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5.18 09:07

적도의 남자 "김선우의 분노, 용서란 의무가 아닌 권리다."

춥고 외롭기에 죄를 지은 이들이 오히려 더 춥고 외로워지는 이유...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필자가 일상에서 곧잘 인용하는 대사 가운데 그런 것이 있다.

"미안하다는 말로 끝날 거면 경찰따위는 필요없어!"

당연한 말이다. 미안하다 한 마디 해서 끝날 일이면 굳이 경찰따위 필요없다. 검찰도 필요없다. 법원도 필요없다. 처벌은 복수가 아니다. 처벌은 당연히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치러야 하는 사회적 댓가다. 혹은 개인적인 비용이다. 안타깝게도 이장일(이준혁 분)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때 내가 널 더 세게 쳐서 죽여버렸어야 되는데..."

차라리 최광춘(이재용 분)은 사과한다. 정확히 김선우(엄태웅 분)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더 이상 딸 최수미(임정은 분)가 이장일에 집착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 딸의 앞에 사과한 것이고 그래서 그는 딸에게 이끌려 증언마저 포기하고 홍콩으로 떠나고 만다. 이용배(이원종 분)도 사과를 한다. 하지만 그 역시 단지 이장일의 아버지로서 이장일에게 하는 사고다.

그들은 죄가 없다. 스스로 그렇게 믿는다. 단지 그것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저 진노식(김영철 분)이 시켜서 그렇게 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진노식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을 결정한 순간에조차 이용배는 아들 이장일에게 진노식에 대한 원망과 증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자기가 죽였고 자기가 죽이려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자기의 의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죄가 없었고 너무나 쉽게 사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장일은 사과하지 못한다. 그는 검사다.

차라리 이장일이 조금 더 뻔뻔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지금의 이장일은 겁먹고 웅크려 떨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모르고 그저 겁먹고 우는 아이와 같다. 김선우가 하나하나 되짚어 돌려주는 행동들이 그의 죄를 일깨운다. 자기가 그때 무슨 짓을 했는가. 애써 잊고 있었다. 애써 그동안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록새록 그의 묻어두었던 양심을 헤집는다. 김선우는 그때 이렇게 당했는가? 자신은 그때 이렇게 행동했는가? 더구나 그의 아버지마저 그의 앞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된다. 목을 매단 채 발견된 아버지를 끌어안고 울부짖던 김선우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도대체 김선우에게 어떻게 사과하라는 말일까?

최수미라면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그저 탐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가진 것이 없는데 미안할 것이 무에 있겠는가? 그저 탐욕했을 뿐인데 그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비루하다는 것이다. 비굴한 것이다. 차라리 비겁하지조차 않다. 무모하기까지 하다. 이장일이 최수미를 끔찍이 싫어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녀는 이장일 자신이다. 그것도 가장 비루하고 비굴한 이장일 자신이다. 그녀는 태연히 말한다. 이장일을 용서해달라고. 자기는 아무것도 자기지 못했고 김선우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가진 친구니까.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을 원망하는 말로 대신한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대신 증오와 저주를 퍼붓는다. 더 미워하라. 더 증오하라. 어파치 더 이상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기란 불가능하다. 이장일 자신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지도, 스스로 죄의 댓가를 치르지도 못하는 이장일의 나약함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김선우의 미움을 받는 것, 그의 복수의 대상이 되는 것, 혹은 차라리 온전히 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악인이 되는 것. 그러나 이장일은 악인조차 되지 못한다. 악인이란 바로 진노식과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장일이 수십년을 더 묵고 나면 그때는 진노식이 될 수 있다.

후회에 익숙해진다. 후회로 인한 상처에까지 익숙해진다. 그조차 기꺼이 받아들이고 만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그렇게 행동하리라. 당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믿는다.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믿으려 한다. 김선우가 문태주(정호빈 분)의 아들일 것이라 믿는다. 그를 김경필의 아들이라고 여긴다. 자신의 아들은 아니다. 자기가 죽인 약혼녀 은애는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부정한 여자일 뿐이다. 설사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믿고 후회하며 그렇게 행동한다. 죄로 인해 가장 상처받는 것은 누구일까? 최수미의 비루한 현실이 그녀를 비굴하게 만들 듯, 비루한 죄가 그들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다. 악인이란 가장 비참한 현실에서 그것을 비겁하게 익숙해져버린 가련한 종자들일 것이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 해악이 될 수 있기에 사회는 일찍부터 그들을 배제하고 격리하고자 시도해 왔다.

이장일이 시간이 지나면 진노식이 된다. 어쩔 수 없음을 되뇌이며,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세뇌시키며, 스스로 그런 존재임을 애써 설득하고 만다. 진노식이 스스로 김선우에게 자신은 그런 존재임을 당당히 밝히며 말하던 것처럼. 더 이상 상처입을 것도, 헤집어 너덜거릴 것도 없는 앙상한 알몸의 존재다. 춥고 외롭다. 춥고 외롭다는 사실조차 그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의 주위마저 춥고 외롭게 만든다. 이미 결혼도 하고 비록 데려온 딸이지만 자식마저 두었음에도 그들을 잊고 있는 그 자신에 대한 형벌인 셈이다. 더 이상 사랑하는 아무것도 없기에 상처입을 것도 없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살아간다.

과연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처벌한다고 해서 돌아오는 것이란 무엇일까? 전혀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다. 자기가 어떤 무슨 잘못을 지었는가를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자기가 지은 죄를 모르고 오로지 이장일에 대한 미안함으로 이용배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고, 최광춘 역시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단지 껄끄럽고 불편하기만 할 뿐이다. 빌딩의 옥상에서 이장일은 전혀 단 한 마디의 사과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죽였다면 김선우는 단지 살인자일 뿐이다. 그래서 처벌한다면 그는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죄를 짓고도 분노하여 원망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그래서다. 그들에게 처벌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하물며 용서란 것은.

처벌이라는 것도 사실 용서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만한 댓가를 치르고 나면 그만 용서받아도 좋다. 이만한 댓가를 치르고 났으면 그만 용서해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 처벌을 받으라. 그러나 처벌을 받아도 전혀 자기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어차피 처벌을 받는다고 용서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거기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이장일은 스스로 용서받을 생각이 없고, 용서받을 생각이 없는 이장일을 처벌하는 것조차 김선우에게는 의미가 없다. 김선우가 끊임없이 되뇌이는 '이장일이 당시 김선우를 내리쳤어야 했던 이유'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용서할 생각따위 없지만 이제라도 이장일에게 자신의 죄를 일깨우도록 해주고 싶다.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최소한 절망하며 살 수 있도록. 그것이 그가 준비한 복수다.

아무도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최광춘도 이용배도 단지 자신의 딸과 아들에게 용서를 구했을 뿐이다. 최수미는 비루한 자신을 이유로 들어 뻔뻔하게 오히려 이장일을 용서해달라 요구한다. 용서하지 않는 그를 비난한다. 이장일은 자신의 앞에서 오히려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이용배 역시 모두 자기가 한 일이라며 사과의 형식을 빌어 그런 이장일을 용서할 것을 부탁해 온다. 김선우가 눈을 뜨고 보는 세상이란 그렇다. 어쩌면 인간이란 이렇게까지 염치가 없을 수 있을까? 과연 그의 눈이 문제인 것일까? 그를 둘러싼 세상이 문제인 것일까? 그래서 그 모두를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끝으로 내몰고 후회하도록 만들어주고 싶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용서를 구하도록 만들어주겠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한지원(이보영 분)이 있다. 그가 마지막 순간 최광춘에게 전화를 건 이유였다. 모두의 파멸을 바라지만 그런 식으로는 아니다. 김선우의 강함이며 그의 선함과 정의로움이다. 한지원일 것이다. 그는 복수 앞에서조차 항상 당당하다. 약한 것은 그의 분노 앞에 노심초사하는 죄와 악의 종자들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용서란 의무가 아니다. 복수 역시 당위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권리일 뿐이다. 용서해야 할 일을 당한 자신의, 그리고 복수를 결심할 일을 당한 그 자신이 직접 선택하고 결정할 문제다. 제아무리 처벌을 받고 용서를 구하더라도 그를 용서할 것인가의 여부는 오로지 용서하는 당사자에게 있는 것이다. 복수 역시 마찬가지다. 누가 대신할 수 있을까? 누가 대신해 하라마라 말할 수 있을까? 법은 단지 법이 정한 규칙에 따라 처벌할 뿐이다. 그것은 용서도 복수도 아니다. 법이 시키니까 그대로 따라 처리할 뿐인 기계적 절차에 불과하다. 하필 공소시효가 끝나고 모두가 바쁜 이유가 그것이다. 정작 진노식과 이장일에게 분노하며 그들의 죄를 처벌하려고 쫓는 서지호는 단지 인간일 뿐이다. 그조차 용서할 권리는 없다.

용서하려 해도 용서를 구하지 않는데. 용서하려 해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하염없이 죄를 반성하며 용서를 구해도 해 줄 수 있을까 망설이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어쩌면 김선우는 이장일을 용서할 준비가 끝나 있었다. 그것은 마지막 의식이었다. 모든 죄를 되돌려주고 이장일로부터 사과를 받고 그를 용서해준다. 그로부터 김선우 자신도 증오와 복수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이장일 자신이 원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용서는 해줄 수 없다. 제아무리 한지원이 원하더라도. 그는 처음으로 화를 낸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요."

하물며 최수미까지 끼어들어 그를 용서할 것을 종용해 온다. 그 순간 진심으로 증오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처럼 괴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지원에 반발하면서도 그는 한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육신의 눈이 멀어 그녀에게 의지했다면, 지금은 분노와 증오에 눈이 멀어 이성의 눈이 멀 것만 같다. 항상 그런 때 그의 눈을 대신하는 것이 한지원이다. 비록 복수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폭주하지 않도록 그녀가 항상 곁에서 지켜준다. 원래대로라면 최광춘이 이용배에게 공격당하는 것은 모두의 파멸을 위한 최선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직전에 김선우는 멈추고 만다. 하필 그 순간 한지원은 그에게 희망을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어간다. 최수미의 죄로 인해 최수미의 아버지 최광춘이 이장일의 아버지 이용배에게 린치를 당하고 응급실로 실려온다. 자신과 아들 이장일의 죄로 인해 이용배는 또다른 죄를 짓고 자기가 과거 김경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음을 선택하고 만다. 한지원의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아버지는 한결같이 한지원을 사랑하며 그래서 그녀를 위해 분노조차 남기지 않았다. 김선우가 아버지를 마주한다. 자신이 죽여야 할 아버지다. 그 역시 말한다. 이 모든 것이 김선우 자신 때문이었노라고. 문태주가 말한다. 바로 그가 그의 아버지라고.

어쩌면 아버지란 이렇게 잔인한 존재인가? 그럼에도 편애한다. 최광춘은 항상 딸을 위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딸에게는 아무것도 남기려 하지 않는다. 한지원의 아버지 역시 그랬다. 그래서 한지원은 지금도 진노식에 대한 분노로부터 자유롭다. 하지만 이장일의 아버지 이용배는 아니다. 김선우의 친아버지 진노식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순간에조차 자신을 사랑해서임을 강조해서는 남은 이장일은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자기를 사랑해서 죄를 지었고 자기를 사랑해서 아버지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선택했다. 차라리 진노식은 김선우를 원망한다. 너는 나의 아들이 아니다. 너로 인해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너의 어머니 은애는 단지 자신을 배신한 자기의 여자일 뿐이다. 어머니를 두고 경쟁하는 프로이트의 유년기의 공포를 보는 듯하다. 아버지는 그를 거세하려 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 하다못해 양딸인 박윤주(김혜은 분)조차 아버지인 진노식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엘렉트라와 오이디푸스일까? 눈먼 오이디푸스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킨 것은 그녀의 딸 안티고네였다. 엘렉트라와 안티고네가 만난다.

그래도 다행이다. 진노식은 김경필을 자기가 직접 손을 써서 죽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 또다른 아버지 문태주는 이제 더 이상 진노식을 증오하지 않는다. 김경필이나 문태주나 한결같이 김선우 자신의 행복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를 지켜주는 한지원 또한 오로지 그의 행복만을 바래준다. 복수를 그만두라고 말하지만 정작 뻔뻔하게 용서를 말하는 최수미 앞에서는 누구보다 당당하게 그의 편을 들어준다. 선택은 김선우가 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 항상 그의 곁에는 한지원 자신이 있어줄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아버지를 결국 죽인다. 낳아주었을 뿐 진노식은 이미 그의 아버지가 아니다.

가족이란 천륜인가? 아니면 인륜인가? 대부분의 경우 천륜과 인륜은 같다. 하지만 때로 충돌할 때가 있다. 낳아주어서 부모인가? 아니면 부모라 여기기에 부모인가? 낳아주었지만 버렸다.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다. 반면 피도 이어지지 않은 자신을 친자식처럼 지금까지 보살피고 길러주었다. 누구에 우선할 것인가? 아직까지 피가 이어져서 가족이라는 관념이 강한 사회라면 한계가 있을 것이다. 진노식이 김경필을 직접 죽이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김선우는 선택해야 한다. 낳아준 아버지인가? 아니면 자신을 길러주고 지금이 있게 한 아버지들인가? 그것은 그의 안에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는 길이다.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 잔인한 선택이다.

최수미에게는 가혹할 것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가져 본 적이 없다. 한지원은 김선우를 가졌다. 김선우를 가졌기에 그의 진정한 존재를 깨닫고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최수미가 볼 수 있는 것은 멀리서 지켜봐야 하는 이장일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오히려 실수로 맺어진 잠시의 관계로 인해 더 절실히 깨달은 것이 이장일과 그녀는 함께 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었다. 한지원은 진심으로 김선우의 존재를 위하지만 최수미에게 남은 것이란 무엇일까? 탐욕이란 어쩌면 허상이다. 간절함이란 실체에 대해 갖는 감정이다. 그녀의 이장일에 대한 감정이란 그렇게까지 간절한가? 최수미의 이장일에 대한 감정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다. 이장일을 사랑하지만 대상없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최수미 자신조차 없는 사랑이다. 그녀는 화가다. 그녀의 리얼리티란 그녀의 그림 속에서만 존재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그녀는 전혀 리얼하지 못하다.

이준혁에 대한 칭찬을 안 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보았던 가장 적나라한 죄인의 연기였다. 악인이 아니었다. 그는 죄인이었다. 그것을 그는 적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단지 죄를 저지른 인간이었다. 그 혼란과 그 공포와 그로 인한 체념과 원망, 그리고 분노. 그러나 결국은 죄로 인해 스스로 안에서부터 허물어져간다. 껍데기만 남는다. 진노식은 악인이다. 그는 마치 진노식의 아들같다. 그렇게 그는 안에서부터 허물어져 껍데기만 남은 채 자신을 잃어간다. 그 경계에 있다. 간절하게 발버둥치며 애처롭게 손을 내미는. 그 손짓조차 염치없다.

결국 자신의 죄로 인해 진노식은 파멸을 맞는다. 김선우의 계략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진노식의 문태주에 대한 뿌리깊은 열등감과 죄의식이 그를 파멸이라는 함정으로 내몰고 만다. 그를 무리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문태주와 김선우, 아니 과거 그가 죽음에 이르게 한 은애였기 때문이다. 그런 진노식을 지금의 아내 마희정(차화연 분)이 차가운 눈으로 지켜본다. 한 번도 그의 마음에 들어가 보지 못한 남겨진 이의 증오가 엿보인다. 그녀는 진노식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일까?

춥고 외로워서 죄를 짓는다. 하지만 결국 죄를 지어도 춥고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죄를 지었기에 더 춥고 외로워만진다. 가족이 있지만 진노식은 가족을 돌아보지 못한다. 최수미도 이장일도 모든 것을 잃어간다. 아버지를 잃고 사랑을 잃고 자존과 자아를 잃는다. 남은 것이란 없다. 반면 김선우에게는 한지원이 있다. 그는 춥지도 외롭지도 않다. 부러운 이유다. 즐겁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