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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6.06 16:55

추적자 "백홍석과 강동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탈옥수가 된 경찰, 소시민이 테러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묻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세상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룰을 만드는 사람과 그 룰을 지키는 사람. 그것은 법이기도 하고, 제도이기도 하며, 윤리나 도덕이기도 하다. 법칙과 원리, 이론, 사상, 주의, 종교, 모두가 이에 포함된다. 그래서 그것을 달리 권력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당장 하늘을 하늘이라 부르는 것도 누군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짜장면'이라 일상에서 쓰더라도 권위있는 학자들이 모여 '자장면'이라 정하면 그렇게 쓰지 않으면 안된다. 언제부터인가 '달걀'이 아닌 '계란'이 표준어가 되었다. '닭도리탕'도 '닭볶음탕' 바꿔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노란 것은 어째서 노란가? 1미터는 무엇을 기준으로 1미터라 하는가? 1파운드는 어느 정도의 무게를 말하는가? 이제는 물건을 사면서 '근'이 아닌 '그램'의 단위를 써야 한다.

법이라는 것이 그렇다. 어제까지 멀쩡히 마시던 술이다. 아무 문제없이 술을 빚고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술이 불법이 되었다. 만들어서도 안되고 마셔서도 안된다. 누가 정하는가? 바로 얼마전까지 문제없이 피우던 대마초가 어느날 갑자기 권력의 의지에 의해 마약류로 지정되어 집중단속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 대마관리특별법이라는 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기는 사실 불과 한 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마약류는 처벌의 대상이 아니었다. 더구나 술의 경우 그 얼마 안되는 시간을 제외하고 여전히 합법으로 남아 있다. 누구의 의지였을까?

필자가 동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 대해 필자가 어떤 의지나 견해를 피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필자는 더 이상 머리를 기를 수 없게 되었다. 바로 며칠전 초등학교까지 마음껏 머리를 기르고 다녔는데 중학교에 진학했다는 이유로 최대 상고머리로 짧게 깎을 것을 강요당했다. 만일 그같은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면 바로 머리를 깎이거나 교칙에 따른 징계를 받게 될 것이었다. 어째서 필자가 동의한 것도 아닌데 필자는 당시 교칙에 따라야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교칙은 누가 만든 것인가? 당연히 당시의 교칙과 지금의 교칙은 상당히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교칙은 누구에 의해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을까?

하지만 그같은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항상 강제되어진다. 따르지 않으면 야단맞는다. 지키지 않으면 혼이 난다. 때로는 육체적 고통이 뒤따른다. 인격적 모욕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래서 당연히 그러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게 된다. 자신이 학습하고 훈련한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돌려줌으로써 그를 학습시키고 훈련한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며 완고한 질서를 유지한다. 거역하거나 벗어나려 드는 것은 악이며 죄다. 그것은 부정한 것이며 거부되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세상을 이루고 유지하는 룰인 것이다. 그것을 과연 누가 만드는가?

그래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룰을 만드는 사람과 룰을 지켜야 하는 사람과, 룰을 만드는 입장에서 룰이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필요에 의해 만들고 필요없으면 임의로 폐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룰인 것이다. 심지어 성폭행에 대해서마저 필요하다면 죄가 아니게 만들 수 있다. 사람을 죽이더라도 그것이 죄가 아닌 이유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처음부터 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듦으로써 룰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룰이란 단지 이용할 수 있는 대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끊임없이 필요에 의해 그들은 룰을 만들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제시한다.

반면 백홍석(손현주 분)은 어떠한가? 법은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법이야 말로 자신들의 편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경찰이었다. 법을 지키는 경찰이었다. 법을 어긴 이들을 체포하고 처벌받도록 만드는 경찰에 몸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처절한 법의 배신이었다. 전직 대법관이라고 하는 타이틀을 내걸고 마음대로 법을 이용해 - 심지어 때로 법을 파괴해가며 온갖 논리를 만들어 그를 모욕하는 PK준(이용우 분)의 변호사 장병호(전국환 분)의 모습이란 모멸감 그 자체였을 것이다. 어째서 자신이 알고 있는 정의란 이렇게 허무하게 짓밟히는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법이란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을 위한 법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을 위한 법으로 만들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법이란 수단이다. 정의란 수단이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고 힘 또한 너무 부족했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자신들이 만든 룰로써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높고 단단한 성벽을 두르고 있었다. 백홍석과 같은 소시민으로서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 완고한 성이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강동윤(김상중 분)이 바라보는 서회장 일가와도 닮아 있다.

사실 백홍석과 강동윤(김상중 분)은 서로 비슷한 부류라 할 수 있다. PK준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은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지 않다. 세상의 룰이란 그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결국 백홍석은 경찰동료였던 조형사(박효주 분)의 권총을 빼앗아 들고 법정에 난입한다. 스스로 법을 부숨으로써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려 드는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법을 부숨으로써 자신의 정의를 지키려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옳은가? 최소한 대한민국 사회에 있어 그것은 엄연한 불법이며 질서를 파괴하는 범죄에 불과할 것이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경찰의 신분으로 범죄자의 뒤를 쫓던 백홍석이 거꾸로 법에 의해 쫓기는 신세로 전락한다.

테러리스트라 할 것이다. 질서를 파괴하는 자다. 안정을 흔드는 자다. 불안케하고 동요케한다. 부수고 깨뜨린다. 그는 자신의 정의를 위해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법을 부수며 의지를 관철하려 한다. 그렇다면 다시 그는 틀렸는가? 그렇더라도 악법은 법이니 법이 정한대로 PK준의 무죄를 받아들이고, 상습적으로 마약과 원조교제를 해왔던 딸 백수정을 인정했어야 했던 것일까? 그들이 말하는 정의를 자신의 정의로써 받아들이고 따라야 했다고. 잔인한 것은 결국 슬픔이 있기 때문이다. 난폭한 것은 결국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밖에는 말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강동윤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만들고 싶습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죄를 짓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역시 자신의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쉽기만 한 일이다. 너무나 쉽게 정치에 발을 딛고, 너무나 쉽게 경력을 쌓고 영향력을 키우며, 모두의 지지와 지원 속에 대권이라는 정점을 향해 달려간다. 오히려 가장 큰 권력을 손에 쥔 자기로부터 얻어질 이익을 위해 더 열심히 주도적으로 나서는 경우마저 있다. 그런데 강동윤은 단지 서회장(박근형 분)의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 꿈 하나의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르고 그 죄를 덮기 위해 그 가족에게까지 못할 짓을 해야 한다. 강동윤이라고 전혀 죄책감이 없었을까?

물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치가다. 그는 권력의 정점을 노려볼 수 있다. 바로 그 죄책감까지도 그는 자신을 향한 연민으로 바꾼다. 한 사람이 죽었건만 그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기보다 그로 인해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자신을 더 불쌍히 여기게 된다. 딸의 죽음마저 오욕속에 조롱당하는 현실에 스스로 자신을 놓아버려야 했던 한 여인의 죽음 앞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 앞세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자신은 권력을 가져야 한다.

PK준은 다를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없는 기회를 찾아 호스트바까지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대기업회장의 딸이며 국회의원의 아내인 서지수(김성령 분)를 만나 그녀의 후원을 받아 지금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동안의 노력이 아깝다. 그동안의 치열했던 시간들이 아깝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연민인 동시에 포상이다. 결코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그것을 이대로 놓아 버릴 수는 없다. 강동윤은 그래서  PK준에게서 자신과 똑같은 냄새를 맡는다. 백홍석 역시 무의식중에 그의 말을 쫓아 촛불을 끄며 딸이 모아놓은 돈을 후원금으로 내놓는다.

다만 방향이 다르다. 백홍석이 바라는 것은 자신이 법을 지키듯 법이 자신을 지키는 것이며, 그렇지 못한 법을 스스로 부수려는 것이다. 그에 반해 강동윤이 바라는 것은 자신도 그같은 룰을 만드는 사람들 가운데 편입하는 것이다. 스스로 룰을 만드는 입장에서 자신을 위한 룰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백홍석은 테러리스트가 되고 강동윤은 배후가 된다. 백홍석은 직접 세상의 규칙과 맞서 싸우려 들고, 강동윤은 자신의 임의로 그것을 다시 쌓아올리기를 바란다. 그들이 같은 곳에서 출발했지만 다른 곳에서 서로 반대편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이유다. 자신을 연민하는 자와 세상에 분노하는 자의 차이다. 연민이 권력을 쫓게 만들고 분노가 그 권력과 부딪히게 만든다. 그렇게밖에는 그들은 살아갈 수 없다.

물론 말할 것이다. 그저 조금만 양보하면 되는 것 아닌가? 조금만 자신을 양보하고 타협하면 되는 것 아닌가? 굳이 권력을 꿈꿀 필요가 있는가? 권력이 아니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 많다. 그래서 바로 전회에서 강동윤은 말한 것이다. 주는 먹이만 받아먹는 짐승은 되지 않겠다. 그조차 바로 세상이 만들어낸 완고한 굴레다. 스스로 분수와 주제를 알고 양보하고 타협하라. 현실에 만족하라. 그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 딸을 위해서라도 잘못된 합의에 동의할 수 없는 백홍석과 같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죄를 저지른다.

권력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권력자의 날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갖는 탐욕과 자기연민, 그럼에도 그들이 권력을 쥐려 하는 의지와 의도에 대해. 권력이 말하는 정의에 대해서도. 그조차 서회장의 일가라고 하는 기존의 권력 앞에서 하찮은 주변에 불과하다. 그들의 하수인이다. 권력이란 자본의 하수인이고, 법이란 권력의 하수인이다. 그 하수인의 아래에는 소시민인 백홍석이 있다. 그것을 최정우(류승수 분) 검사도 안다. 그가 분노하지만 분노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너무나 잘 알기에 그 분노가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가를 이미 알고 있다. 그래보여도 그 또한 이 사회의 엘리트다.

서회장 일가의 모습을 바라보는 강동윤의 외로운 시선이 서럽다. 강동윤에게서 배척당하는 서지수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다. 강동윤을 경멸하며 보는 서영욱(전노민 분)의 시선은 차라리 시리기까지 하다. 전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강동윤을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아무리 뛰어다니며 발버둥쳐도 들어주는 이 하나 없는 죽은 백홍석의 아내 송미연(김도연 분)과 닮아 있다. 강동윤이 스스로 자신의 양심을 죽이고, 송미연이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죽이는 이유일 것이다. 무엇이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가? 무엇이 사람을 잔인하게 난폭하게 만드는가? 그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검찰청에서 이송을 위해 나오는 도중 마주친 PK준의 팬들을 향해 백홍석은 손가락으로 총을 만든다. 그것은 분노였을까? 경멸이었을까? 아니면 증오였을까? 조롱이었을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에게 죽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직접 부수고 비웃고 싶은 대상이 생겼다. 법을 지켜야 할 경찰이 법을 어기고 범죄자가 된다. 삶이란 그래서 역설이다.

단순한 악역이 아니다. 층층시하다. 무엇이 강동윤을 악으로 내모는가? 무엇이 강동윤으로 하여금 죄책감에도 악으로 내돌리도록 몰아세우는가? 이제 백홍석이 악이 된다. 너무나 명확한 악이다. 악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가? 쉽지 않은 물음이다. 알더라도 답하기 꺼려진다. 무겁다.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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