 다른 어떤 수단도 가지지 못한 가련할 정도로 약한 존재였다. 경찰임에도 차라리 경찰을 꺼려하고 범죄자에 의지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이란 무엇을 말하겠는가? 궁지에 몰릴대로 몰려 차라리 죄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절박한 처지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었을 게다. 강동윤도 임의로 국세청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위에서 더 강한 힘으로 서회장(박근형 분)이 그것을 무마시킨다. 그 정도의 힘이 백홍석에게 있었다면 그는 굳이 죄인의 길을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선해서 가엾은 군상들이라고나 할까? 의외로 강동윤도 선하다. 강동윤 앞에서 신혜라 역시 진실하다. 죄를 범하기 전까지 윤창민 또한 친구로서의 최소한의 우정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백홍석은 단지 딸의 아버지였을 뿐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강동윤에 대한 증오보다 동생 서지수에 대한 오빠로서의 애정을 지킬 수 있었던 서영욱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어째서 인간은 죄에 빠져드는가? 비극은 죄로부터 출발하고 죄는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면 아마 물을 것이다. 포기하면 되는 것 아닌가? 강동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신혜라가 강동윤의 꿈을 함께 이루고자 하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윤창민 역시 빚에 쫓겨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으면 굳이 죄를 짓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던가? 그래서 백홍석이 딸의 원통함을 풀어주기보다 현실과 타협하려 했다면 어땠을까? 강동윤과 PK준이 원하는대로 그들이 바라는 결론에 동의해주었다면 그 역시 죄를 짓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는 대신 자기에게 죄를 짓는다. 꿈을 포기하든, 사랑을 포기하든, 아니면 삶을 포기하든.

그토록 간절히 바래왔던 꿈이었다. 간절히 이루기를 꿈꿔왔던 오랜 바람이었다. 그런데 현실이 시킨다고 그에 굴복하는가? 현실이 그리 말한다고 그저 일방적으로 따르는가? 그러면 자신은 어찌하는가? 자기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그 또한 죄다. 그 죄를 달리 좌절이라고도 말한다. 때로 사람은 바로 그같은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평생을 자기를 상처입히고 상처 속에 신음하며 살아간다. 사람이란 어쩌면 죄를 짓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강동윤을 마냥 비난하지는 못하는 이유다. 그러면서도 그를 동정하지만도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서영욱의 앞에서 강동윤은 약자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루한 약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백홍석 앞에서 그는 백홍석으로 하여금 스스로 죄를 짓지 않고는 버틸 수 없도록 내모는 악의에 찬 강자일 것이다. 강동윤을 그런 상황으로 내모는 것도 역시 서영욱과 서회장 등 더 큰 힘을 가진 강자들일 테지만, 그러나 강동윤 또한 다른 이들에게는 그들을 짓누르는 강자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죄가 죄를 낳고, 다시 악이 악을 낳는다.

추적자라는 제목의 원래 의미일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쫓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죄를 쫓는다. 그 죄의 근원을 쫓는다. 모순과 그 근원을 뒤쫓아 파헤친다. 최소한 작가와 시청자의 시선은 그리로 향하고 있다. 인물들 또한 그곳을 가리키며 함께 달려가고 있다. 무엇이 죄인가? 무엇이 악인가? 무엇을 진정 심판해야 하는가? 누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만드는가?

당지 백수정의 시신에서 코데인이 검출되었다는 사실만 발표했을 뿐 그 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면밀히 살피고 조사한 전문가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 차라리 절망스럽다. 그것이 단지 픽션만은 아니기에. 국내에서 그것을 보아줄 의사가 한 사람도 없어 학회차 방한한 영국인 의사에게 물어 자실을 알아냈다. 그런데도 너무나 명확한 그 사실을 누구도 알려고도 알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 여학생을 희생양삼아 떠들어대는데만 급급했을 뿐이다. 너무나 가난하여 오로지 출세만을 위해 공부해야 했던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의 정의의 한 단면일 것이다.

무겁다. 차라리 강동윤이 그저 흔한 악인이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악인이어서 죄를 저질렀다. 악하기에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마땅히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란 결코 초등학교 산수문제처럼 명확한 답으로 돌려주지 않는다. 수가 우주를 담아내기에는 정수 이외의 수가 필요하다. 막연하고 모호한 어딘가다.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화난다기보다는 슬프다. 밉다기보다는 불쌍하다. 어쩌면 우리 자신의 자화상일수도 있다. 물론 죄에 대한 댓가는 치러야 한다. 그와 같은 이가 행복하게 잘산다는 것은 어쩐지 부조리하다. 현실이야 어떻든 드라마에서만큼은 순리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아프다. 무서운 드라마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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