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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4.30 08:47

넝쿨째 굴러온 당신 "아이가 기쁨이 아닌 짐이 되고 마는 까닭..."

나중에 아이들을 위해 포기하고 희생한 것을 탓하고 원망하고 싶지 않아!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현실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와도 닿아 있는 부분일 것이다. 어째서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가? 세계적으로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심지어 한창 내전중인 나라들과 비교될 정도다. 초저출산율에 이은 초고령화사회로 나가며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표면화되어가고 있다. 왜일까?

보이는 그대로다. 차윤희(김남주 분)에게는 일이 있다. 일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 일을 통해 누리는 보람도 있다. 남편 방귀남(유준상 분)과 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당연한 욕심도 있다. 그런데 아이를 낳으면 그 가운데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차윤희가 아닌 아이엄마로써, 차윤희의 남편이 아닌 아이까지 포함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과연 아이란 그렇게까지 낳아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더구나 방귀남은 의외로 아이를 싫어한다. 아이를 싫어하는데 아이를 낳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전통사회에서라면 통했다. 며느리인 것으로 족했으니까. 어머니인 것으로 충분했다. 개인이란 없었다. 시어머니 앞에 며느리였고, 시할머니 앞에 손주며느리였다. 당연히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결혼을 했으니 아이를 낳아 남편과 시부모를 기쁘게 해주어야 했다. 차윤희에게 아이를 낳을 것을 강요하는 시할머니(강부자 분)와 시어머니 엄청애(윤여정 분)의 태도가 그것을 말해준다. 정작 아이를 낳는 것은 방귀남과 차윤희 부부인데 그들 부부의 입장과는 전혀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입장만을 위해 아이를 낳으라 강요한다. 부모로서 자신들이 기뻐서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부모의 바람을 이루어주기 위한 수단으로서 아이를 낳는다. 결국은 아이를 낳는다고 하는 것이 더욱 개인의 행복과 유리되는 결과만을 낳고 마는 것이다.

아이만 낳아준다면 기르는 것은 자신들이 해주겠다. 차윤희의 자궁을 거래대상으로 삼는다. 아이를 길러주는 것을 조건으로 차윤희의 자궁을 빌어 자신들의 아이를 낳으려 한다. 태어난 아이는 오로지 차윤희의 아이일 터임에도. 차윤희가 두려워하는 것이다. 만일 진정으로 자기가 기뻐서 낳은 아이가 아니라면 아이를 위해 보낸 시간들이 후회로 남을 것 같다. 아이를 위해 희생하고 포기한 것들이 아이에 대한 원망으로 돌아갈 것 같다. 그녀는 어머니이기 이전에 차윤희이고 며느리이기 이전에 차윤희이고자 하니까. 차윤희로서 꿈꾸고 바라는 것이 있다. 과연 갈수록 낮아지기만 하는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대책들이 필요한가? 방귀남과 차윤희 두 당사자를 납득시켜 아이를 낳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필요하고 효과적일까?

그래서 차윤희는 임신을 한다. 아마 임신했을 것이다. 방귀남과 차윤희의 가족이 서로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드라마의 끝무렵에 차윤희는 입덧을 연상케 하는 모습을 보인다. 뜻하지 않게 임신을 했다. 그러면 과연 주위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아이를 임신한 차윤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여전히 차윤희는 차윤희일 수 있을까? 여전히 차윤희인 채로 욕망하며 꿈꾸며 살아갈 수 있을까? 단지 막연한 모성에 기대어 섣부른 화해를 시도한다면 상당히 실망스러울 것이다. 문제를 제기했다면 그것을 더욱 심화시켜 답을 도출해야 한다.

결국은 아이를 낳는 것은 부모 당사자라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다. 반드시 낳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그들의 역할 전부인 것도 아니다. 아이를 낳는 수단이 아니다. 아이를 낳는 주체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당당한 주체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들로 하여금 아이를 낳게 할 것인가? 윽박지르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들을 납득시켜야 한다. 바로 강요하고 강제하려 하는 그것이 차윤희를 두렵게 만든다. 혹시나 아이를 낳게 되면 차윤희란 더 이상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차윤희로서 살아가려 한다.

어머니라고 자식이 자신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며느리라고 해서 전적으로 시어머니의 며느리이기만 할 수는 없다. 아들이라고 마냥 아들이 아니다. 아들이면서 아내에게는 남편이다. 바로 전회인 19회에서도 시어머니인 엄청애의 서러움과 외로움을 통해 강조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어머니이기만 한 삶은 서럽다. 어머니이기만 해서는 외롭다. 후회하게 되고 원망하게 된다. 차윤희가 걱장한 딱 그것이다. 일관된 주제일 것이다. 나와는 모두가 서로 다른 타인이다. 서로 다른 남임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소유하거나 구속하려 들지 않는다. 아이도 며느리에게 맡긴다. 대신 장차 아이를 낳아 기를 어머니인 며느리에게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 차윤희임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기꺼이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설득한다. 고부갈등만이 아닌 모든 갈등을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해법이다. 서로 남임을 알 때 모두는 외롭지 않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라고 심각하 이유도 없다.

아내인 고옥(심이영 분)의 임신사실을 듣고서도 남편인 방정배(김상호 분)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그것은 차윤희에게 아이를 낳을 것을 강요하던 시할머니와 시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모가 되어서 아이를 낳아도 기를 능력이 안된다. 아이를 가진 것은 기쁜 일이지만 당장 아이를 낳으면 기를 일이 걱정이다. 준비가 되지 않은 부모와 그런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불행하다. 먹이고 입히는 물질적인 부분만이 아니다. 아이 또한 사람이기에 애정과 관심을 필요로 한다. 아이가 필요로하는 사랑과 관심을 아이에게 쏟을 수 있을 것인가? 준비가 된다면 자신도 기꺼이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리라. 부모가 되리라.

저출산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책이다. 아이를 낳을 만반의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사회가 합의하고 도와준다. 아이를 낳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지만 그같은 요구를 하는 만큼 사회적으로도 그에 따른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유럽의 선진국 가운데 최근 출산율이 상당히 높아지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결국 아이를 낳고 기르기에 부모라면 그 부모들이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납득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아무튼 이 또한 작가의 신랄한 독설일 것이다. 자기도 시어머니이면서 드라마속의 시어머니를 욕한다. 자기도 시누이면서 드라마속의 시누이를 비난한다. 현실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 시어머니나 시누이는 없다며 비현실적이라 지적한다. 막장드라마가 되는 흔한 이유일 것이다.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것들임에도 스스로 인정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막장이 된다. 며느리인 차윤희가 보기에 시어머니 엄청애나 시누이 말숙(오연서 분)이나 TV속 시어머니와 시누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자기와 관련된 일이니 냉정한 평가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딸 앞에서는 친절한 친정어머니가 되었다가 며느리 앞에서는 지독스런 시어머니가 되는 이중성을 갖는다.

말숙의 처절한 앞날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어느새 결혼까지 생각하게 된 차세광(강민혁 분)의 장차 시누이가 될 누나 차윤희에게 제대로 시누이노릇을 하다가 미운털이 박혔는데, 이제 여기에 더해 장차 시어머니가 될 한만희(김영란 분)와 손윗동서가 될 민지영(진경 분)에게조차 분노를 사고 말았다. 사람은 베푼대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역시 잊어서는 안되는 교훈이다. 역지사지란 상대의 입장이 되어 배려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시어머니도 내일은 친정어머니가 된다. 오늘의 친정어머니가 내일 시어머니다. 결국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개인이기에 가능하다.

그래도 나름대로 성공한 사장이라고 사람 다루는 법을 안다. 굴욕을 주어 포기케 하는 방법을 안다. 자기가 배아파 낳은 딸을 기르는데 아이아빠를 가로챈 여자의 돈을 쓴다. 그것도 구걸하듯 찾아가 받아온다. 아마 전남편 남남구가 그리했더라면 일숙(양정아 분) 또한 원망하는 마음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독하게 다가갔을 것이다. 그러나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했던 그녀이기에 일숙 또한 더 이상 비굴한 자신을 견딜 수 없다. 300만원과 바꾸어 일숙은 자존심을 되찾는다. 윤빈(김원준 분)은 그런 그녀에게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행복한 꿈이다. 윤빈이 귀엽다.

둘째 작은어머니 장양실(나영희 분)의 감춰진 진실이 흥미롭다. 분명 장양실은 아니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가 방귀남을 양주에까지 일부로 데리고 가 버린 것은 아니라고. 알지 못할 사연이 있다. 누구도 알지 못할 처절하고 아픈 사연이 있다. 차마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조차 아프다. 방귀남과 그 아내 차윤희를 이유없이 미워할 만큼. 무엇일까? 어쩌면 협박범이 찾아낸 유산의 기록은 장양실이 방귀남과 함께 버스를 타고 난 이후에 있었던 사실이 아니었을까? 유산을 하고 방귀남과 함께 버스를 탄 것이 아니라 방귀남과 함께 버스를 타고 유산을 하게 되었다. 그같은 비참한 사실을 장양실은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방귀남에 대해서는 몰랐다.

방귀남이 미국에서 자란 이유가 있엇다. 엄청애는 어려서 방귀남을 잃어야 했던 이유였다. 시집살이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엄청애가 차윤희를 시집살이시키는 이유에서. 그리고 그것을 풀어가고자 하는 방귀남의 대안과 차윤희의 영리함에서. 자꾸 생각하게 만든다. 재미있다. 즐거운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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