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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6.08 09:53

각시탈 "왜놈들에게 충성이라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인데..."

여전한 원망과 증오, 내일에 대한 가치 없는 되갚음의 한계를 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이강토(주원 분)가 원한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토록 다른 인력거꾼들의 텃세에 시달리면서도 얼마 안 되는 일당이나마 형인 이강산(신현준 분)의 성공을 위해 쓰일 수 있기를 바랐다. 형이 대학을 나와 출세하면 이 모든 고생의 보답을 받으리라. 그러면 어머니와 형과 자신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 하지만 삶이, 아니 시대가 그를 배신하고 있었다.

어린시절 첫사랑이었다. 그 시절은 그리 행복했었다. 그리고 아름다웠었다. 여물지 않은 풋풋한 설레임도 있었다. 그래서 약속도 했다. 다시 만나자며 아버지가 만들어준 칼을 증표로 건넸다. 하지만 시간은 어느새 자신을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부보로, 첫사랑의 그녀는 자신의 손에 잡힌 독립투사의 딸로써 만나도록 만들고 말았다. 목단(진세연 분) 역시 아직도 그를 간절히 기억하고 있건만 두 사람은 서로를 목적을 위해 이용해야 하고, 또 응징해야 하는 원수일 뿐이었다.

비로소 이강토가 목단의 칼을 보았다. 그리고 그 칼을 통해 목단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는가? 이강토는 각시탈을 잡아야 한다. 각시탈을 잡자면 매번 각시탈에 의해 구해지는 목단을 인질로 이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목단은 이강토의 기억에 간직된 소중한 첫사랑이다. 하지만 결국 그같은 이강토의 고민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목단의 응징으로 인해 선택할 여지도 없이 끝나버리고 만다. 이강토를 알아보지 못한 목단은 이강토가 건넨 칼을 들고 이강토를 죽이려 달려들고 탈을 쓴 목단을 알아보지 못한 이강토는 그녀에게 총을 쏜다. 그녀가 떨어뜨린 칼에서 이강토도 마침내 목단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만다.

쉽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설사 이강산이 경성제국대학을 무사히 졸업했다 하더라도 과연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 아래에서 조선의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 협력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방관자로 남을 때만이 최소한의 기회나마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식민지 조선은 가난하고 척박했다. 힘들게 자신을 뒷바라지한 어머니와 동생을 위해 이강산이 친일을 선택한다고 했을 때 그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국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이강산은 정신을 놓은 시늉을 내어 겨우 풀려나고 있었다. 미치지 않고서는 일본경찰의 가혹한 고문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홀로 행상을 하시고, 형은 저리 바보가 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러면 이강토는 끝까지 하루 밥값도 되지 않는 돈을 벌기 위해 매맞아가며 인력거꾼의 일을 계속해야 했던가?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이렇다 할 연줄도 없고, 그렇다면 이강토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무엇이 있을까? 그나마 이강토를 비난하는 시장사람들조차 저 먹을 것은 이미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가난은 그렇게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고, 폭력은 사람을 비겁하게 만든다.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든다. 무도한 시대가 낳는 비극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싸워야 하고, 누군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협력해야 한다. 같은 조선인이다. 같은 동포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총부리를 겨눈다. 서로를 누구보다 원망하고 증오하며 그 앙금을 아직도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싸워야 했던 사람과 싸우지 못해 타협을 선택했던 사람들, 그러나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다. 물론 그렇더라도 온갖 위험과 불이익을 감수해가며 쉽지 않은 길을 선택했던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와는 별개로 과연 그들이, 그 사람들이 어떤 무도하고 절망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는가를 잊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그다지 강하지 못하다.

드라마가 멀리 간다. 심지어 고종의 시해의혹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 소문이 있었다. 고종은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다. 그같은 의혹이 3.1운동이 일어난 한 동력이 되고 있기도 했었다. 고종의 시해에 키쇼카이가 개입하고 있었다. 각시탈이 응징하는 대상들이 당시 고종의 시해에 가담했던 이들이었다. 각시탈 이강산의 아버지 이선이 당시 고종의 북경망명을 추진하던 고종의 비밀첩보기관 총책이었다. 다만 결국은 고종을 죽이고 아버지 이선을 죽인 원흉들에 대한 응징으로 끝나고 마는가.

어쩌면 이 또한 시대적 한계일 것이다.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아나야 한다.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으로?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그러니까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다면 어떤 나라를 세우려 함인가? 그러나 거기까지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번지게 된다. 아직까지도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사를 대하는데 거리낌이 적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필 목담사리가 아나키스트에 가까운 인사로 설정된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그나마 이념적 문제에 있어 가장 자유로운 것이 가장 탈권위적이었던 아나키스트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지배가 부당하기에 항거한다. 하지만 그 다음은?

하지만 그럼에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에 협력하는 자들이 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인민을 식민지 백성으로 만든 원흉들이다. 그들을 응징한다. 여기에 이강산과 이강토 개인의 원한까지 더해진다. 감정적 복수로 끝나고 만다. 결국 그렇게 끝나고 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독립의지와 얼마나 큰 상관이 있을까? 당장 각시탈이 키쇼카이의 협력자들을 제거하는 도중에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개인적 차원의 폭력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아직까지도 일제강점기란 단지 증오의 대상일 뿐인가. 원망과 되갚음의 대상에 불과한 것인가? 그를 통해 지금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미래의 가치란 없는가? 우리가 반드시 추구해야 할 어떤 당위란 없는 것일까? 일본이니까 싫다. 일본인이어서 싫다. 그들의 지배를 받는 현실이 싫다. 그들이 잘못한 것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이 있었을까?

개인의 이야기다. 민족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와 민족의 이야기라기에는 범위가 너무 좁다. 이데올로기보다는 감정이다. 저들이 우리에게 한 행동들에 대한 당연한 분노와 원망, 그리고 되갚음이다. 21세기에도 그것은 여전하다. 슬픈 현실이다. 벌써 100년도 가까이 흐른 그 시대 저들이 남긴 상처가 그렇게 깊다. 슬픔을 본다. 잔인하도록 슬픈 이야기일 것이다.

과연 이강토 역시 각시탈의 실체에 어느새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이강토의 손에 의해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이 짝사랑하는 에스더 목단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있었다. 각시탈 이강산을 향한 키쇼카이의 의지도 강화된다. 이강토의 어릴적 이름이 이영이었다. 원래 이강토 이전 허영만 만화의 주인공이 이영이었다. 비극이 심화된다. 갈등과 긴장이 고조된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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