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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왕 "하필 제목이 '패션왕'인 이유..."

이기적이지도 이타적이지도 못하며 욕망하며 살아가는 허세와 허영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흔히 의식주라 부른다. 식이란 먹는 것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주는 안전한 것이다. 집이 없으면 외부의 변화에 인간은 한없이 취약하다. 그렇다면 의는 어떨까? 옷을 입지 않으면 사람은 죽을까? 하지만 허술하게라도 집을 짓고 사는 원시부족 가운데서도 옷을 입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가영(신세경 분)에게는 집이 없다. 원래 그녀에게는 집이 없었다. 어려서는 조순희(장미희 분)의 공장에 얹혀 살았고, 조순희의 공장을 나와서는 강영걸(유아인 분)의 공장 한 귀퉁이에 침대 하나를 놓고 살았다. 지금도 봉숙(유채영 분)의 집에 신세지고 있는 처지다. 강영걸이 사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가장 먼저 한 것도 다름아닌 자기 집을 산 것이다. 그것도 정재혁(이제훈 분)과 같은 아파트에. 그리고 자신의 집이 아닌 정재혁의 집에서 이가영은 강영걸과 마주친다.

그렇게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참 잘 먹는 아가씨다. 꿋꿋하다. 맨밥에 김치, 김이면 충분하다. 그것을 정재혁이 뺏어 먹는다. 그리고는 다음날 그녀를 위해 화려한 도시락을 준비한다. 이가영이 함께 하지 않는 도시락은 크고 화려하지만 그러나 맛이 없다. 강영걸과도 중요한 매순간마다 밥을 먹었다. 그가 직접 생일상까지 차려주었다. 정재혁에게 초대되어 강영걸과 최안나(유리 분)와도 함께 밥을 먹는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은 평등하다. 물론 정재혁의 초대를 받아 간 레스토랑에서 강영걸과 이가영은 메뉴의 가격표를 보고 경악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고 보면 강영걸이 정재혁에게 결정적으로 원한을 품게 된 것도 밥 한 끼의 서운함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배고프다. 당장 죽을 것 같이 힘들고 초라하다. 그런데 그런 강영걸을 정재혁이 무시한다. 비웃고 외면한다. 알몸이 된다. 강영걸과 정재혁이라는. 그 순간 유수의 기업 J패션의 아들 정재혁은 사라진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증오의 대상이 된다. 이제까지 정재혁이란 그와 다른 별세계의 존재였다. 하필 정재혁은 이가영의 아무것도 아닌 도시락을 맛있게 뺏어먹는다. 이가영의 라면을 뺏어먹고 바닥에 내팽개친다. 먹는 것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아무런 가릴 것 없고,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라도 사람은 먹어야 한다. 아무리 초라한 먹거리라도 사람은 먹어야 산다. 배가 부른 순간이 사람이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옷은 다르다. 먹는 것은 자기를 위해 먹는다. 집도 결국은 자기를 위해 산다. 하지만 옷은 아니다. 옷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입는다. 옷이란 신분이다. 성별이고 나이이고 직업이다. 무엇을 어떻게 입는가에 따라 사회적으로 자신의 역할이 구분된다. 사회적인 자신의 위치 또한 나뉘게 된다. 집이야 굳이 초대하거나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그다지 상관없다. 먹는 것도 이가영처럼 혼자서 도시락을 먹을 것이면 배만 부르면 된다. 하지만 옷은 아니다.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 것이라면 사람들과 동떨어져 혼자 사는 것이 좋다. 옷이란 사회적 욕구다. 옷이란 사회적 욕망이다.

정재혁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에 어울리는 모습을 갖추려 노력한다. 김실장(김병옥 분)과 처음 대립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는 회사의 후계자다. 그에 어울리는 권위를 갖춰야 한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에 어울리는 실적을 올려야 한다. 그같은 강박이 그를 떠민다. 최안나란 정재혁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최안나에게 정재혁은 또한 어떤 의미였을까? 강영걸은 신분상승을 꾀한다. 지금의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 화려하게 날아오르고 싶어한다. 정재혁이 있는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다. 그는 가장 괴롭고 생각이 많을 때 옷을 만진다. 이가영은 어떨까? 공교롭게도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초라한 이가영이지만 그녀의 옷만은 누구보다 멋지고 화려하다. J패션으로 출근하게 되고 나서는 더욱 화려하게 차려입고 있다.

드라마가 하필 <패션왕>인 이유가 아닐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와 식과 주 가운데 다름아닌 의에 주목한다. 생존과 안전과 다른 외형의 의에 집중한다. 굳이 없어도 죽지 않는다. 굳이 없어도 어떻게든 산다. 하지만 사회적인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 남보다 더 비싸고 남보다 더 화려하고 남보다 더 멋진 남보다 더 대단한 옷을 입지 않으면 안된다. 허영이다. 허세다. 하지만 현실이다. 현실의 욕구이고 욕망이다. 그래서 그들은 패션의 주위를 떠돈다. 최소한 멋진 패션을 접하는 동안에는 그들의 고단한 현실을 잊을 수 있을 테니까. 옷이 그들로 하여금 꿈꾸게 만든다. 아니 그들의 꿈이 옷에 집착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패션왕>이다. 사회적인 억압과 집착, 그리고 일그러진 욕망들. 솔직하지 못하다. 전혀 솔직해지지 못한다. 어느새 성공을 거두고 강영걸이 누리는 화려한 드레스룸처럼. 오로지 그 욕망들에 대해서만 그들은 솔직하다. 반면 정재혁이 이가영의 도시락을 빼앗아먹던 장면은 하나의 반전이었을 것이다. 먹는다는 행위는 무엇보다 솔직한 행위다. 옷과는 달리 도시락은 아무리 화려해도 솔직한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정재혁은 이가영을 자신의 집으로 이가영은 강영걸이 선물한 옷을 입고 그 초대에 응한다. 그 옷은 강영걸과의 기억이 담겨 있는 옷이었다. 한때의 순수하던 꿈이었다. 그녀의 허세다. 그리고 그 허세를 입고 그녀는 강영걸과 만난다. 순수로 강영걸과 부딪히고 그리고 거절당한다. 하필 강영걸도 그 옷을 입고 정재혁의 초대에 응하는 이가영을 본다. 이가영의 옷이 그것만 아니었어도 강영걸은 어쩌면 이가영을 그렇게까지 거절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드라마가 혼란스러운 이유다. 당연히 입어야 하는 옷이다. 옷을 입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 당연한 욕구 가운데 하나로서 입는 옷에 숨은 인간의 욕망을 본다. 옷을 입어야 하는 인간의 현실을 본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다. 일그러진 욕망과 현실이 그 가운데에 있다. 집도 절도 없이 먹는것도 초라한데 입성만큼은 화려한 이가영이 그것을 보여준다. 강영걸도 가장 초라하던 순간에조차 입는 것만큼은 잘 입었다. 지금은 더 옷을 잘 입는다. 그들은 옷장사를 한다. 이가영은 옷을 디자인한다.

<패션왕>이란 바로 그같은 현실의 왕일 것이다. 누구보다 욕망을 알고 누구보다 그것을 충족시킨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를 안다. 어떤 옷을 입혀야 하는가도 안다. 그를 위해 사람들은 치열하게 서로 다툰다. 식욕이 생존을 위한 본능이라면 패션이란 사회적 존재로서의 본능이다. 인간은 그렇게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간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치열하다. 허세와 오기 가운데서도 그들은 치열하게 오늘을 살아간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패션이 소재여서가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의 제목이 <패션왕>인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든 어떤 옷이든 입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옷으로 자신을 감추고 지키며 살아간다. 그 옷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원래는 옷이 필요했을 테지만 이제는 욕망이 옷을 필요로 한다. 필요해서 입던 옷이 그 자체를 욕망하도록 만든다. 처음에 무엇때문에 욕망했던 것과는 상관없이 욕망하는 그 자체로써 욕망이 된다. 보다 치열한 그같은 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간다. 사람들은 서로 욕망하며 살아간다. 사람은 살아간다.

어쩌면 <패션왕>이 아닌 <요리왕>이었다면 더 명쾌했을지 모르겠다. 요리에는 어쩔 수 없는 생존의 본능이 담겨 있다. 집이었다면 안락에 대한 이기적 욕구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패션이란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이다. 이타적이면서 이기적이다. 혼란스럽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혼란스럽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한다. 과연 이 옷이 내가 입고 싶은 옷인가? 혹은 내가 입어야 하는 옷인가? 그 답은 누가 내릴까?

문득 사람을 만나려 할 때마다 옷때문에 고민을 한다. 멋지게 차려입어야 하는 상대가 있고, 그냥 그대로 보여주어도 좋은 상대가 있다. 자고 일어난 흐트러진 모습도 좋은 자리가 있는가 하면 몇 시간을 꾸미고 나가야 하는 자리가 있다. 어디가 나의 자리인가? 나이먹어서도 마찬가지다.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면 어떻게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억압도 심하다. 밥은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다. 아니 먹는 것도 결국 입성이 결정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마 그렇기 때문에 <패션왕>이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을까?

이기적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이타적이지도 못하다.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욕망에 충실하지 못하다. 순수하고 진실하지만 결국 서로 오해하고 만다. 답답하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산다는 것 아니겠는가. 삶이란 슬프다. 드라마가 슬프다. 결국 드라마를 보게 되는 이유다. <패션왕>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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