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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5.12 10:25

사랑과 전쟁2 "체면과 명예, 다른 사람의 눈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 하다."

다른 사람의 눈과 체면이 개인의 존엄과 행복마저 결정하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체면과 명예는 얼핏 자존과 관계된 욕구로서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체면을 지킴으로써 명예롭고, 명예를 지킴으로써 체면을 유지한다. 결국은 얼마나 사회적으로 당당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가? 하지만 정작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면 어째서 체면과 명예가 서로 다른 어휘로써 존재하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다.

체면이란 관계를 전제한다. 명예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전제한다. 타인이 보기에 명예로운 것이 바로 체면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 부끄럽지 않도록 체면을 지키는 것이 명예다.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스스로 아무리 당당해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체면이 아니며, 아무리 남들이 알아주더라도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면 그것은 명예가 아니다. 그만큼 체면이란 의존적이고 명예란 독립적이다. 과연 전교수석을 하기 위해 선생님이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컨닝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컨닝을 해서라도 전교수석을 차지하고 싶은 것이 체면이고, 그 순간 가지 자신의 양심과 존엄함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명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마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에 가장 안좋은 영향을 끼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부분일 것이다. 과거 한국사회에도 선비정신이라는 것이 있었다. 선비에게 죽음이란 그다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멸문지화 역시 그다지 꺼려할 바가 아니었다. 그보다 두려운 것은 자신의 올곧은 양심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보다 더욱 꺼려했던 것이 선비로서 자기가 지켜야 하고 행해야 할 바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왕이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가라 할지라도 해야 할 말이 있으면 해야 했다. 유배는 훈장이었고 사형은 명예였다. 그 후손마저 끊겼음에도 사육신은 조선조 내내 충신으로 남아 마침내 숙종에 의해 복권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제국주의에 의핸 식민지 지배는 한국인에게 그러한 자존감을 빼앗아가 버렸다. 이민족에 의해 - 그것도 그토록 업수이 여기던 왜놈들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그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지배 자체가 그것을 바라지 않았거니와 그 과정에서 겪어야만 했던 굴욕과 좌절은 더 이상 한국인으로 하여금 전처럼 자존을 지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자존이란 곧 본능이기에 다른 수단을 통해서라도 한국인들은 그 빈자리를 채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구나 해방 이후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가난하고 비천한 삶이란 곧 악이라 여기는 물질화된 속물적 욕망을 배우게 되면서 어느새 그것이 명예의 빈자리를 채우고 만다. 물질적 부와 사회적 지위가 곧 명예가 되었고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게 되었다.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바라고 모든 개인들이 한 줄로 서서 달려간다. 지금의 위치가 곧 전체 가운데 자신의 순위다. 지금의 순위야 말로 모든 개인들 가운데 자신의 존재이며 가치다. 그래서 자살들도 많이 한다. 자살이란 존엄을 위한 죽음이다. 존엄한 자신으로서 남고 싶을 때 사람은 자살을 한다. 더 이상 살아도 희망이 없다. 더 이상 산다고 구차하고 비참할 뿐이다. 고작 성적이 떨어진 것 뿐인데 어처구니 없게도 아이들은 죽음을 선택한다. 학교 다니면서 성적으로 인해 한 번 자살을 꿈꾸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것은 사람을 극단으로 몬다.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무언가 되고 싶은 것이 있어서도 아니다. 대학을 선택하는 것도 적성과는 상관없다. 직업을 선택하는 것도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자기가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무언가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만족이란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 온다. 부모와 친구와 이웃들. 남편 박정민이 의대에 간 이유였다. 아내 윤주나가 의사남편을 얻고자 했던 이유였다. 정확히 윤주나의 친정엄마였다. 박정민이 굳이 병원을 개업할 것을 고집한 이유이기도 했다. 같은 의사인 친구들 사이에서 돋보이고 싶다.

결국 그들이 파경에 이르게 된 이유였다. 물론 결혼에 있어 물질적 조건이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난한데 사랑만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현실은 가난하지만 사랑하기에 행복하다는 말은 소설의 대사로서나 쓸모있다. 그런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게 될 수 있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또한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대개 그렇게 되기 전에 차라리 행복을 포기하고 만다. 체념 속에 그냥 살아간다. 동화와 현실은 다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의사로서 자기 병원을 가지고 싶다. 그것이 진정 자기 자신을 위한 욕구였다면 그 자체를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 그나마 윤주나와 박정민이 차이나는 부분이다. 병원조차 목적이 아니었다. 병원마저 수단이었다. 어떻게 하면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고 과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친구들로부터 놀라움과 부러움의 시선을 받을 수 있을까? 자존적 만족이 아닌 타율적 인정을 통해 그것을 대신한다. 행복할 턱이 없다. 항상 주위의 눈이 신경쓰일 텐데. 그들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 아닌 결국은 주위의 타인들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가? 당연히 아닐 것이다. 체면이란 사회적인 것이라면 명예란 인간 본연의 것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존엄과 관계가 있다. 누구나 명예롭고 싶어한다. 단지 그 명예를 곧잘 체면과 혼동한다. 자존이 없어서다. 스스로 존엄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엄에 대한 확신이 없다. 남편 박정민에 대해 내재된 뿌리깊은 열등감을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굳이 처가의 재산을 빌어서까지 그리 자신을 과시하려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사람의 눈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도 건전하게 유지가 된다.

단순한 부부의 문제일까? 그보다는 우리 사회 전반의 여러 문제가 이와 같은 결혼이라는 현실 속에 투영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남녀라 할 지라도 결혼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은 바로 그같은 현시르이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고 이제껏 부대끼며 경험한 바로 그 사회인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그같은 선택을 한다. 윤주나 또한 그다지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을 터임에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의사사모님이라는 실체없는 허울을 기꺼워하며. 그것은 과연 누구의 것이었을까?

반전이 기막히다. 아니 사실 어느 정도 감은 잡고 있었다. 그동안 꾸준히 의사와 결혼했다가 파경을 맞은 윤주나의 친구 은주에 대해 대화 속에서 언급되고 있었다. 하필 윤주나가 친구와 통화를 하고 난 이후 병원장의 딸이라는 제니 킴이라는 여자가 나타났을 때 충분히 의심해 볼 만했다. 결국 그녀로 인해 윤주나는 그토록 바라던 이혼을 할 수 있었다. 아파트까지 돌려받았다. 예상한 결말이기는 하지만 자못 통쾌하기는 하다. 자문위원들의 조언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결국 자신의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부모도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차라리 탐욕하더라도 자기를 위해 하는 것이다. 욕심을 부리고 그로 인해 무리를 하더라도 오로지 자신을 위해 그리 하는 것이다. 내가 만족한다. 내가 즐겁다. 내가 행복하다. 다른 사람의 눈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어차피 타인 아니던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산다.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갖고 그런 관심들에 신경을 쓴다. 비극은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자기의 행복을 위해 결혼한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서구사회가 수백년에 걸쳐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루어낸 물질문명을 우리는 너무 단기간에 그것도 타의에 의해 받아들이고 말았다. 주체적으로 고민할 시간도 반성할 여유도 없었다. 어떻게 그것이 당연하게 지금까지 이어진다. 입맛이 쓴 이유다. 아픈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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