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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4.29 10:01

넝쿨째 굴러온 당신 "엄청애의 서러움과 외로움, 차윤희에게 새로운 위기가 닥치다!"

시집살이의 종합선물세트, 그러나 웃음이 있고 해답이 있어 불편하지만은 않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이숙아, 나는 서른 넘어 어느날부터 여태껏 내 인생은 잃어버린 귀남이를 찾아야겠다는 그것밖에 없었던 것 같아. 물론 귀남이를 찾은 것은 믿을 수 없이 기쁜 일이지. 그런데 문득 돌아보니까 내 인생이라는 게 참... 이게 뭐니, 이숙아?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 같아!"

하필 방귀남(유준상 분)이 어려서 잃어버린 입양아로 설정된 이유일 것이다. 그만큼 더 간절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더욱 헤어져 있던 시간 동안 그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그렇게 아들 방귀남이 간절한데 방귀남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아내 차윤희(김남주 분)가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 엄청애(윤여정 분)는 아들과 며느리의 삶에 간섭하려 들고, 결국 좌절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 부분은 성묘 겸 고모할머니들을 만나러 시골로 내려가서 할머니(강부자 분)가 방귀남에게 충고하듯 들려주던 말과도 관계가 있다.

"네가 너의 어머니와 살 날이 많겠냐? 너의 아내와 살 날이 많겠냐?"

어차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도 한참을 아내와 함께 살 텐데 아내에게는 그때 잘해주면 되지 않겠는가? 지금은 양보하고 그때 가서 마음껏 아내를 위해주라. 지금은 어머니를 위해주고 어머니 돌아가시거든 그때 아내에게 서운한 것들을 모두 풀어주라. 아들이니까. 어머니니까. 그게 도리니까.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어머니니까. 아들이니까. 그게 당연한 것이니까.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자식을 낳고서는 다시 자식을 따른다. 자식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것을 모성이라 말한다. 그것을 본능이라 당연한 도리라 말한다. 어머니가 되어 자식을 잃어버렸는데 어찌 마음편히 있을 수 있는가? 설사 아들을 잃어버리지 않았어도 매 순간을 아들을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것이 우리네 어머니들이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아들이 더 이상 자기만의 아들이 아닌 며느리의 남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심정이 어떠할까?

지금까지 엄청애가 아닌 남편 방장수(장용 분)의 아내로, 시부모님의 며느리로, 그리고 자식들의 어머니로 살았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왔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희생했고 모든 것을 감내했다. 그래서 30년만에 찾은 아들에게도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싶어한다. 30년만에 찾은 아들의 아내에게도 어머니는 시어머니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러지 말라고 말한다. 더 이상 굳이 어머니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이제는 편해지라 풀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엄청애라는 이름마저 포기하고 아들의 어머니로서만 살아온 그녀에게 그것은 차라리 배신이나 다름없다. 버려지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그녀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억울한 것이다. 서운한 것이다. 서러운 것이다. 하지만 결국 사람은 외로운 존재다. 엄보애(유지인 분)와 엄순애(양희경 분) 두 동생들과 함께 하소연하며 위로받으며 공원길을 걷다가 어느새 홀로 남겨진 어머니 엄청애의 모습이 그것을 상징하듯 보여준다. 형제들과도 갈 길이 다르다 . 언젠가는 형제들과도 헤어진다. 그런데도 결국은 헤어질 그것에 집착한다. 자기의 것이 아닌 그것들에 미련을 갖는다. 아니 미련조차 아니다. 그렇게 강요당한다. 그렇게 강요당해 온 삶이었다. 그런데 아니라 하니 분노와 원망하는 마음만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 원망과 분노는 누구를 향하게 될까?

원래도 시집살이란 시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었다. 아들의 어머니로서 살아온 삶에 대한 관성과 미련이 며느리와 아들을 사이에 두고 다투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시대가 바뀌었다. 과거에는 시어머니가 살았던 삶을 며느리도 그대로 따라야 했다. 며느리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삶이란 시어머니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삶이었다. 그러나 이제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가치관 속에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단절과 상실은 더 커진다. 시어머니의 편만 들던 남편과 아내의 편만 드는 아들 사이에 느끼는 고독과 같은 것이다. 남편의 아내이지도 못하고 아들의 어머니이지도 못하다. 갈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자기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기가 아닌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살아왔다. 돌이켜 보니 남는 것이 없다. 서러움과 억울함 뿐이다. 외로움과 분노 뿐이다. 과연 지금 어머니만을 위해 살다가 시간이 흘러 서로 원망만 남은 채 아내와 나머지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내가 이해해준다면 상관없지만 이미 그때는 좋은 날은 다 지나가고 난 뒤다. 가장 소중한 때 가장 소중한 그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가장 필요한 때 가장 필요한 자신이 되어주지 못했다. 따뜻한 겨울을 나기 위해 여름을 잊고 열심히 일을 하지만 아무리 풍요로운 겨울도 여름의 뜨거움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갖지 못한 것은 미련이 되고 집착을 남긴다.

대안은 무엇일까? 바로 차윤희의 친정에 답이 있다. 아마 어지간해서 친정어머니 한만희(김영란 분)와 올케 민지영(진경 분) 사이가 크게 틀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갈등이란 서로 감추고 오해하는 것이 있을 때 생겨난다. 서로 감출 것이 무엇이 있던가? 오해할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산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 대한 서운함을 감추지 않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에 대한 불편함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래서 항상 사이가 좋지 않지만 그럼에도 서로에게 가장 솔직할 수 있는 것도 그들 자신이다. 조금 더 나이를 먹게 되면 그들은 아마 시어머니와 며느리이기 이전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배경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맞추는 아들이자 남편 차세중(김용희 분)의 존재가 있다. 그는 항상 아들이며 남편으로서의 자신을 잊지 않으면서도 차세중이라는 자신 또한 포기하지 않는다. 현재에 최선을 다한다.

조금 더 젊은 시절 자기를 위한 삶을 살 수 있었다면. 그래서 방귀남을 잃어버려야 했던 것이다. 잃어버린 아들을 잊고 어머니가 혼자서 자기만의 삶을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 잃어버렸기에 찾아야 했고, 찾을 수 없었기에 항상 그리워해야 했다. 그런데 정작 찾고 나니 아들에게는 아내가 있다. 부모보다 더 가까운 아내다. 현실이 그렇지 않던가? 과장함으로써 보다 명징한 현실을 드러낸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아들 사이의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과연 시어머니란 고부갈등에 있어 일방적인 가해자이기만 한 것인가? 방귀남의 현명한 한 마디조차 어머니를 가슴아프게 하는, 아내 차윤희마저 타박하고 마는 경우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현실에서 그 문제점을 짚어보게 된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삶의 방식을 모두 바꿀 수는 없다.

시어머니와도 친구가 되었다. 이제 남편 방장수가 조금만 아내 엄청애를 돌아봐주면 어떨까? 이제라도 남편으로서 아내만을 위한 시간들을 살아간다. 굳이 아들이 아니더라도 남편과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서 위로를 얻고 행복을 누린다. 역시 남편의 존재가 문제다.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도, 며느리가 시집살이를 당하는 것도, 결국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남편들이 제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역할이 있다면 시아버지와 아들에게도 각각의 남편으로서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아내로서 자기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 이제까지의 삶을 후회하게는 만들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작은 투정조차 받아주지 않는 방장수의 냉정함이 야속하다. 그래서 차윤희는 어머니를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한다.

차윤희의 처지가 정말 동정할 만하다. 시집살이도 종합세트다. 아니 그 가운데서도 최악일 것이다. 종교라니. 더구나 시어머니가 믿는 종교를 위계를 이용하 강요하려 한다.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시어머니는 선의로 그리 하는 것이다. 종교란 기본적으로 복을 구하는 것이다. 선하게 살고 정의롭게 행동하고 행복한 삶과 기쁨을 보답으로 누린다. 종교를 믿어 나쁠 것은 없다. 오히려 종교를 믿지 않기에 많은 어려움과 고통에 직면한다. 그런데 그같은 종교를 강요하는 행위가 정작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다.

많은 집안에서 그래서 가족 사이에 종교문제로 갈등을 일으킨다. 선의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이 정도를 넘어섰을 때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다툼으로까지 번지고 만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에 이제는 종교문제까지. 자식문제도 있다. 일 때문에 아이를 갖기가 꺼려진다. 아이를 낳더라도 한참 나중의 일이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 가장 민감한 두 가지 주제가 차윤희와 엄청애 사이에 던져졌다. 이들 두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눈앞에 놓인 장애에 대해 어떻게 현명한 대안을 찾아내게 될까?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코미디를 지향한다. 코미디란 유쾌하고 행복하다는 뜻이다.

아무튼 결혼과 더불어 많은 젊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일 터다. 아이를 낳으라.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도 있다. 대가 끊기면 큰일난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도 있다. 그보다는 아이를 낳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도리다. 아이를 낳지 않고서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혼도 하기 전부터 후손을 낳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는다. 세대가 다르다. 필요에 의해 자식을 낳을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지금과는 다르다. 고부갈등은 세대갈등이기도 하다.

역시나 차윤희의 가장 큰 비극은 그녀가 선량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녀는 시집살이라는 현실에 대해 너무 잘 안다. 그렇다고 그것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부정할 생각도 없다. 시어머니에게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한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나 끔찍이도 싫다. 호러라 여겨질 정도다. 그럼에도 끝끝내 짓짓 표정까지 꾸며가며 시집식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한가? 그럼에도 그녀는 한국의 보편적인 여성이다. 그래서 미국에 입양되었던 방귀남과 함께 산다.

둘째작은어머니 장양실(나영희 분)의 비밀이 점차 드러난다. 유산을 했다. 처음부터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임신을 하기는 했었는데 그만 유산하고 말았다. 아마 그때 잘못되어서 영영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이를 유산한 시점이 방귀남이 실종된 그 무렵과 일치한다면 어느 정도 정황이 만들어진다. 그녀가 공황과 더불어 분노와 원망을 갖게 되었을 상황이. 증오했을 것이다. 지금의 차윤희를 대하는 모습처럼.

어머니들의 삶이 참으로 짠하다. 하지만 더 눈물겨운 것은 이제 시대가 바뀌어 예전처럼 그같은 노력들을 보상받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일 게다. 더 이상 아들만으로는 안된다. 아버지들도 마찬가지다. 어머니만으로는 아내들이 너무 서운하다. 결국 함께 늙어가는 것은 남편과 아내다. 바로 곁에 있는 그들이다. 서로의 지금에 대해 후회없이 최선을 다한다. 미련이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자식들이야 알아서 자기 살 길을 찾아간다. 부모 없이도 방귀남도 잘만 자랐다.

이숙(조윤희 분)의 첫사랑이 밝혀지려 한다. 천재용(이희준 분)의 심술이 얄궂다. 말숙(오연서 분)과 차세광(강민혁 분) 사이의 로맨스가 달달하다. 첫사랑에 설레어하는 아이들 같다. 여전히 허세속에 사는 왕년의 스타 윤빈(김원준 분)과 그런 윤빈에게서 환상을 쫓는 일숙(양정아 분)의 오해도 흥미롭다. 사랑전선에 이상은 없다. 차윤희의 호러가 코미디로 바뀌기만 바랄 뿐.

지진희의 까메오 출연으로 한 바탕 크게 웃을 수 있었다. 과장된 코믹연기가 엄청애와 차윤희가 놓인 상황을 불편하지 않게 극대화한다. 자칫 불쾌할 수도 있는데 웃을 수 있기에 즐겁다. 차윤희의 마음은 물론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재미있다. 생각할 것들이 많다. 의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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