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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4.30 08:38

남자의 자격 "Architect 꿈과 마법, 남자는 집을 짓는 동물이다."

남자의 오랜 꿈, 아저씨들의 설렘과 바람을 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어려서 세들어 살던 집이 원래는 주인아저씨가 평생을 벌어 직접 벽돌을 날라 쌓아가며 지은 집이었다고 한다. 필자의 기억 속에 아저씨는 중풍으로 항상 방안에 누워 계셨지만 아직 건장하던 때 이 집을 직접 지었노라고 말씀하시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은 개발이 되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어려서 놀러가곤 하던 강원도의 친가 역시 할아버지께서 해방이 되고 남으로 내려오셔서 다른 많은 실향민들처럼 강릉에 정착하며 직접 지으신 집이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필자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돌아가셨다. 아니나 다를까 초등학생의 그림실력으로도 얼마든지 정교하게 묘사할 수 있는 단순한 구조의 집이었다. 강릉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분들의 고향인 함경도와도 그리 멀지 않다.

인간이란 원래 영역동물이었을 것이다. 항상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녔지만 한 곳에 정착해서는 반드시 영역을 표시하고 그 영역 안에 머물렀다. 집을 지을 수 있게 되고서는 가장 먼저 울타리를 치고 기둥을 올리고 지붕부터 얹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거 먼저 숙소를 잡고 짐부터 푼다. 숙소가 없으면 텐트를 세워 머물 곳을 만든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바깥에서의 모든 활동을 마치고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다. 가족이 있고 의지할 수 있는 무리가 있다. 그곳은 오랜시간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중심이었다. 더구나 신석기 이후 사회적 권리란 남성이 독점하고 있었다.

자기집을 바라는 것이야 남성이나 여성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자기집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입장은 사뭇 차이를 보인다. 어디에 집을 지을 것인가? 어떻게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 사회적 권리란 거의 남성이 독점하고 있었기에 그 모든 권한과 책임 역시 남성에 속해 있었다. 더 나은 곳에 더 좋은 집을 짓는 것은 남성의 능력이었다. 직접 집을 짓는다면 그것이 남성의 솜씨일 것이고, 다른 이를 시켜 집을 짓게 한다면 그것은 남성의 힘일 것이다. 여성들은 오랜 시간 남성이 지은 집에 머무는 자신을 꿈꿔왔다. 남성 역시 여성과 장차 가족이 머물 자신의 집을 꿈꿔왔다. 본능이며 훈련된 욕구였을 것이다. 내 집은 내가 직접 짓고 싶다.

단순히 값 오르기만을 기대하고 투자하는 대상이 아니다. 내가 살 곳이다. 내 가족이 머물 곳이다.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문 밖의 각박함과는 다른 지붕 아래의 따뜻함과 편안함이 있다. 여유와 안락과 평온이 있다. 그것은 꿈이다. 그래서 집이란 사람들에게 때로 이상화된 이미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이들이 그리는 집의 그림을 보라. 문득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가 떠올려보게 한다. 노래가사에도 있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그야말로 그림일 터다. 이상을 터다. 이런 집을 갖고 싶다.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 누가 그 집을 지어야 하는가? 바로 나 자신이다.

오랜만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미션이었다. 유익한 정보까지 있었다. 어떤 집에서 살 것인가? 어떤 집을 지으려 하는가? 집을 짓는다면 건축가들이 그 전문가일 것이다. 그들이 하는 일이 바로 집을 짓는 것이다. 막연한 꿈이 그들의 손끝에서 현실에 이루어진다. 모호하기만 하던 어떤 이상과 바람이 그들의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에 의해 현실에서 구현된다. 마법이다. Aechitect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가장 아름다운 기적이다. 무협소설속의 기문둔갑처럼 같은 공간이 전혀 다르게 바뀐다. 판타지의 마법처럼 문을 경계로 이쪽과 저쪽이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 무엇이든 바라는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방송을 보면서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 저런 것이 내가 사는 곳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가장 행복한 꿈이다. 그렇다. 집이란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장소다. 가장 편안하고 가장 안락한 곳. 가장 여유롭게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곳. 가장 가까운 이들이 있다.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나를 의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이 놓이는 따뜻함이 있다. 내가 돌아갈 곳이다. 나는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가? 무엇보다 그것을 내가 직접 바라고 그리고 짓는다. 아주 오래전처럼 내가 직접 기둥과 벽을 세우고 지붕을 올릴 수는 없다.

어쩌면 필요한 방송이기도 했을 것이다. 부동산의 거품이 우리경제에도 상당한 압박이 되고 있다. 자산가치만을 보았다. 두자처로서만 보았다. 과열된 부동산경기는 집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현실적 욕구로부터 출발한다. 단기적으로 시세차익을 노리는 재테크의 대상이 아닌 평생 머물며 살 집을 구한다. 그런 집을 직접 짓고자 한다. 꿈을 돌려준다.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저씨들이라 의미가 있었다. 슬슬 가족과 함께 살 집에 대해 고민할 때다. 이미 확신은 서 있다. 불혹이란 그런 뜻이다. 그동안의 경험과 지혜가 자신의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게 한다. 나는 어떤 집에서 살 것인가? 어떤 집에서 살고자 하는가? 자신과 그리고 가족에 대해. 성찰이기도 하고 증명이기도 하다. 자기와 가족에 대한 마음이며 다짐이다. 그럴 때가 되었다.

굳이 현실로 이루어져서가 아니다. 1등하면 <남자의 자격>에서 집을 지어준다. 얼마나 좋겠는가? 아니더라도 좋다. 꿈을 꾸더라도 좋다. 꿈이란 과거와 미래를 잇는다.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기대를 이으며 현재에 설렘을 전한다. 그것으로도 좋지 않을까? 기대한다. 다음주를.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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