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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6.07 09:06

유령 - 말과 살인, 인터넷의 무심한 폭력과 군상을 보다.

마술사의 꿈처럼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잔인하게 뒤섞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불과 재작년 '타진요'를 중심으로 한창 온 인터넷이 뜨거울 때 흥미로운 반응을 보았었다.

"단지 의심하는 것 뿐인데 그것이 어째서 폭력인가?"

그러나 바로 그 의심 때문에 이미 그 바로 몇 년 전에 한 사람이 역시 세상을 등졌었다. 의심은 존엄에 대한 폭력이다. 존엄이란 진실이다. 그 진실을 부정한다. 자신의 가치를 부정당한다. 어떤 확실한 근거가 있어서도 아니다. 단지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하찮게 여겨졌으면.

모욕이란 다름아닌 존재에 대한 부정이며 거부다.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찮다. 그래서 하잘 것 없다. 그래서 무시한다. 조롱하고 경멸한다. 결코 대등한 존재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대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신의 위에 있지도 않다. 차라리 몸에 가해지는 폭력보다 더 잔인할 수 있는 이유다.

몸에 가해지는 폭력이야 상처가 나으면 아픔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치유가 끝난 상처는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아픔이 사라지면 그만큼 기억도 희미하다. 그러나 영혼의 상처는 기억에 남는다.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이 기억을 헤집고 상처가 상처를 들쑤신다. 곪고 썩어 끝내는 자신을 파괴시킨다. 몸에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이라는 것도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어느새 영혼에까지 상처를 남기기 때문일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모멸감과 자괴감이다.

말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것이 글이라 해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분을 이기지 못해 죽고, 억울함을 풀지 못해서 죽고, 차라리 존엄을 지키고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며,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고통스러울 때는 어쩔 수 없이 죽음으로 도피하고자 하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튀어야 아픈가보다 하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혼의 상처따위 알아도 그다지 신경쓰는 경우가 잘 없다. 더구나 인터넷이란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공간이다. 익명으로 가리워진 속에 자신의 얼굴마저 보이지 않게 된다.

인터넷이라 솔직하다? 얼굴과 이름이 가려져 있기에 가식없이 솔직해질 수 있다? 거짓말이다. 솔직하다는 것은 스스로에 대해 당당하다는 뜻이다. 스스로에 대해 당당하기에 감추거나 가리는 것 없이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이라고 과연 그러한가? 그것은 새로운 가면이다. 자기 자신마저 가리우는 익명의 가면이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 속에 존재하는 만들어진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인터넷이라고 하는 가상의 공간 속에 구축된 또다른 관계이며 그 관계가 만들어낸 또다른 자아일 것이다. 그래서 자기로부터 유리된 채 양심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것은 엄밀히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가벼운 것이다.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쉬운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일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바람과도 같다.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시작된 그것은 나를 스치고 다시 알 수 없는 어딘가를 향해 불어간다. 그에 잠시 말을 한 마디 더할 뿐. 그로 인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그로 인해 어떤 책임이 지워질지 관심조차 없다. 실감도 못한다. 결국 사람이 죽었어도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인한 것이겠거니. 죽은 사람이 우스운 것이다. 신효정(이솜 분)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편집해 동영상을 만들며 노는 인터넷의 가벼움이란 그래서 가능하다. 실감이 없다. 죽은 신효정도, 신효정을 죽인 범인도, 그것을 지켜보며 놀고 있는 자신도. 얼마나 허무한가?

아마 그래서 묻고자 했을 것이다. 말로써 아무런 생각없이 - 심지어 어떤 악의조차 없이 폭력을 휘두르던 당사자들에게 실제로 몸으로 가해지는 폭력으로써. 물리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피해자들과 그들에 의해 가해지던 실체없는 폭력이 그렇게 역설로써 대비된다.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책임없는 다수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얼굴이 드러나고, 이름이 알려지고, 현실로 돌아온 그들은 자신의 말에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된다. 비로소 그때서야 악플을 달던 당사자들도 두려움에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된다. 아니 그 순간에조차 그들은 그저 가볍게 그같은 현상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역시 자기의 일은 아니다. 인터넷이란 실체가 없다.

그들은 과연 죽임을 당할만한 행동을 했는가? 물론 세상 어디에도 목숨을 댓가로 내놓아야 할 만한 중대한 일이란 그다지 없다. 어떤 행위의 가치를 계량한다면 목숨은 과연 무엇으로 계량해서 그에 적용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과연 단지 안티카페를 만들고 악의적인 게시물을 쓰고, 악플을 단 그들은 전혀 아무런 잘못 없이 무고한 희생자들인가? 심지어 신효정을 막다른 궁지로까니 내몰았던 성접대루머조차 그다지 큰 악의없이 가벼운 의도로 시작된 것이었다. 그야말로 고작이라는 말이 더없이 어울리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게 가볍고 쉬운데 댓가는 무겁고 잔인하다. 어째서일까?

의도였을 것이다. 권혁주(곽도원 분)가 취조하는 도중 아무 생각없이 성매매루머를 인터넷에 전매니저 양승재(강성민 분)에게 지레 폭력부터 휘두르는 것은. 하필 양승재가 아닌 그녀의 여자친구 한유리가 살해당하는 부분도 그렇다. 확실한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명확한 사실이 확인되어서도 아니다. 사실로 입증되지 않고서도 단지 의혹만으로도 단죄가 이루어진다. 폭력이 가해지며 인정과 동의를 강요한다. 권혁주와 같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수사는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마땅히 근절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정의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당연히 행해지고 있다. 바로 네티즌의 정의다. 생각없이 루머를 퍼뜨리고, 그것을 확신하여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단죄부터 하는 것. 더구나 그 대상마저 어긋나기 일쑤다. 양승재가 아닌 한유리이듯 누가 억울한 희생자가 될지 누가 아는가.

마치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뒤섞인 듯하다. 온라인의 허구와 오프라인의 현실이 뒤섞여 있다. '마술사의 꿈'이라는 연극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온라인에서처럼 무대 위에서 마술사는 온갖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낸다. 온라인이 오프라인인가? 아니면 오프라인이 온라인인가? 그래서 하필 사이버수사팀의 팀장은 사이버와는 전혀 관계아 없는 듯한 권혁주다. 권혁주가 김현우(소지섭 분)와 한 팀을 이룬다. 온라인을 쫓지만 온라인이 닿는 곳도 오프라인의 현실세계다.

가벼움이 섬뜩하다. 너무 쉽게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들이 소름끼친다. 학생이거나, 아니면 직장인이거나, 일을 하는 도중 다는 리플의 말투가 자못 귀엽기까지 하다. 현실의 무거움과 대비된다. 현실의 잔인함과 어떤 천진함이 교차한다. 과연 유령이란... 재미있다. 눈을 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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