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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5.23 15:26

작품과 감상, 작가는 텍스트를 만들고 대중은 해석을 갖는다.

작품에 있어 모두가 주인이 되는 이유, 모든 해석과 이해는 옳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20세기 초반 러시아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는 어느날 술에 취해 자신의 작업실로 들어오다 한 점의 멋진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도대체 누가 그린 것일까? 무엇을 그린 것일까? 하지만 정작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살펴보자 그것은 자기가 그린 그림을 거꾸로 걸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바실리 칸딘스키가 현대추상화의 시조로 불리게 된 계기였다.

어느날 길을 가며 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떤 차가 멋진가? 어떤 차가 성능이 더 좋은가?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필자 역시 어떤 차를 가지고 싶은가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눈에 어떤 차가 들어왔다.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멋진 디자인의 차였다. 바로, 저런 차야! 하지만 그 차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경차에 불과했다. 단지 필자가 본 것은 차의 뒷모습이었다. 차의 뒷모습을 앞모습으로 착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텍스트보다는 해석이다. 아무리 이름이 거북바위라고 실제 거북이와 똑같이 생긴 것은 아니다. 용모양의 바위라 하는데 실제 바위로부터 용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기는 필자가 어려서 가장 곤란해하던 것 가운데 하나가, 도대체 별자리의 이름과 그 형태와의 연관서에 대한 의문이었다. 아직 어린 필자의 상식으론 별을 몇 개 이었을 뿐인 도형과 아름다운 미인이나 영웅의 모습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다. 결국 별자리가 그 형태를 담고 있기 보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그 형상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던가.

어떤 사람들은 코미디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같은 코미디를 보며 울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루하기만 한 이야기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척 흥미롭다. 때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슬픈 노래로 여겨지기도 한다. 부모가 아이를 낳는 그 순간에는 자신의 아이로써 아이를 낳지만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부모의 자식이 아닌 아이 자신으로서일 것이다. 작가는 자기가 직접 작품을 쓰지만 그것은 독자적인 생명을 가지고 사람들 사이에 이해되고 소비되어진다. 기억되고 남게 된다. 작가는 더 이상 개입할 여지가 없다. 어쩌면 상당히 억울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마 많은 작가들이 고집을 부리고 있을 것이다. 말이 많다. 원래는 이런 의도였다. 원래는 이런 의도로 작품을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혼란만 부추길 뿐이다. 작가는 그렇게 말하는데 보는 자신은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작가가 무능한 것인가? 아니면 대중이 무지한 것인가? 여전히 작품을 자기의 품에 끌어안고 있으려 하다 보니 생기는 모순이다. 작가가 말이 많으면 정작 대중이 작품에 개입할 여지가 사라진다. 작가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이상 작품은 언제까지고 대중의 몫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작품을 소비하는 것은 대중 자신이다.

필자가 어떤 작품을 대하든 작가의 말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전에 어떤 의도가 있었다던가, 아니면 작품을 진행하는 도중 어떤 사연이 있었다던가, 그런 것은 결국 작품을 통해 보여지고 만다. 그것은 대중으로서 스스로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에 대해 말을 더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직무유기다. 그나마 사람들이 터무니없이 오해를 할 때 원래 이런 의도였다고 한 마디쯤 변명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자기가 그런 의도로 만들었으니 그렇게 받아들여달라. 어리광일 것이다. 그들은 프로다. 작품을 만들고 돈을 받는다. 그렇다면 대중이 충실히 자신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지 구걸하거나 강요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무능이고 직무유기다. 하지만 작가들은 너무 말이 많다.

결국은 자기 자신이다. 만드는 것도 자신, 즐기는 것도 자신이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드는 것도 작가 자신, 어떤 의지로써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대중 자신이다. 작가는 작품을 만들고 대중은 그것을 소비한다. 사실 글을 쓰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오해가 없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오해가 생긴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필자의 역량이 그것밖에 안되는 것이다. 한때 그토록 발버둥치며 오해를 풀기 위해 많은 노력도 기울여봤지만 결국 그 또한 읽는 사람 자신의 역할인 것이다. 필자는 단지 글을 쓸 수 있을 뿐이다.

원래 의도가 어떻네. 원래 어떤 의미로 이런 장면을 넣었던 것이었고. 어쩌면 졸작일수도 있다. 작가 자신이 아무 생각없이 형편없이 휘갈겼을 뿐인 의미없는 작품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꾸로 그린 그림에서도 대단히 아름다운 예술을 찾고 보았었다. 차의 뒷모습에 불과한데 세상에서 가장 멋진 차의 모습을 보았었다. 그저 돌덩이일 뿐이다. 거북이가 되고, 용이 되고, 사람의 얼굴이 된다. 어떤 다른 형태를 갖게 된다. 단지 점에 불과한 별들이 전설의 이름을 갖기도 한다.

바로 자신이 주인이다. 작가는 작가로써 작품을 쓰고 세상에 내보내면 그것으로 역할을 다한 것이다. 그럼에도 작품은 어떤 생명력을 가지고 대중 안에서 얼마나 오래 깊이 크게 살아남는가? 대중은 바로 그 작품을 받아들인다. 자기를 투사하고 자기를 투영하며 그 안에서 또다른 자신을 찾아낸다. 또다른 형태와 이름을 부여한다. 자기의 것이다. 그것이 작품이다. 치약을 이를 닦는데 쓰지 않고 청소하는데 쓰더라도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닌 것처럼. 쓰는 것은 역시 자신인 것이다.

하여튼 작품 하나 끝나고 말이 들끓을 때마다 항상 하고 싶은 말이었다. 바로 그 모든 말들이 정답이다. 그것이 어떤 구걸이거나 강요만 아니라면. 작가는 작품을 쓰고 대중은 그 작품을 소비한다. 어떤 형태로 쓰든 어떤 형태로 소비하든 상관없다. 작품을 만들 때는 작가가 주인이고 작품을 소비할 때는 대중 자신이 주인이다. 누구도 그것을 침범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옳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한다. 작가는 쓰고 대중은 소비한다. 바로 그것이 창작이라 하는 것이다.

때로 남들은 졸작이라 싫어하는 작품을 대단하게 좋아하기도 한다. 남들은 대작이라 칭찬하는 작품인데 형편없이 혹평하며 외면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다. 그것이 필자가 대하는 작품이다. 그것은 누구도 무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권리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의무이기도 하다. 거짓을 써서는 안된다. 거짓을 말해서는 안된다. 단 하나의 약속이다.

의도한 것이면 좋다. 설사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상관없다. 결국은 내가 본다. 내가 듣고 내가 느끼고 내가 판단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의도한 것이었고 그것을 내가 이해할 수 있었다면 작가와 나는 서로 통한 것이 된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리뷰를 쓰고 감상을 이야기하는 이유다. 하지만 아니더라도 작품으로 충분하다. 나머지는 사족이다. 의미없다. 다만 오랜만의 혼란에 한 마디 힌트가 될 수 있는 말을 더한다. 바로 그것이 정답이다. 바로 그것이 의미다.

미안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배제한다. 배우들의 입장 또한 한 쪽으로 치워둔다. 다른 시청자의 입장 또한 살짝 미뤄둔다. 결국은 내가 보았다. 내가 느꼈고 내가 판단했다. 아마 모두는 같을 것이다. 그런데도 확신이 없어 자꾸 주위의 눈치를 본다. 하지만 바로 느낀 그것이, 판단한 그것이 정답이고 옳은 것이다. 그것이 작품이다. 그것이 재미있는 것이다. 더 재미있어진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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