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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4.17 10:28

빛과 그림자 "죄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 역사가 아닌 지금을 보다."

여전히 존재하는 무도한 정의, 완결된 역사가 아닌 진행형의 현재를 우려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요즘도 가끔 그런 말을 듣거나 본다.

"삼청교육대 같은 걸 만들어 다 쓸어넣어야 하는데..."

과거에 완결된 지난 역사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진행형인 현실이다.

아마 예전 어느 기자가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지금 네티즌들이 하는 행동이 과거 권력이 하던 것이다."

드라마에서 국보위 장교가 강기태(안재욱 분)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죄가 있는가 없는가는 관심없다. 오로지 대한민국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쓰레기들을 잡아다 교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너무 정의롭다. 너무 정의로워서 잘못된 것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한다. 어떻게든 바로잡아야 한다. 바로잡아야 한다는 당위가 그 수단을 정당화한다. 정의로운 동기가 그 수단과 방법등을 정당화한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설사 잘못된 것이 있더라도 단지 소수일 뿐이다.

그래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다.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이란 항상 소수이니까.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도 전체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물론 나는 아니다. 더구나 최근의 네티즌이란 스스로 단죄하는 입장에 서 있다. 네티즌이란 정의의 다른 말이다. 대중이란 무오류를 담보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정의롭다.

과거에 삼청교육대가 있었다면 지금은 네티즌수사대가 있다. 과거 국보위가 있었다면 지금은 네티즌이 있다. 삼청교육대를 대신해서 네티즌은 언어로써 사람을 단죄한다. 죄가 있는가 없는가는 상관없다. 그것이 죄가 되는가 아닌가도 상관없다. 단지 네티즌이 판단하기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가 아닌가. 설사 죄가 없더라도 네티즌이 보기에 문제가 있으면 그는 대상이 된다. 나라를 위해서라도 바로잡는다. 사회를 위해서라도 응징하여 바로잡는다.

그래서 삼청교육대를 부활하자는 말도 나오는 것이다. 오히려 중국을 부러워한다. 피의자의 인권따위 전혀 상관없이 유린하는 중국정부의 무도함을 부러워한다. 어떤 사건이 터지면 타겟을 잡아 온갖 언어폭력을 일삼으며 정의를 과시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그에 대한 어떤 작은 비판조차 감수하려들지 않는다. 중정 위에 국보위가 있다. 인간 위에 네티즌이 있고 대중이 있다.

필자가 때로 네티즌이나 대중의 여론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때로 그것은 정당하다. 개인으로서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다만 그것이 집단에 의해 폭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때는 전혀 의미가 다르다. 스스로 수사관이 되고 재판관이 되어 집단의 권력으로 개인을 자의적으로 단정하려는 시도 또한 전혀 다르다. 과연 그 가운데 개인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는가? 아니 설사 감정을 배제하고 판단했더라도 그 가운데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항상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정의로움을 경계한다. 의심없는 정의를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정의에 대한 확신이야 말로 다른 가능성을 돌아보지 않는 오만과 독선일 수 있다. 오만과 독선이 힘을 가지게 되면 그것은 무도한 폭력이 된다. 비판도 견제도 반성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 자체로써 옳다. 당하는 사람이 악이다. 그래서 네티즌도 말한다. 당하는 사람에게는 당하는 이유가 있다.

아무튼 생각한다. 당시 삼청교육대에서도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직접 삼청교육대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인권유린을 자행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최소한 일본에서는 과거 자신들이 저질렀던 범죄행위에 대해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는 이들이 많지는 않아도 있어왔다. 그러나 과연 과거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직접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이들이 몇이나 있던가? 삼청교육대의 진실에 대해 직접 털어놓으며 반성과 용서를 구하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직도 그것을 그리워하고 직접 실천하는 이들이 있는 가운데.

아우로서 대하던 이를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도 이제 입장이 바뀌었으니 오히려 형님이라 모시겠다 한다. 가치가 뒤바뀐 당시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선후배의 문제도 아니다.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권력을 쥔 자가 정의가 된다. 장철환(전광렬 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다. 그는 바로 시대의 모순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정의롭지 못한 관계였다. 처음부터 당당하지 못했던 사이였다. 바로 그것이 자격지심이다. 잘못된 동기로, 잘못된 절차와 수단을 통해 시작된 관계이기에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그대로 끝나버릴 수 있다. 그것이 항상 두렵고 불안하다. 그래서 의심하고 경계하게 된다. 집착하고 원망한다. 분노하고 증오한다. 차수혁(이필모 분)이 이정혜(남상미 분)와 강기태에게 갖는 감정이다. 그가 진정 증오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바로 자신이다.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이다.

역시나 장면들이 이어지지 않는다. 마치 감독의 큐사인이 떨어지는 순간을 보는 듯 장면의 시작조차 어색하게 가닥가닥 끊겨 있다. 하나의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각각의 파편화된 장면들이 결국에는 이어지게 보이는 것이다. 배우의 연기력의 문제가 아니다. 전광렬의 열연마저 그래서 이제는 괜한 오버로 보인다. 오버하지 않고서는 감정선을 잡기도 힘들다. 드라마란 대화가 아니다. 연기란 액트다. 연기자를 플레이어라 부른다.

삼청교육대로 연행하기 위해 들이닥친 국보위조차 어설프고 어색하다. 긴장감이 없다. 총는 장난감같고 장교와 병사들은 일당치기 단역같다. 물론 맞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최대한 그럴싸하게 긴장감있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연출일 것이다. 그럴만한 여력조차 없다. 이제 앞으로 9회, 처음부터 무리한 기획이었다. 드라마가 완전히 녹아 허물어지고 있다.

어쨌거나 어째서 인권이고 민주주의인가? 어째서 인간이고 자유이고 평등인가? 법이고 보편이고 공공의 규범인가? 무도한 권력을 경계한다. 비판받지 않고 견제되어지지 않는 권력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것이 절실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소수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루어야 하는 더 크고 더 중요하고 더 의미있는 더 정의로운 목적이 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과연 지금 우리 사회에 삼청교육대란 없는가? 국보위란 없는가? 장철환은? 그리고 조명국은? 차수혁은? 강기태도 어느새 그들을 닮아간다. 불의한 시대에는 인간도 불의해진다. 비루한 시대에 개인 또한 비루해진다. 빛보다는 그림자가 더 또렷하다. 그림자로 형태를 인식한다.

과거를 욕하지 않는다. 과거보다 중요한 것이 현재인 까닭이다. 그래서 우울하다. 드라마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도 30년도 더 전의 이야기다. 그러나 필자는 그로부터 지금의 현재를 본다. 안타까운 것이다. 발전이란 없는 것일까? 완결되지 않은 역사가 슬프고 서럽다.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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