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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6.07 13:33

각시탈 "이강토와 식민지 백성의 절망과 좌절, 차라리 죽어버려!"

무도했던 시대의 오욕과 배덕의 비극을 연민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필자 역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민주주의? 그딴 것은 개에게나 주라!"

피곤하다. 성가시다. 거추장스럽다. 방해가 된다. 그러니 그만두라.

하기는 사람이란 살려고만 하면 어떻게든 살아진다. 일본제국주의의 총독부 치하이든, 아니면 군사정권의 총칼에 짓눌려 있든, 어째서 노인들은 그토록 가혹하고 비참했던 시절에 대해 좋았었다 추억할 수 있는가? 그때도 사람은 살았었으니까.

오히려 불편하다. 독립을 쟁취하려 한다. 하지만 역시 비례의 문제다. 조선이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댓가와 희생을 치러야 하는가? 얼마의 비용과 노력을 들여야 독립은 얻어지는 것인가? 그런데 그 비용과 수고가 너무 크다면 차라리 이대로 계속 사느니만 못하다. 민주주의따위 없어도 지금껏 잘 살아오지 않았는가?

이강토(주원 분)가 분노하는 이유다. 어머니(송옥숙 분)가 그를 두고 미쳐 있다 말하는 까닭이다. 그만큼 절망이 깊다. 그만큼 좌절이 크다. 어째서 가능하지도 않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아버지는 죽고 형은 바보가 되어야 하는가? 조선의 독립이라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이토록 많은 희생을 무릅써야만 하는 것인가? 굳이 자신의 가족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는 것 아닌가?

차라리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숭고하다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고귀하다 위안을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조차도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강토의 나이로 보아 그는 아직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기 전의 조선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을 것이다. 있더라도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던 과도기의 비참한 혼란만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토록 강대한 일본제국주의는 도무지 약해지거나 망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부서지는 것은 단지 그에 항거하는 어리석은 일부의 사람들 뿐이다.

오죽하면 이상화는 그같은 일본제국주의를 두고 자신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강철의 무지개라 비유하고 있었겠는가? 미당 서정주는 반민특위 앞에서 일본이 이렇게 망할 줄 몰라 친일을 했노라 밝히기도 했었다. 서정주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변절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 끝내 현실을 인정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고 있었다. 이미 일본에 항거하여 수많은 고초를 겪어 온 인사들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배운 것 없는 이강토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일본의 지배를 받더라도 평온한 삶을 누리는 것을 방해하는 그것들이야 말로 증오해야 할 대상이다. 일본제국주의가 아니라 그 질서나마 무너뜨리려는 독립투사들이야 말로 그에게 타도해야 할 적인 셈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가 일본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투사를 잡는데 앞장서려 하는 이유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오히려 일본인보다 더 적극적으로 독립투사들을 잡아들이려 한다. 어느 일본인 경찰도 잡아들이지 못한 목담사리(전노민 분)을 그래서 이강토가 잡아들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식민지조선의 힘없고 무지한 민초의 원초적 감정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내가 태어난 나라가 조국이 아니다. 조국이어서 반드시 되찾거나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를 잘살게 해주는 것이 조국이다. 나를 잘살게 해주는 나라이기에 반드시 되찾거나 지켜야 한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할 것을 선택했다. 그를 잘살게 해주는 것은 다름아닌 일본제국인 것이다. 그의 조국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협력했다. 오히려 같은 조선인을 증오하고 또한 경멸하며 일본인이 되고자 앞장섰다.

그래서 역설인 것이다. 오히려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이해하려드는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와 독립투사를 아버지로 두고 있으면서도 그런 기무라 슌지와 친구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목단(진세연 분)의 관계가. 같은 조선인인 이강토를 혐오하면서도 기무라 슌지에게는 우정과 더불어 어떤 동질감마저 느끼고 있다. 민족이란. 그리고 국적이란. 같은 일본인인 기무라 타로(천호진 분)보다 조선인인 이강토를 더 신뢰하는 총독부 경무국장 곤노 코지(김응수 분) 역시 마찬가지다. 아마도 각시탈을 제거하기 위해 파견될 채홍주(한채아 분) 또한 나름의 아픈 사연을 간직한 듯하다.

어쩌면 국적이란 상관없는지 모른다. 민족이라는 것도 그다지 상관없는지 모른다. 무엇이 그들을 가르는가? 확실히 시대는 벌써 21세기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독립투사의 딸과 일본경찰의 아들이 친구가 되고, 같은 일본인을 의심하여 조선인을 신뢰하여 앞에 세운다. 그들을 가르는 것은 민족도 국가도 아니다. 무엇이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가? 무엇이 자신을 존엄하게 만드는가? 이강토는 단지 절망했고, 그럼에도 다른 조선인들은 아직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이강토가 바뀔 여지가 있는 이유다. 분노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증오하고 경멸할 만큼 그는 그것을 뼛속깊이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일본에 대해. 조선에 대해. 일본제국주의와 조선총독부에 대해. 그에 항거하려는 조선인의 의지에 대해. 단지 계기가 필요하다. 좌절과 절망에서 그것을 단호한 의지로 바꾸어 줄 필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딛고 일어서야 하는 절박함이다. 각시탈이 이강토의 앞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만다.

어째서 이강토는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형 이강산(신현준 분)에게 무참한 폭력을 휘두르는가? 마치 철천지 원수처럼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인가? 차라리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것이 그런 뜻이다. 지금의 이강산의 초라한 모습을 받아들이기에는 이강토 자신의 안에 자리한 이강산의 존재란 너무 크다. 이강토가 미친 이유이고 그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필연이다. 다만 그것이 필연인가는 두고보아야 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앞잡이인 채로는 안되는 것일까?

친일파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특히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병탄당하기 10년 전까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체화해 온 사람들이라거나, 더구나 1940년대 이후 도저히 망할 것 같지 않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차라리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조선의 인민들의 권익을 신장하려 했던 일부에 대해서는 충분히 동정할만한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래서 식민지 지배란 잔인한 것이다. 무도한 지배에 따른 폭력과 공포는 그렇게 사람을 비굴하게 비루하게 만들고 만다. 아니라면 굳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를 원망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여전히 사람들은 자유롭고 당당한데.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도 일본제국주의의 경찰이나 군에서 복무했음에도 해방된 조국을 위해 아낌없는 헌신과 희생을 바친 이들이 많이 있다. 단지 그들에게는 확신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진정 헌신하고 희생해야 할 조국과 민족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때는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2등국민인 반도인이며 조선인이었지 국민도 아니었다. 이강토에게도 그런 계기가 필요하다. 조금은 불손할까? 한국인의 완고한 민족주의에 대한 소심한 저항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래도 기대하면서도 우려하게 된다. 결국은 한국인의 감정에 기댄 반일드라마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한국인의 이성을 일깨우는 항일의 이야기가 될 것인가? 아직까지는 후자의 느낌이 강하기는 하지만 결국 시청률을 생각한다면 전자일 것이다. 안타까운 이유다. 그래도 재미있다. 의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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